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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12)화 (212/218)

외전 11화

조막만 한 얼굴과의 거리는 어쩐지 생각보다 멀었다. 시야 아래 보이는 흰 목과 어깨도 상당히 작게 느껴졌다.

클레멘츠의 시선이 바닥을 짚은 제 손에 닿았을 때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빨리 설명해요.”

“…그게.”

깊은 보랏빛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자신이야말로 제발 그걸 좀 알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억울함과는 별개로, 명백히 그녀 역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그뿐인가.

자칫 잘못하면 황녀를 능멸했다는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의심을 벗을 수 있을까. 황녀는 너그러우니 쉽게 넘어가 줄지도 몰랐다.

그래야 하는데….

‘젠장.’

눈길이 자꾸만 이상한 곳으로 갔다. 작고 도톰하다고 생각했던, 살짝 벌어진 입술이나.

그저 동그랗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두고 보니 상당히 보기 좋은 눈매나.

얕은 호흡에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녀린 쇄골 사이 같은 곳으로.

쓸만한 생각이 떠오르려다가도 죄다 흩어져 버렸다. 마법의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일까. 낯설고 기묘한 미열이 재게 뛰는 심장에 의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클레멘츠는 변명할 기회를 잃었다.

“하…. 그러니까 전하께서 주우신 그 병아리.”

거기까지 말했을 때.

쾅!

황녀의 방문을 가히 폭력적으로 열어젖히며 뛰어든 건, 커다랗고 검은 짐승이었다.

“벨라!”

동시에 그의 아래에 있던 황녀가 가공할 힘으로 그를 밀쳐냈다.

“컥.”

황녀는 클레멘츠를 퍽 소리가 나도록 걷어차고는, 고통에 신음하며 무너진 그와 달려드는 흑표범 사이로 뛰어들었다.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오필리어가 눈앞에 나타나자 흑표범은 즉시 돌진을 멈추었다. 다만 사나운 포효가 이어졌다.

꼭 ‘저건 뭐 하는 새끼야’, 라고 하는 것 같다고 클레멘츠는 생각했다. 놀랍도록 올바른 추측이었다.

“괜찮아. 나는 안전해, 벨라. 저 사람은 그러니까, 아는 사람 같아. 위험하지 않아.”

황태녀 오필리어의 최측근, 벨라루시아 모나한 백작.

그녀는 마물의 저주를 받아 밤이면 흑표범으로 변하며, 마수를 부리는 힘을 가졌다.

그 신비로움에 미모와 카리스마까지 겹쳐 명성이 자자했지만, 지금은 하도 크헝거리는 통에 황녀가 목을 꼭 끌어안고 살살 달래 주는 중이었다.

마침내 우는 것을 멈춘 흑표범이 푸른 눈으로 클레멘츠를 쏘아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셀레네, 그러니까 전대 공작부인의 기록을 뒤지다가 모습이 변했습니다. 제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으나, 황녀께서 저를….”

경악한 황금색 눈동자와 경멸이 담긴 푸른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클레멘츠는 크흠, 헛기침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주워서 그리 애지중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

“뒤늦게 인사 올리겠습니다. 클랏샤 공작 클레멘츠입니다.”

그는 반듯하게 일어나 목례했다. 침묵이 흘렀다.

벨라는 애지중지해 마지않는 오필리어와, 한심한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웬만했다면 오필리어를 편들며 ‘황녀님이 붙잡아도 그쪽이 어련히 알아서 빠져나왔어야지!’라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웬만했어야지. 솔직히 벨라가 보기에도 오필리어가 유난이었다.

금세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온 벨라는 클레멘츠를 지그시 노려봐 준 뒤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알아서들 해결하고, 특히 너는 허튼짓하지 말라는 의사 표현이었다.

“후우….”

오필리어는 한숨 돌리며 일어나 문을 닫았다.

달칵.

“!”

기회를 봐서 그 문틈으로 빠져나가려던 클레멘츠는 이번에도 한발 늦었다. 그런 그에게 오필리어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클레멘츠는 황급히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의문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던 오필리어는 뒤늦게야, 얇은 슈미즈가 이곳에선 고작해야 속옷 차림이란 걸 기억했다.

애써 여기도 저기도 아닌 옆 방향을 응시하는 그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커다란 사내가 그러고 있으니 아주 귀여웠다.

“제게 더 볼 일이 있으십니까?”

“없겠어요?”

“!”

오필리어가 한 발짝 다가서며 생긋 웃었다. 클레멘츠는 당황하여 미간을 좁혔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공작. 약혼녀가 있나요? 연인은?”

“없습니다.”

“큰일 났네요. 혼약도 안 된 청년이, 이 늦은 시간에 밀폐된 방에서 여자와 단둘이 있다니.”

그건 다 당신 때문 아닙니까.

…라는 말을 클레멘츠는 어떻게 정중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사이 오필리어 황녀는 한술 더 떴다.

“게다가 황녀의 속옷 차림까지 봐 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공작의 혼사에 애로 사항이 있으면 큰일 아닌가요?”

“예?”

