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외전 3화
이튿날, 오필리어와 클레멘츠는 황궁 서쪽에 있는 별궁을 찾았다.
고즈넉하지만 을씨년스럽진 않고, 아담하지만 협소하지는 않은 그곳에 현 클라티아 제국의 황제가 머물고 있었다.
당신의 의도와 달리 클레멘츠가 복권되고, 아내와 자식들도 실망스러운 태도를 드러내자 황제는 모든 기력을 잃은 채 별궁에 틀어박혔다.
황제가 시름시름 앓자, 그가 곧 붕어할 것 같다는 의견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었다.
특별히 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의욕을 잃고 일상이 무너져가는 데다 노환까지 겹치니 하는 말들이었다.
따라서 황제가 국정을 수행할 능력이 되지 않자, 국가 수장의 역할은 전부 황태자에게로 돌아갔다.
사실상 클레멘츠가 실질적인 황제인 것과 다름없었다.
“왜 왔느냐?”
별궁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방 역시 고즈넉하고 아담했지만, 두 눈으로 보니 코넬리우스 황제 본인은 소문보다 더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제국의 영광인 아다만티스. 그리고 마계와의 대립을 끝낸 황태자. 둘 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며 잘들 살고 있지. 짐의 송장을 치우기 전까진 여길 들여다보지도 않을 줄 알았다.”
오랜만에 봤음에도 참 못된 말만 골라서 하는 노친네였다.
오필리어의 반걸음 옆에 선 클레멘츠가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궁정식 절로 예를 갖추었다.
“황손을 가졌습니다.”
“……뭐라고?”
자신의 손자가 생겼다는 소식에 코넬리우스 황제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놀란 눈치였다.
“우리는 폐하와는 다른 부모가 되려고 합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헤매고 있는 황제 앞에서, 오필리어는 말을 이어 갔다.
“사랑하기 위하여 이 아이를 낳고, 낳은 다음에는 끝까지 지켜 줄 거랍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요.”
“…….”
거기에서 서로 더 할 말은 없었다. 오필리어는 차갑지 않은 클레멘츠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 * *
“후후…….”
마계의 하늘에 붉은 벼락이 쳤다. 어떤 소동을 감지한 것처럼, 까마귀를 닮은 마물들이 떼를 지어 후두둑 날아갔다.
거의 동시에 여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인근을 가득 메웠다.
“후후후……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붉은 마공작, 크렘시아의 기분은 최근 백여 년 가운데 가장 좋아 보였다.
“히익…….”
광기마저 느껴지는 과도한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에, 주변의 악마들은 황급히 도망쳤다.
“크렘시아.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격렬한 감정 탓에 국부적인 기상 이변까지 일으키고 있는 크렘시아의 곁에 다가올 수 있는 건, 새로 태어난 마왕 아르테미스뿐이었다.
“나의 뒤싱겐에게 아이가 생겼어.”
“뒤싱겐과 아다만티스에게? 잘된 일이네!”
아르테미스는 진심으로 기쁜 나머지 박수를 치며 두어 바퀴를 돌았다. 춤을 추듯 움직인 그녀의 발밑에서 장차 숲으로 변할 어린 식물들이 자라났다.
“아들이야, 딸이야? 인간들에겐 그게 중요하다던데. 너의 권능으로 알 수 있어?”
마족들의 능력을 결정짓는 건 마력의 총량보다도 권능의 종류였다. 크렘시아는 ‘탯줄을 엉키게 하는 손’이라는 이명대로, 모든 출산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태어날 아이가 싸움꾼이라는 거야. 제 어미, 아비를 합친 것보다 천 배는 더.”
“…….”
“어떤 무기를 잡든 간에 금방 배우겠지. 모든 전장을 지배하고 제 깃발을 꽂아 넣을 거야.”
환희에 들뜬 크렘시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수천 년 동안 모아 온 전설의 무구들과 끝내주게 잘 드는 무기들을 물려줄 사람이 이제야 나타났다.
“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선물로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마왕이 멋대로 생각을 읽고 참견했지만, 모르는 소리였다. 크렘시아는 꽃잎 모양의 날을 가진 제 창을 소환해 들며 비장하게 말했다.
“당분간 마계에는 못 돌아올지도 몰라. 전쟁을 해야 하거든.”
“무슨 전쟁?”
“출산과 육아라는 전쟁 말이야.”
장미색 눈동자에 의욕과 투지가 넘쳐흘렀다.
* * *
“우욱.”
오필리어는 속에 있던 것들을 다 쏟아 내고도 헛구역질을 해 댔다.
사과며 꿀 케이크며, 태연하게 먹을 수 있었던 몇 주 전이 꿈같았다. 그 무렵에도 잘 먹다가도 갑자기 속이 뒤집히곤 했지만 입덧이 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스스로도 확연히 느낄 만큼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심해졌다.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식욕은 뚝 떨어졌다. 자연히 일상생활조차 곤란해졌다.
“전하…….”
집사장 글로리나 부인은 그녀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내며 슬퍼했고.
“오필리어 님, 어떡해요. 그렇게 잘 드시던 분이 아무것도 못 드셔서…… 흑!”
“카렌, 조용히 해. 소란스럽게 굴면 전하께서 더 힘드셔.”
유렌과 카렌은 오필리어에게 인간 쿠션처럼 꼭 붙은 채, 마찬가지로 슬퍼했다.
“미안한데, 조금만 떨어져 줄 수…… 우엑.”
그리고 오필리어는 그런 그들을 받아 줄 수도 없을 만큼 기력이 떨어졌다.
“죄송해요, 오필리어 님!”
“떨어질게요!”
