추가 외전 5화(完)
“이제야 하는 소리인데요. 아들일까요, 딸일까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너를 닮았으면 좋겠어.”
“흠, 잘생긴 당신을 닮는 편이 더 이득일 텐데요.”
“…….”
하얗던 그의 뺨이 약간 붉어진 게 보였다. 결혼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이렇게나 귀여웠다. 오필리어가 기쁘게 웃자, 클레멘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속삭였다.
“아니, 네가 제일 예뻐.”
“…….”
귓가에서 입을 뗀 클레멘츠는 방금 전 그에 대한 오필리어의 것과 정확히 같은 감상을 품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워지려던 차였다.
“으억.”
오필리어가 배를 감싸 쥐었다. 클레멘츠는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딸인지 아들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무골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체념한 어조로 중얼거리곤 했다. 클레멘츠가 보기엔 무골이 아니라 망나니였다.
개월 수가 불어날수록 발길질이 심해지는데, 클레멘츠가 그녀의 배를 쓰다듬거나 둘만의 애정 표현을 할 때면 아예 오필리어가 가만히 있지 못할 만큼 요동을 쳐 대곤 했다.
“세상 밖으로 나오면 단단히 혼 좀 나야겠어.”
“태어나지도 않은 애가 무슨 잘못이 있어요. 안 그럴 거죠?”
“…….”
클레멘츠도 물론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오필리어가 고생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지라, 은연중에 저 작은 생명에 대한 원한이 아예 생기진 않았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마음을 잘 갈무리할 것이었다.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로,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로 그녀와 약속했으므로.
“그런데 지금…… 그, 그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평소와 달리 태동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그도 막 눈치챈 차였다. 오필리어는 비 오듯 땀을 흘렸다.
“궁의를 불러라!”
다가오는 예정일에 단단히 대비하고 있던 황태자궁은 ‘아닌 새벽에’ 비상이 걸렸다.
“황금새 아가씨, 걱정 마, 내가 있잖아. 날 따라서 숨만 잘 쉬면 돼. 알았지?”
오필리어는 자신이 힘들어할 때마다 다독여 주는 크렘시아를 보며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고 또 빈 지 몇 시간째.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클레멘츠는, 누군가 소식을 전하기도 전 냅다 안으로 들이닥쳤다.
피로 물든 기구와 천들이 쌓여 있는 걸 본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질려 버렸다. 어디 한 군데라도 다칠까, 조금이라도 상할까 애지중지하던 섬세한 몸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다니.
출산 중에 잘못되는 여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혹여나 오필리어가 떠난다면 더는 살아갈 의미가 없었다. 클레멘츠가 속으로 겁에 질린 채 주위를 둘러봤으나, 다들 평화롭다 못해 기쁜 분위기였다.
“황태자비 전하와 아기님 모두 무사합니다.”
심지어 옆에서 궁의가 뿌듯한 얼굴로 아뢰기까지 했다.
‘그러면 이 정도는 보통이라는 건가?’
이딴 건 아무도 알려 준 적 없었다. 클레멘츠는 세상으로부터 기만당한 것만 같았다.
몰라서 한 실수는 한 번에 그쳐야 한다.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하며, 그는 침상 곁으로 가 제 아내의 손을 잡았다.
“오필리어.”
“클레멘츠…. 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미안해.”
“당신이 미안할 것까지야……?”
천하의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을 그녀가 의아하게 바라볼 무렵, 그들의 앞으로 강보에 싸인 아기가 내밀어졌다.
“짜잔! 너무너무 늠름하고 멋진 공주님이에요!”
크렘시아가 뿌듯하게 소리쳤다. 클레멘츠는 의문이 들었다.
‘늠름하고 멋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니만큼 최대한 좋게 보고 싶었으나, 솔직히 말해서 갓난아기는 붉고 쭈글쭈글하고 기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옆에서 오필리어가 행복한 목소리로 감탄해 왔다.
“우와, 클레멘츠! 당신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
그는 어찌할 바 모르고 있다가 드물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네.”
태어난 황손이 클레멘츠를 닮았다는 사실은 얼마 안 가 사실로 밝혀졌다. 뒤싱겐 황가의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아이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며, ‘어떻게 이렇게 아버지와 똑같이 닮았느냐’라는 소감을 내놓았다.
다만 풍성하게 굽이치는 금발, 사랑스러운 볼과 턱선 정도는 어머니인 오필리어와 흡사했다.
부부가 미리 상의해 둔 바에 따라, 딸의 이름은 엘레오노라로 정해졌다.
엘레오노라 아우구스타 뒤싱겐.
[뒤싱겐의 딸. 여길 봐.]
[여길 봐, 착하지? 뒤싱겐의 딸.]
밤과 낮의 마물, 닉타와 메라는 요람 앞에서 열심히 딸랑이를 흔들어 댔다.
그 뒤에서 오필리어는 일단 마물이 딸랑이를 흔들 수 있다는 것과, 마물이 인간 앞에서 긴장할 수 있다는 걸 새롭게 알아챘다.
웃어 줄까, 말까. 저 딸랑이를 뺏어서 던지며 호통을 칠까, 말까. 엘레오노라의 커다란 눈은 기분에 따라 선택지를 재어 보며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필리어의 딸은 뭇사람을 상대로 우위를 선점했고, 그 어떤 존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마침내, 아이가 천사같이 웃었다.
