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14)화 (214/218)

추가 외전 1화

“황태자비 전하, 오셨군요.”

“여기 다음 일정이에요.”

오필리어는 유렌과 카렌이 주는 팸플릿을 읽어 보았다. 황태자비로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황궁 홀에서 진행하는 음악회였다.

“음, 고마워.”

이런 일정이 있었지. 결정할 때는 의욕이 넘쳤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체력 탓인가…….’

실컷 뛰어놀던 혼우드 시절에 비해 황궁에선 상대적으로 덜 움직이고 있으니, 몸이 약해질 만도 했다.

홈 트레이닝이라도 해야겠다. 아니, 여기는 황궁이니까 황궁 트레이닝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눈을 붙이고 있자니 유렌과 카렌이 오필리어의 어깨를 흔들었다.

“자, 전하. 다 됐어요.”

“아직 주무시면 안 돼요!”

오필리어는 일어나서 거울에 몸을 비춰 보았다. 입고 있던 옷에서 장식을 교체하고 화장을 고치니 음악회에 어울리는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우리 애들은 솜씨가 좋아.’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 안 졸았어!”

“네, 네. 그러시겠지요.”

장난스레 말대답을 한 카렌이 꺄르르 웃었다. 유렌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어서 가요, 전하.”

오필리어가 수도에 콘서트홀을 지은 뒤, 성악가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음악가들이 그곳에서 공연을 하며 유명세를 탔다. 오늘의 음악회는 그렇게 성장한 이들을 황궁에 초청하여 귀족들과 연주를 듣는 자리였다.

“정말 훌륭한 연주였어요.”

“훌륭한 걸로 말할 것 같으면 역시 황태자비 전하시죠.”

“어머, 왜 아니겠어요?”

이 자리를 만들어 낸 주인공에 대한 칭찬이 없으면 섭섭했다. 실제로 무척 좋은 공연을 잘 감상한 귀족들은 이때를 틈타 오필리어와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그녀의 호감을 얻고 싶어 했다.

칼로카이리 축제에서의, 한없이 미화되어 지금은 전설이 된 노래대회로 시작하여, 벽에 아다만티스가 새겨진 아름다운 콘서트홀. 그곳에서 몇 번인가 펼쳐졌던 황태자비의 공연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음악가들에 대한 지원까지.

떠들다 보니 혼신의 힘을 다한 아부는 어느새 진심이 되어 있었다. 빠르게 입을 놀리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 지금쯤이면 사랑스럽고 능청스러운 겸양과 함께 대화의 주제를 돌리고도 남았을 오필리어가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비 전하?”

‘앗.’

저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고 있구나. 끼어들어야 하는데. 평소라면 아무 노력도 필요 없는 일이 갑자기 너무나도 피곤하게 느껴져, 눈을 감은 잠깐의 시간 동안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오필리어는 시선이 제게로 쏠린 다음에야 반짝 눈을 뜨고 웃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졸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아까 유렌, 카렌과 함께 있을 때도 진짜 자고 있었을 수 있겠구나.’

아무래도 황궁 트레이닝 정도로는 해결책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단순히 운동 부족으로 이렇게 급격히 몸 상태가 변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왜?’

병인가……. 조연 빙의자도 갑자기 중병에 걸릴 수 있는 건가?

‘내가 죽으면 클레멘츠는 홀아비가 되겠지.’

오필리어는 조용히 슬퍼했다.

누가 봐도 피곤해 보이는 오필리어를 이젠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사태를 눈치챈 시종들이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귀족들은 조용히 인사한 뒤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물러갔다.

악기와 시설이 치워지고 홀이 정리되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어느 순간, 오필리어는 누군가가 곁에 와 있음을 느꼈다.

포도나무의 향기와 차가운 손. 클레멘츠였다. 오필리어는 그의 품에 폭 안기며 중얼거렸다.

“클레멘츠, 제가 죽어도 꿋꿋하게 잘 살아가야 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조금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목소리에 오필리어는 약간 서운해졌다. 서운한 감정을 담아 숨이라도 막혀 보라고 목을 끌어안았지만, 클레멘츠는 오히려 그게 편한지 그녀를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오필리어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굳이 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기억나요? 제국력 334년의 여름 무도회가…….”

귓가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너무 사랑스럽고 또 가까웠다. 그 탓에 상당히 곤란해지던 클레멘츠는, 쓸데없이 구체적인 배경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음악회가 열린 그레이트 홀과 같은 곳에서 벌어진 무도회였기에, 새삼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기억나지.”

“정말, 다 기억나요? 그때 저는 연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내가 준비한 드레스였잖아.”

오필리어는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나중에 시종분한테 들었는데, 제가 메디프 전하와 춤추는 걸 보고 당신이 샴페인 잔을 맨손으로 깼다면서요?”

“…….”

클레멘츠 역시 그날 유리잔이 약하다며 타박했던 시종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사실 그날 있었던 일은 무엇이든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감히 황태자비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당장 내일 불러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맨손이 아니야. 장갑 끼고 있었어.”

“그게…… 문제일까요?”

클레멘츠는 피식 웃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날 오필리어가 어떤 놈과 춤을 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2층에서 벌어졌던 일이었다.

“하긴 그때 2층에서 진짜…….”

거기까지 말한 뒤 오필리어는 입을 다물었다. 클레멘츠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곱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오필리어는 좀 더 깊은 잠 속으로 까무룩 잠겨 들었다.

햇살이 반짝반짝했다.

‘혼우드인가?’