오필리어를 돕던 세 사람은 저만치 물러난 채 슬퍼했다.
‘고통스러워.’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건 역시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마계로 뛰쳐나가 마왕과 맞섰고, 황제와도 맞섰고, 험한 세상에 맞서 아이를 지켜 나갈 충천한 의지가 있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아이가 이 꼴을 본다면, 그 무엇으로부터든 지켜 주겠다는 말을 과연 믿을까?
‘그런데 왜 나만 이 꼴이 되어야만 하지?’
갑자기 억울해지는 순간, 타이밍 좋게도 클레멘츠가 들어왔다.
“오필리어는 좀 어떻지?”
“입덧이 심하십니다. 오늘도 통 먹지를 못하셨지요.”
글로리나 부인이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다. 클레멘츠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필리어는 힘겹게 꿈틀거리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익숙한 받침대가 있으니 그나마 누워 있을 만했다.
클레멘츠는 말없이 그녀를 쓰다듬었다. 손에 감기는 황금빛 머리카락마저 숨이 죽은 것 같았다. 보고 있으면 가슴 한쪽이 뿌듯할 정도로 예쁘던 볼살이 빠진 걸 보니 속이 타들어 갔다. 시미크에게 맹세코 이럴 줄 몰랐다.
오필리어의 아이는 사랑스러울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미를 이렇게 괴롭히는 걸 보니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미워질 정도였다. 이 정도로 그녀가 고통스러워할 줄 알았다면, 아이를 가지는 걸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토록 대책 없이 기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클레멘츠.”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응.”
“당신도 토하세요.”
“……!”
“이건…… 불공평해요.”
단순한 말이었지만 바로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그는 제 옷자락을 꽉 쥐는 손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었다.
“알았어. 할게.”
“!”
“네가 먹지 못하는데 황궁에 좋은 음식이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오필리어가 없다면, 여전히 그에게 음식은 허기를 면할 소모재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녀는 물 한 모금조차 삼키기 힘든데 멀쩡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게 염치없던 차였다.
‘오늘부터 식사 준비를 중단하라고 일러야겠군.’
물론, 혹여 오필리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을지 찾는 일은 더욱 바삐 진행될 터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녀석을 불러야겠어.’
그동안은 오필리어가 말리기에 참아 왔지만, 도무지 더 이상은 안 된다. 클레멘츠는 제 손바닥을 펼치며 작은 칼을 꺼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깨달은 오필리어가 급히 클레멘츠의 손목을 쥐었다.
“아니 잠깐만요! 그럴 것 없어요.”
마계와의 갈등 요소는 온전히 제거된 한편, 뒤싱겐의 피에 흐르는 구속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얼마든지 클레멘츠가 원하면 필요한 존재를 소환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필리어는 아직 걱정이 되었다.
마계에서, 그리고 마왕 때문에 여러모로 지독한 일을 겪지 않았는가. 다 잘 해결되었다곤 해도, 상처가 온전히 아물어 굳을 때까지는 그 일들이 떠오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당장 토하라는 말도 그냥 해 본 말이었다. 자꾸만 화장실 쪽을 흘끔대는 걸 보아 아무래도 이 남자는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같지만.
“크렘시아라도 부를 생각이에요? 하지만 여기에도 훌륭한…….”
말을 전부 마치기도 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장밋빛 구름이 뭉게뭉게 퍼졌다.
“왜! 이제야! 나를 부른 거야!”
예민해진 오필리어가 들었다면 상태가 악화되었을 고성이었지만, 다행히도 클레멘츠가 재빠르게 그녀의 귀를 막은 상태였다.
“……크렘시아?”
“나의 뒤싱겐, 처음으로 너에게 화가 나! 왜 진작부터 날 부르지 않았지?”
“내가 부른 게 아니다만.”
클레멘츠의 중얼거림은 크렘시아에게 닿지 않았다.
활짝 핀 장미 같은 머리카락이 마치 불꽃처럼 위로 너울거렸다. 크렘시아는 얼굴마저 새빨개진 채 발을 쿵쾅 굴렀다.
그럴 때마다 타일 위에 금이 갔다.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집사장 글로리나 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다만티스 아가씨가 고생하는 꼴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는지 알아?”
‘마계의 방바닥은 튼튼한 모양이군.’
누구랄 것 없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오필리어가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크렘시아. 제가 소환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혹시 무리한 일일까 봐…….”
“무리라니! 이런 건 내가 전문이라고. ‘탯줄을 엉키게 하는 손’ 몰라?”
‘엉키게 하는 손이잖아.’
이번엔 유렌과 카렌의 생각이었다.
오필리어가 말한 ‘무리’란 클레멘츠를 무리시키는 것이었지만, 딱히 흥분한 악마에게 그걸 이해시키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작게 기침하자, 시뻘겋게 달아올라 펄펄 뛰고 있던 악마는 즉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황금새 아가씨, 많이 힘들지? 이제 나만 믿어. 건강하고 안전하게 예쁜 아이를 낳게 될 거야.”
침대 옆에 꿇어앉은 크렘시아는 장미색 액체가 담긴 약병을 꺼냈다.
“자, 아! 해 볼까?”
물조차 마음껏 마실 수 없었는데, 연한 장미 향기를 띤 그 시원한 액체는 신기하게도 역하지 않았다.
한 병을 다 마시니, 온몸이 편안해졌다. 오필리어는 즉시 잠이 들었다.
* * *
황태자비가 회임했다는 경사로운 소식은 얼마 못 가서 제국 전역에 퍼졌다. 업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던 모나한 백작은 혼우드에서 가장 먼저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이었다.
“뭐라고?”
“예, 들으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백작님.”
노집사가 거듭 확언했다. 벨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