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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17)화 (217/218)

추가 외전 4화

“괜찮으십니까, 백작님?”

“내가 뭐.”

벨라는 퉁명스럽게 답하곤 천천히 집무실 안을 걸었다.

집사는 이 댁 아가씨였던 새 백작의 화법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대인 관계에 워낙 서투른 탓에 곧잘 가시 돋친 말투를 쓰셨지만, 알고 보면 악의 없이 순수한 분이었다.

“황태자를 암살할 순 없는 거겠지?”

“커헉.”

침착하기 짝이 없는, 대역무도한 발언이었다. 집사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답했다.

“예. 아무래도 저희 혼우드 지역의 입지와 인력 사정상 그건 힘듭니다.”

“아쉽군.”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비 전하께선 홀로 아이를 키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벨라는 한동안 아련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생이란 정말…… 복잡하고 슬펐다.

“각지에서 황실로 선물과 축하의 뜻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백작님께선 직접 가셔서 축하해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분께서 정말로 기뻐하실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벨라는 아주 빠르게 대답하고 덧붙였다.

“워프 포탈을 예약해.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

“지, 지금 당장이요? 하지만 아직 처리하실 일이 남았습니다.”

“적당히 대신 처리하고 미뤄 놔. 할 줄 알잖아.”

“선물도 아직 준비하지 않으셨고…….”

그 말에 벨라는 그만 고장 나 버렸다.

‘선물?’

국혼식 때는 이런 일을 더 잘 아는 집사에게 일임한 뒤 최종 목록을 승인했었다. 매년 오필리어의 생일 때도 백작가 주방에서 특별히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줬을 뿐.

선물을 받을 이가 진심으로 기뻐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건을 고른다는 건, 벨라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망할!’

허구한 날 돌아오는 생일도 아니었고, 결혼은 그 마음에 안 드는 놈과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 태어나는 아이는 오필리어의 친자식이었다.

해서 직접 선물을 고르고 싶었다. 그것도, 끝내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기뻐하며 잘살고 있는 그 아이에게 가서 변변찮은 것을 쥐여 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뭘 주면 좋지? 뭘 주면……대체 뭘 주면.’

당장 백작가의 일꾼들만 모아 봐도 아이를 낳아 본 이들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친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어떤 선물이 좋을지 물어보자니,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런 짓은 불가능했다.

결국 해가 지기를 기다려, 흑표범으로 변한 그녀는 안개의 숲을 향해 내달렸다.

[랜니스가 왔어.]

[너무 오랜만이야!]

[랜니스, 어쩐 일이야?]

[랜니스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숲을 웅웅대며 채우던 목소리들이 조용해졌다. 벨라는 다시 그르렁거렸다.

[됐고, 너희 중 새끼를 낳아 본 녀석들만 대답해. 그때 뭐가 필요했어?]

작은 웅성거림이 울렸다. 이내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다.

[마기가 가득 고인 흙탕물!]

[무엇보다도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가 좋더라. 아, 오해하지 마. 인간은 안 먹었어.]

[그땐 이상하게 사나워져서. 실컷 물어뜯을 여린 목줄기가 있으면 좋겠다 싶더라. 물론 직접 찾아내서 물어뜯었어.]

[…….]

그럼 그렇지. 여기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멍청했다. 벨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숲을 벗어나 달렸다.

제 방으로 돌아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그녀의 본모습을 돌려주었다.

‘젠장.’

오랜만인 만큼 멋지게 나타나고 싶었다. 선물을 받은 그 바보 자식이 기쁘게 웃었으면 했다. 왜냐하면 사실은 오래전부터, 오필리어가 웃을 때면 자신 역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젠장!’

임산부에게 필요한 것? 이미 그 자식이 모자람 없이 갖춰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제국 전역에서 비슷비슷한 선물들이 몰려들고 있겠지.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 오필리어는 이미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맛있는 파이, 소설책, 노래할 공간. 전부 수도에 더 좋은 것들이 있다. 자신은 유일한 친구의 기쁜 일을 제대로 축하해 주지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었다.

“그냥…… 가지 말까?”

거기까지 갔을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곤란하죠. 당신이 안 가면 어떡해요?”

자신 외의 인기척이 감지되는 순간, 벨라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손에 목덜미를 내어준 메디프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여긴 왜 온 거야?”

“당연히 보고 싶어서 왔죠.”

그가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다듬는 동안, 벨라는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듯 두른 손을 풀지 않았다. 체격 차이탓에, 놈의 목을 손에 쥐니 자신도 자연스럽게 저쪽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쯤 왠지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요. 마음 같아선 황태자비 전하를 축하하러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쉽지 않죠?”

“그걸 네가 어떻게! 네 놈이 뭘 알아!”

벨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기세 좋게 소리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필리어 님은 당신이 빈손으로 찾아가도 뛸 듯이 기뻐할 테니까. 아니, 지금쯤 몸이 무거워서 뛰지는 않으려나?”

흠, 하는 침음이 태연하게 흘렀다. 좋아하는 마법을 하고 있다더니, 어쩐지 더욱 능청스럽고 차분해진 것 같았다.

“정 고민된다면 당신만이 줄 수 있는 걸 찾아보지 그래요? 화려하거나 그럴싸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예요.”