주변은 그녀가 처음 병아리로 변했던 숲과 비슷했다.

‘다시 보니 황궁 숲 같기도 하고.’

좀 더 정돈된 우아함이 엿보이는 것도 같았다.

‘식생을 정확히 살펴보면 알 수 있으려나.’

카밀 같은 생물학자는 아니지만, 나무 한 그루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 일어섰을 때였다.

“삐약.”

어디선가, 오필리어가 절대 잘못 들을 수 없는 종류의 소리가 났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밑을 봤더니, 역시 웬 병아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귀엽군…….”

방금 뭔가 굉장히 클레멘츠 같은 대사를 했다는 걸 깨닫고, 오필리어는 작은 새를 쓰다듬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음, 야생 아기 새를 함부로 주워선 안 되지.”

저렇게 깨끗하고 어여쁜 걸 보니 분명 어미 새가 돌보고 있을 터였다. 귀엽다고 멋대로 주워 가는 건 유괴가 될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엄마한테 돌아가렴, 아가.”

“삐익!”

“아얏!”

아쉽지만 돌아서려는 오필리어를, 병아리는 질 수 없다는 듯이 쫓아왔다. 그러면서 원한이라도 진 것처럼 오필리어의 발목을 쪼아 댔다.

아팠다.

“삐이익! 쮜익! 삑꺅!”

“으아악!”

결국 오필리어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자신이 병아리였을 땐 한없이 약했던 것 같은데, 이 병아리는 전투력이 웬만한 맹수 못지않았다.

“삐약아, 살려 줘. 우린 초면인 것 같은데 내가 너에게 뭘 잘못했니?”

병아리는 우는소리를 내는 오필리어의 몸을 폴짝폴짝 뛰어 올라왔다. 그리곤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듯, 그녀의 두 손바닥 위에 척 올라앉았다.

‘비록 미물……이지만.’

체력도 성격도 보통이 아닌 병아리였다. 이제 보니 병아리 주제에 풍채도 대단했다.

은은한 두려움을 느끼며 병아리를 뜯어보던 오필리어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너…….”

“삐.”

“눈 색깔이 내 남편이랑 똑같구나! 아주 예뻐.”

초롱초롱하다 못해 무시무시한 안광을 내뿜는 눈이었지만, 자수정처럼 투명하고 짙은 빛깔은 매우 익숙했다.

“삐흐흡, 삐삐!”

칭찬 한마디 했다고, 척 보기에도 무척 우쭐해진 병아리는 보송보송한 가슴털을 한껏 내밀며 뽐내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 그래. 너 예쁘다 예뻐.’

어쨌든 굉장히 사랑스러운 건 사실이었기에, 오필리어는 저항을 놓아 버린 채 같이 ‘하하’ 웃었다.

나무 틈으로 세차게 들어온 햇살이 아기 새의 머리 부분에 맺히며, 순간적으로 황금빛 왕관 같은 모습을 만들어 냈다.

‘음?’

현실이라기엔 너무 공교로운 형상이었다.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더 가늘게 떠 봤지만, 어쩐지 병아리의 머리에 맺힌 빛은 훨씬 강렬해져만 갔다.

‘아…….’

이런, 성스럽기까지 한 광경이 다 있나 싶었다.

* * *

“……!”

눈을 뜨니 익숙한 침실이었다. 크고 따뜻한 몸이 그녀를 안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뜬 오필리어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괜찮아? 악몽을 꾸는 것 같던데.”

“아, 괜찮아요.”

그놈의 병아리와 별의별 짓 다 해 본 사람한테, ‘병아리가 쫓아오는 악몽을 꿨어요’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병아리가 자신이긴 했지만.

“일어나서 아침 먹어.”

“일하러 갈 시간 아니에요?”

“네가 피곤해 하는 것 같기에, 오늘은 오전 업무를 빼놨다.”

“우와!”

오필리어는 폴짝 뛰듯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푹 자서 그런지 다행히도 오늘은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미리 준비돼 있던 접시를 내밀었다.

“내가 직접 했어.”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기쁘게 수프를 뜨려던 오필리어의 손이 멈칫거렸다.

“정말요……?”

영 미심쩍다는 반응이었다.

요사이 들어 무리하는지, 부쩍 피곤해 하는 아내를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던 입장으로선 조금 서운했다.

“……그렇다니까.”

그의 목소리에 밴, 미세하게 툴툴거리는 기색은 오필리어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동안 클레멘츠가 요리 솜씨를 보여 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수프엔 척 봐도 몸에 좋은 것만 들어 있었다.

‘불안하긴 하지만, 정성이 감동적이니까!’

그런데 의외로 정말 맛있었다.

‘아니? 맛있잖아?’

클레멘츠는 그가 사랑하는 황금빛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고, 이어서 귀여운 입으로 연달아 숟가락이 들어가는 걸 보며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당신이 했다고요? 거짓말!”

“…….”

그는 다시 상처받았다.

“내가 한 거 맞다니까.”

“흥, 믿을 수 없어요.”

“진짜야. 다음엔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지.”

오필리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엾은 내 남편. 이게 다 내 계략인 줄도 모르고.

“이거, 데이트 약속 잡은 거 맞죠?”

“……!”

한 방 먹었다는 듯한 잘생긴 얼굴을 보자 행복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오필리어는 수프를 맛있게 먹었을 때보다도 훨씬 놀라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우웨에엑!”

조금 뒤, 그녀는 귀하디 귀한 황태자 표 수프를 전부 게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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