[웃었어! 다행이야!]
[뒤싱겐의 딸! 착한 아이가 틀림없어!]
닉타와 메라는 눈물겨워 하며 요람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딱 한 시간 전까지 저 대사는 ‘뒤싱겐의 딸! 악마가 틀림없어!’였다.
“아하하…….”
오필리어는 멋쩍게 웃었다.
크렘시아의 보살핌 덕분에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출산 이전과 거의 다를 게 없어졌다. 하지만 아이가 워낙 까다로운 탓에 오필리어, 그리고 사람들은 물론 마물들까지 애 보기에 동원되고 있었다.
황손녀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별궁에서 쇠약해져 가던 코넬리우스 황제가 숨을 거두었다. 클레멘츠가 순조롭게 다음 황위에 오르고, 제국은 계속되는 풍요와 평화를 누렸다.
“자, 조준할 때는 잠시 호흡을 멈추는 거야. 똑바로 과녁을 본 채로 시위를 놓아야 해.”
탁, 작은 손과 겹쳐진 손을 놓자 짧은 화살이 정중앙에 박혔다.
“와!”
엘레오노라는 벨라가 선물해 준 활을 든 채 방방 뛰었다. 오필리어가 예측한 대로, 이 선물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되었다.
“저도 어마마마처럼 커다란 활로 멀리 있는 목표를 맞추고 싶어요.”
“아직 작아서 그래. 우리 노라가 조금만 더 크면, 엄마보다도 먼 곳에서 활을 쏠 수 있게 될 거란다.”
진심이었다. 오필리어 자신이 작은 탓인지 꿈속에서 본 장군 병아리만큼 우람하지는 않았지만, 엘레오노라는 기운이 남달랐다.
“그렇지만 저는 지금 당장 쏘고 싶은걸요.”
오필리어는 애교를 피우며 드러눕는 딸아이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모녀에게는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다른 이들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괴리감에 손을 파르르 떨었다.
엘레오노라 황녀. 클랏샤의 사랑스러운 폭군.
그 아이가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는 건 오로지 어머니 앞에서뿐이었다.
황녀가 걷고, 뛰고, 말하기를 시작할 때마다 사람들은 새로운 지옥을 맛보았다. 너무나도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여러 명의 보모들을 탈진시켜야만 잠자리에 들었고, 호기심이 너무 많아 한 번 말 상대를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조금 더 커서는 황궁을 주름잡고 다녔다. 또래의 아이를 봤다 하면 귀족이든 평민이든, 어느새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어 부려 먹고 있었다. 그래 봐야 무등 태우기, 부채질하기, 정원에서 예쁜 돌 구해 오기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성격이 이 모양이어도, 크게 잘못하거나 선을 넘은 일은 없었기에 황제 부부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늘 헷갈리곤 했다.
가르쳐 주는 건 뭐든지 잘 배웠고, 도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유능한 대신이나 귀족들을 만나면 그들의 분야에 대해 참신한 질문을 해 가며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어 갔기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황녀가 천재라는 풍문이 돌았다.
하지만 오필리어는 그저,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 이제 친구들이랑 놀아야지?”
“네, 어마마마.”
바짓자락을 탈탈 털며 일어난 황녀는 황궁 후원의 풀밭 쪽으로 달려갔다.
“이리 와, 이것들아! 나 없는 동안 한숨들 잘 돌렸냐?”
“으악, 황녀님!”
“살려주세요!”
함께 뛰어놀다가, 엘레오노라가 오필리어와 함께 활을 쏘는 사이 엎어져 쉬고 있던 아이들이 비척비척 일어나 도망쳤다.
말려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잘 보면 다른 아이들도 스스로 저런 엘레오노라와 놀고 싶어 했다. 오필리어는 도망치는 아이들의 입가에 살그머니 걸린 미소를 보며 함께 웃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클라티아에 영원한 번영을 가져온 명군’과 ‘정복 행위에 중독된 패권 군주’ 사이에서 평가가 갈리는 엘레오노라 황제의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끼익-
어둑어둑해진 시간. 엘레오노라는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랑 같이 잘 거야!”
하지만 침대 위에 겹쳐진 그림자를 보고, 아이의 입술은 뾰로통하게 올라왔다.
말이 어머니의 방이지, 시도 때도 없이 오시는 아바마마 탓에 사실상 부부 침실이나 다를 바 없었다.
꼼지락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간 엘레오노라는,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아버지를 휙 밀쳐 낸 뒤 자신이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리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번에 새근새근 잠에 빠져 버렸다.
“허.”
갑작스러운 자그마한 날벼락에 깨어난 클레멘츠는 잠든 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일이 하도 많아서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처음엔 오필리어와의 시간을 방해받을 때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지만, 그럴 때마다 잘 참아 내며 제 감정을 사이좋은 가족의 모습으로 녹여 내었다. 처음엔 오필리어를 위해서였고, 이제는 제법 이런 짓을 해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딸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클레멘츠는 제 아내와 딸을 한 번에 끌어안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도 뿌듯하게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들 속에서 오필리어는 작게 웃었다.
그녀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추가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