“……꺼져.”

“네. 알겠어요.”

메디프는 아직 힘을 주지 않은 벨라의 손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다시는 여기 나타나지 마.”

“흠, 그건 좀…….”

청보랏빛 눈이 곱게 접혔다. 거의 동시에 그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졌다.

벨라는 그 깔끔한 빈자리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진짜 웃기는 놈이네.”

조만간 저택에 마법 차단 결계를 설치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래도 어느샌가 마음은 제법 가벼워져 있었다.

“벨라!”

오필리어는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벨라는 옛 시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살심이 끓어올랐다.

묘하게 얼굴이 상해 있었다.

“역시 그 자식 죽여야겠어.”

“진정해, 벨라. 나 괜찮아.”

오필리어는 빠르게 건강을 되찾았다. 여전히 입맛이 없었지만, 크렘시아가 준 약을 먹으니 심한 구역질은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살만했다.

하지만 벨라의 눈으로 볼 땐 여전히 예전만 못했다. 벨라는 집무실에서 황태자를 끌고 와서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었으나, 오필리어가 활짝 웃고 있었기에 참았다.

“만나서 정말 반가워! 네가 더 일찍 왔다면 좋았을 텐데.”

참지 못할 것도 없었다. 벨라는 가지고 온 선물을 내밀었다.

“자. 별 건 아닌데 가지든가.”

조금 기다랗고 묵직한 상자는 검붉은 벨벳으로 싸여 있었다. 오필리어가 그것을 풀어 보자, 어린아이의 몸집에 맞춰 만든 작은 활과 화살이 들어 있었다.

“와!”

“크흠. 흠.”

감탄하는 얼굴을 보니 뿌듯함이 차올랐다. 지금껏 이런 선물은 아무도 준 적 없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가 크면 네가 직접 가르쳐 줘.”

“그래야겠다. 태어날 아이가 나를 닮았다면 맨날 이거만 끼고 살지도 몰라.”

벨라가 자주 쓰던 활처럼 붉게 장식된 작은 활을 보자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필리어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벨라.”

“하, 참! 허!”

성을 내며 발갛게 달아올랐던 벨라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아주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고맙긴.”

그 미소에 오필리어는 크게 놀랐다. 황금빛 눈이 아주 동그랗게 커졌다.

“벨라, 너 지금… 웃은 거야?”

“아닌데.”

“웃은 것 같은데.”

“안 웃었는데.”

고향 친구끼리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방 뒤편에서 허브차를 준비해 온 카밀이 도도하게 등장했다.

“글쎄, 저는 당신이 웃었는지 아닌지는 관심 없지만. 여전히 한참 멀었군요, 모나한 백작.”

“뭐?”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웃으며 축하해 주는 방법도 모르고. 게다가 선물이 활과 화살이라. 흐음…….”

카밀은 고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피식 웃었다. 그 손에는 여전히 즐겨 끼는 레이스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벨라는 살벌하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이가 대체 언제쯤 쓸 수 있을 줄 알고. 제 선물을 좀 참고하실래요?”

카밀이 자랑스럽게 가리킨 곳에는, 뭔가 커다랗고 휘황찬란한 것이 있었다. 벨라는 처음에 그것이 가구라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니 장식장처럼 구획을 맞추어 만든 대형 선물상자였다.

크고 작은 칸칸에 맞추어, 대충 봐도 임신한 여성을 위해 준비된 선물이 가득했다. 게다가 전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이 딱 봐도 오필리어의 취향이었다.

‘열받아.’

벨라는 애써 오필리어가 자신의 선물을 받고 기뻐했던 걸 생각하며 버텼다. 얘는 내 선물도 마음에 들어 했단 말이야.

“아이 옷과 장난감, 기저귀, 신발은 물론이고 황태자비 전하가 쓰실 옷과 속옷과 화장품, 영양제. 살이 트지 않도록 해 주는 보습제까지 준비했다고요. 이정도는 기본이죠.”

“…….”

“곧 베일리스 영지 최고의 과일 산지에서 아주 신선하고 달콤한 과일들이 도착할 거예요.”

“젠장! 나도 저런 거 사올걸!”

결국 참지 못한 벨라가 소리치자, 카밀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어댔다. 그러던 중, 두 여자는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침상 위로 급히 주의를 돌렸다.

“그만해. 둘 다 내 소중한 친구니까.”

“…….”

“…….”

“옆에 누워 줄래? 둘 다 키가 커서 영 올려다보기가 힘들다.”

각각 ‘저쪽’과 한 침대에 눕고 싶진 않았지만, 목이 아프다는 오필리어의 말에 허겁지겁 그녀의 옆자리 한쪽씩을 차지하고 누웠다.

오필리어의 말대로 둘 다 늘씬하게 키가 컸지만, 다행히 침대는 세 여자가 눕고도 많이 남을 정도로 컸다.

“이러니까 진짜 좋다…….”

오필리어는 나른히 중얼거리며, 친구들의 손을 꼭 끌어당겼다.

“…….”

“…….”

방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둘 다 내 아내 옆에서 일어나.”

급한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클레멘츠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볼 때까지, 두 여자는 잠든 오필리어를 내려다보며 같은 침묵을 공유하고 있었다.

* * *

오필리어의 출산 예정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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