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그러나 오필리어 황녀는 본인의 사회적 체면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시찰에 병돌 군을 데려가시겠다고요?”
“네.”
‘어째서.’
오필리어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느라 애쓰는 벨라를 뒤로하고 말에 올랐다. 곧, 작은 주머니에 안전하게 담긴 은빛 병아리가 전달되었다.
‘다들 황당하게 생각하겠지만….’
원래는 그녀도 위험하게 병돌이를 데리고 다닐 생각 따위 없었다. 하지만 병돌이의 실체를 알아 버리고 말았으니.
‘알맹이는 뒤싱겐 공작님이니까.’
이번 시찰을 가장 열심히 준비하고 기대했을 그였다. 그만 사고로 병아리가 되어 아예 시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속이 쓰릴까?
비록 남들 보기엔 이상해 보이겠지만….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다면 다들 이해할 것이다.
“출발하죠.”
“예…… 예.”
한편 주머니 속의 클레멘츠는 과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대체 나를 왜….’
황녀가 어떤 의도인지 알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과했다. 그는 작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은빛 머리통을 절레절레 저었다. 한숨을 폭 쉬기도 했다.
그와 무관하게 황녀의 시찰 행렬은 차질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여기가 바로 클랏샤 항입니다. 북쪽과 동쪽 대륙과의 무역 중심지죠.”
“와! 그러네요. 실제로는 처음 봐요.”
바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소금기를 품은 바람도 선명해졌다. 바삐 돌아가는 항구의 풍경과 푸르른 물결이 오필리어의 금빛 눈에 고스란히 흘러들어 왔다.
“최근 5년의 무역량을 비교해 보면….”
보고를 시작하던 카시스는 흠칫 놀랐다.
경청하던 오필리어 황녀가, 주머니에서 병아리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 받친 병아리를, 말 위에서 이쪽저쪽을 향해 천천히 돌려 보였다.
마치 병아리에게 클랏샤 항을 구경시켜 주려는 것 같았다.
카시스의 붉은 눈이 잘게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병아리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하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단 보고를 끝마쳐야 하는 것인가?
‘그래. 황녀 전하께서 병돌 군과 함께 보고를 듣고 싶으시다는데. 그 역시 존중하는 것이 도리이겠지.’
카시스는 결심을 마쳤다.
그렇게 한 황녀와 한 병아리가 항구에 대한 보고를 진지하게 듣던 중.
“잠시만요.”
오필리어가 병아리를 들고 있지 않은 한 손을 들었다.
“저기 맨 끝의 선착장은 쓰지 않는 것으로 보이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요?”
그녀가 질문한 건 최근 클랏샤 항이 마주한 골치 아픈 문제와 관련 있었다. 예리한 질문에 카시스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공작 각하께서 계셨더라면 좋았을걸.’
물론 보좌관인 그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 문제를 누구보다도 제 일처럼 여기고 해결책을 연구한 이는 뒤싱겐 공작 본인이었다.
“그것이 말입니다.”
그가 막 입을 떼려고 하던 참.
“삐약.”
짧고도 진중한 새소리가 끼어들었다. 금빛과 붉은색의 눈 두 쌍이 황녀의 손바닥 위에 자리한 병아리에게 모여들었다.
“휴, 삐익삐약.”
병돌(클레멘츠)은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작고 섬세한 날개 끝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진지한 자세로 황녀를 향해 뭐라고 삐약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가늘게 한숨을 쉬거나, 조그마한 이마를 날개깃으로 긁어 가며.
황녀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적어도 경청하는 것처럼은 보였다.
‘아, 뭐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밤에 구경한 클레멘츠의 얼굴은 몹시 보기 좋았다. 그런 얼굴로 문제를 설명해 준다면 뭐라고 말하든 정말 흥미로울 텐데.
혹여나 똑같이 저주받은 처지에 말이 통할까 싶어 벨라 쪽을 흘깃 봤지만, 벨라는 ‘이젠 정말 별꼴 다 보겠구만’이라는 의사를 눈으로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편 카시스는 천천히, 깊은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병아리…… 아니, 병돌 군은 혹시.’
익숙했다.
작은 눈을 살포시 찌푸리는 모양새. 간간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마를 살짝 긁는 모습. 곧은 자세로 침착하게, 적당한 빠르기로 이어가는 저 삐약거림.
분명, 주군의 모습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익숙함을 감지했는지도 몰랐다.
‘크흑, 주군! 제가 모르는 곳에서 고초를 겪고 계셨습니까.’
카시스는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물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병아리라도 돼 버린 게 아니고서야, 분명 성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공작령의 주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
그 위엄 넘치던 분께서 병아리가 되어 버리다니. 하지만 과연 주군이었다. 여느 병아리들과는 다르게 오만함과 기품이 넘쳐흘렀다.
‘공작님께선 무사하시다.’
그 사실만으로도 카시스는 기뻤다.
하지만, 삐약대는 주군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황녀를 보자 또 다른 걱정이 생겨났다.
황녀께서는 병돌 군을 황궁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단념시켜 드리면 좋을까?
‘클랏샤는 좋은 곳이야.’
낮에 항구를 비롯하여 두어 군데를 더 방문했다가 돌아와 이른 저녁을 먹고, 저택의 한 정원에 드러눕고 나니까 든 생각이었다.
유능한 통치자가 있어서일까? 아름답고 쾌적했다. 이곳에서 사는 것도 꽤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은 수도인 혼우드로 돌아가, 그곳의 황궁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어쩌면. 어떤 세계에서는….’
오필리어는 눈을 감았다.
가끔은 모든 것이 그저 꿈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치고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녀는 빙의했다. ‘뷰티 앤 더 비스트’의 세계에.