“어쩔 수 없이 제가 책임져 드려야겠죠?”

저 황녀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녀는 큰일 날 소리를 하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걱정 말라느니, 자신은 정실 한 명만 들이고 아주 극진히 대접할 거라느니, 계속 까부는 걸 보면 농담인 듯했다.

하지만 잇따른 충격에 클레멘츠는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손수건이나 장갑을 실수인 척 떨어뜨리거나, 어지러워서 당장 쓰러질 것 같다며 하필이면 그 앞에서 휘청거리는 여자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클레멘츠도 면역이 없었다. 정말로 결혼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쁘진 않을지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흠칫거리며 미간을 더욱 좁혔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어찌 되었건.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야기 좀 할까요?”

“뭐가 인연이라는 겁니까?”

“들어 봐요. 황위 후계자가 제국령의 머나먼 끝까지 시찰을 도는 이유가 뭐겠어요? 변방의 영주들과 유대를 다지기 위함이겠죠.”

맞는 말이었다. 오필리어는 씩 웃으며 계속했다.

“위기를 기회로, 라는 말이 있잖아요. 암만 일부러 자리를 만들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한방에서 느긋하게 대화할 기회가 흔하겠어요?”

“…그야, 흔하진 않습니다만.”

공적으로 만났지만, 사적인 영역이 함께한 자리. 황녀와 공작으로서. 그리고 오필리어와 클레멘츠로서. 자칫 형식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이번 시찰을 알차게 만들어 보잔 뜻이었다.

‘그럴싸한데?’

업무를 진행할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원래 일 중독자였다. 이내 촛대를 가져와 앉은 황녀가 제 앞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전하. 무슨?”

“자, 앉아요.”

“…….”

어쩐지 휘말리고 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더 손해 볼 건 없었다.

반쯤 포기하고 앉은 그와 오필리어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보고서로 만들기엔 애매했던 공작령의 이야기들. 황궁과 클랏샤의 근황과 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들.

클레멘츠는 놀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대에게 이리 많은 걸 털어놔 버리다니.

제가 이상해진 걸까, 아니면 이것이 말로만 듣던 황녀의 매력인 걸까.

그녀는 진지할 땐 배려가 충분했고, 가벼울 때엔 재치가 넘쳤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병아리로 변했는지. 더해서 전 공작부인 셀레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까지도 조금은,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겠어요. 내일 카시스 님께 말씀드려서 전 공작부인의 연구실에 방문해 보도록 하죠.”

* * *

다음 날 아침.

“황녀 전하. 오늘의 일정입니다.”

카시스가 빼곡한 일정이 적힌 서류를 가져왔다. 오전부터 말을 타고 북부 영지를 둘러보아야 했다.

“…….”

책상 위의 병아리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일정 서류와 보고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카시스는 어쩐지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병아리인진 모르겠지만, 꼭 클랏샤의 행정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것 같군.’

윤기가 흐르는 은빛 솜털이 꼭, 어제저녁부터 내내 찾아 헤맸지만 결국 행방을 알지 못한 주군을 떠올리게도 했다. 그리 생각하고 보니 병아리 주제에 진지한 표정까지 똑같았다.

“크흠….”

카시스는 주군을 찾느라 퀭해진 눈가에서 흐른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으로 감싼 무언가를 꺼냈다.

“자. 먹으렴.”

“……!”

잘게 부서진 빵부스러기였다. 클레멘츠는 기가 찼다.

“삐익.(됐느니라.)”

그러고는 도도하게 돌아서려 했다.

“엊저녁부터 제대로 된 모이를 먹지 못했을 텐데…. 꼬박꼬박 식사해야 키도 많이 크고 늠름한 수탉이 될 수 있단다.”

늠름한 수탉 따위 당연히 될 생각 없었다.

하지만 막상 돌아서려니, 빵 조각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뭐야?’

그는 공작이었다. 늘 풍미와 영양을 고려해 정밀하게 설계된 식사를 했다. 이런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음식에 갑자기 무장해제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카시스의 말대로 엊저녁부터 굶다시피 해서일까. 형편없이 작아진 몸이 향기를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일까.

어쩐지 저항하기 힘들었다.

슬그머니 돌아간 병돌(22세, 전직 공작)의 고개 밑으로, 카시스는 손바닥에 받친 손수건을 쓱 밀어 넣었다. 저절로 흐뭇한 표정이 지어졌다.

“정말 귀엽군요. 황녀님께서 살뜰히 돌봐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 카시스 님. 안 그래도 그 병아리 말인데…….”

활동적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던 오필리어는 입을 다물었다.

그 고상해 뵈던 병돌……. 아니, 클레멘츠가 부관의 손에 몸을 내맡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리드미컬하게 머리를 토닥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밤새워 이야기를 나눴으니 졸음이 올 만도 했다.

“예, 황녀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필리어는 금빛 눈썹을 꿈틀거리며 진실을 은폐했다.

주군에 대해 어지간히 걱정할 테니 사실대로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시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 소소한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졌다.

그편이 클레멘츠 공작의 사회적 체면 역시 지키는 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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