여주인공의 친구인 오필리어 레오라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원작에선 분명 오필리어가 벨라의 시녀였는데, 이곳에선 그 반대였다. 아니. 아예 세계관 설정이 뒤바뀌어 버렸다.
‘한미한 가문의 영애라던 오필리어가 왜 황녀가 돼 버린 건데?’
서쪽 벽지라던 혼우드는 제국의 수도였고, 작중 수도였던 클랏샤는 북부 공작령이 되어 있었다. 그 탓에 처음엔 대체 어떤 세계에서 깨어난 건지 한참이나 고민해야 했다.
그렇지만 다른 설정들은 전부 겹쳤다. 밤이면 흑표범으로 변하는 친구, 벨라는 분명 그 벨라루시아 모나한이었다. 굉장히 예쁘고 까칠하고, 은근히 정이 많았다.
작중 악녀였던 카밀도 만났다. 악녀는커녕, 어려서부터 그녀의 곁에 찰싹 붙을 기회를 엿보며 빙빙 맴도는 모습만 보았지만.
이번 북부행 직전에도 자신이 아닌 벨라가 황녀를 수행하게 되었다며 풀 죽어 있던 모습이 기억났다.
서브 남주였던 메디프 역시, 있었다. 하늘색 머리를 가진 자유분방한 마법사. 이 세계에선 황자가 아니라 페리윙클 가문 출신이었다.
‘평행세계, 뭐 그런 걸까?’
딴판으로 낯설어져 버린 세계였지만 나쁘진 않았다. 시녀보다는 황녀 신세가 여러모로 편하기도 하고. 똑같이 저주는 걸렸지만 원작처럼 고통받지 않는 벨라를 볼 때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남주인공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북부 공작령의 주인이 뒤싱겐이라는 성을 쓴다는 것까진 확인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두 눈으로 그를 직접 보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클레멘츠, 그 역시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에. 비록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살아갈지언정, 있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할 장소와 시간에 있다는 점에.
그러니 이제는 각자 제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삑. 삐익.”
때마침 그녀를 재촉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필리어는 풀밭에 뉘었던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바람에 풀꽃이 흔들리고 드레스 자락이 나부꼈다. 해가 기운 오후의 주홍빛 광선에 따뜻한 색조의 금발과 눈이 반짝였다. 오필리어는 저를 찾아온 작은 손님에게 방긋 웃었다.
“그럼 갈까요?”
은빛 병아리는 그 모습을 조금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작아진 허파에 숨을 채워 넣는 것도 잊은 사이, 그녀가 그를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받쳐 들었다.
“전 공작부인의 연구실이 어느 쪽이라고요?”
“…….”
그는 최대한 삐약거리는 것도 자제하며 고갯짓만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병아리가 되어 버린 건 단 한 순간도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조금 전부터는 유달리 불만스러웠다.
그런 복잡한 속내를 알 길 없는 오필리어는 병아리 내비게이션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참 걸어가자 셀레네의 연구실이 나왔다. 첫날 클레멘츠를 주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와… 자료가 정말 많네요.”
셀레네 디 샹그리아는 제국에 이름을 떨치는 적마도사였다. 뒤싱겐 공작부인이 된 뒤로는 연구 활동이 점점 줄었다고 들었는데. 개인 연구실은 여전히 현역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약간 너저분하지만 나름대로 정리되어 있는 연구실 안. 유독 한군데가 대놓고 난장판이었다. 오필리어는 그곳으로 가 앉았다.
이내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종이를 건드린 거군요?”
메라와 닉타. 벨라의 저주와도 관련이 있기에 익히 들어 본 이름들이었다.
“마물들의 힘을 빌려 와 종이에 흡수시킨 간단한 마법진이에요. 술자 역시 심심풀이로 만들어 냈는지 마력의 규모 역시도 크지 않아요.”
솔직히 그냥 놔뒀어도 며칠 뒤면 풀렸을 저주였지만,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오필리어는 마력이 담긴 자신의 목소리로, 종이 위에 쓰인 주문을 거꾸로 읽었다.
클레멘츠를 옭아맸던 일시적인 저주가 깨지고 풀어졌다. 빛무리와 어둠에 한 차례 감긴 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고도 바깥은 아직 한참이나 환했다.
“이건 단단히 봉인해 둬야겠어요. 그리고 이건….”
오필리어는 간단한 마력으로 종이를 띄워, 멀찍한 데다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또 한편 뒤집어진 책에서 나온 것들 중에는 편지 봉투가 있었다. 아직 봉랍을 뜯지 않은 봉투에는 클레멘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작 수신인은, 적어도 당장은 편지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늦게나마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손등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닿았다. 오필리어는 그를 물끄러미 건너다보다 놀라서 시선을 옮겼다.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입니다. 저주를 풀어주신 일도 감사드립니다.”
“안타깝네요. 알고 보니 할 일이 많으신 분이라서. 궁으로 와서 같이 살자는 약속은 못 지키겠네요?”
“그런 약속은 드린 적 없습니다만.”
그녀는 부러 농담을 하며 웃었다. 하지만 밝은 분위기로도 그에게서 전해지는 은근한 끈질김을 희석할 순 없었다.
“은혜를 베푼 이를 책임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전하.”
잡았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이대로 그녀를 놓아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궁에서는 황위 계승을 앞둔 황녀의 반려를 누구로 삼을지 논쟁이 치열하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놓아야 한다면 뒤쫓아 다시 잡으리라. 그러나 어느 길을 고를지, 어떤 얼굴로 다가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생각과 계획을 골라냈다. 눈으로는 조금 놀란 듯한 그녀를 담으며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피차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