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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10)화 (210/218)

외전 9화

Special ep 2. 여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클라티아 제국의 오필리어 황녀가 북부 영지 시찰을 예고한 건 황녀가 스무 살이 되는 해의 봄이었다.

레오라 황가에서 왕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는 오필리어 하나뿐이었다. 오필리어 황녀는 모두를 압도할 만큼 명석하거나 카리스마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실하고 활기찼으며 사랑이 넘치는 성격이라, 다들 정신 차리고 보면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능력이 넘치는 귀족 젊은이들도 알아서 그녀를 받들어 모셨으니, 황태녀가 이끌어 나갈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라고 합니다.”

“그래.”

붉은 머리의 보좌관이 읽은 서류는 너무 많이 확인해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북부 공작령 클랏샤의 주인인 클레멘츠는 다음 항목을 확인했다. 황녀의 도착이 코앞이었다. 중요한 손님인 만큼 실수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식사 준비는 계획대로 진행되었나?”

“예. 딱히 가리시는 게 없다기에 다양한 코스를 준비하고, 황궁 요리사의 최근 동향을 반영했습니다. 디저트로는 레몬 크림 파이를 포함시켰습니다.”

“좋아.”

수도에서 황녀의 인기가 워낙 많은 탓에, 그녀가 어딘가에서 무언가 맛있게 먹었다는 것마저도 기삿거리였다.

클레멘츠는 노란 파이를 한가득 베어 물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사진을 한쪽으로 치웠다.

솔직히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는 다행이었다.

“시찰 경로를 계속 점검하고, 경비를 신경 쓰라고 일러두도록.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군.”

“예, 공작님.”

충직한 보좌관, 카시스 듀프레가 물러갔다. 클레멘츠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쉬다가 몸을 일으켰다. 개인적으로 알아보던 일이 있었다.

사실 황녀가 오는 게 달갑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바쁜 일이 산더미인데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기 전의 후계자가 전국을 시찰하는 건 오랜 관습이었다.

“들었어? 벌써 내일이야!”

“어쩜…! 나는 황녀님을 가까이서 한 번 뵙는 게 소원이었는데.”

집무실을 나서 저택을 걷고 있자니 사용인들의 대화가 들렸다.

“난 별로 관심이 없는데. 황녀님께선 어떤 분이시길래 다들 이래?”

“그것도 몰라? 귀여우시다잖아!”

“귀여워? 그리고?”

“예술에 관심이 있으시대. 성품도 따뜻하시다더라. 그리고 강력한 언령사래!”

굳이 오래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였다. 클레멘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층계를 한 차례 올라 세 번째 문을 열자 희미한 포도주 향이 났다.

책과 마법 도구가 한가득 쌓인 곳. 전대 공작부인이자 클레멘츠의 어머니인 셀레네의 연구실이었다.

셀레네 디 샹그리아. 그녀는 실력 있는 적마도사였다.

선대 공작과 결혼한 후에도 꾸준히 마법 연구를 해 왔다. 그러다가 클레멘츠가 어느 정도 성장한 어느 날. 셀레네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안 가 공작도 노환과 병이 겹쳐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클레멘츠가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계승식을 치렀다.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새벽같이 일어나 검술을 연마하고 정무를 처리했다. 손톱만큼 주어진 휴식 시간을 산책이나 독서에 할애했다. 한 치의 빈틈도 낭비도 없는. 완전하고 삭막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에서도 간혹 의문이 들곤 했다.

셀레네는 어디로 갔는가. 왜 사라졌는가.

아주 깊은 속마음에는 이런 의심도 남아 있었다.

‘공작가가, 내가 지겨워서 떠난 건 아닐까?’

하지만 여백 없는 부품들이 들어찬 삶에 그런 질문을 남겨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 클레멘츠는 최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연구실에 남은 흔적을 뒤적였다.

“이건 뭐지?”

그러던 중 못 보던 책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책이 너무 많아 그간 별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클레멘츠는 붉은 가죽으로 장정된 조그만 책을 뽑아 펼쳤다.

수려한 보라색 눈이 고대어로 쓰인 내용을 훑었다. 다양한 자연령의 소환술이었다.

책장 사이에 꽂혀 있던 손바닥만 한 종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클레멘츠가 손을 뻗어 잡으려던 순간, 종이가 그의 다리를 스쳤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펑 하는 폭발음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뭉게뭉게 연기가 오른 것도 같고, 눈부신 빛에 눈을 질끈 감은 것도 같았다.

다음 순간. 클레멘츠는 당황한 나머지 잠시 침묵했다.

“…….”

뭐지?

‘갑자기 몸이 너무 작아진 듯한 느낌이 드는데.’

방이 커졌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방금 떨어뜨린 종이가 유독 가깝게 보이는 걸 봐선 본인이 작아졌다는 쪽이 더 그럴싸했다.

낮과 밤을 의미하는 고대어 문자 ‘메라’와 ‘닉타’가 눈에 띄었다. 클레멘츠는 종이 밖으로 물러나려다 멈칫했다.

“삐익(뭐야, 이 병아리 발은.)”

심지어 자신이 ‘삐익’이라고 울었다. 생각보다 훨씬 미친 상황이었다.

“…….”

클레멘츠는 유달리 넓게 느껴지는 마루 조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햇살이 그의 새하얀 털을 감싸며 따뜻한 은빛을 발했다.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마법사의 방에서 주문이 씌어 있는 종이를 만졌으니, 단서는 거기에 있을 터.

다만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당장 황녀가 올 텐데.’

카시스가 부책임자의 역할을 다해 줄 테지만. 북부의 주인으로서 그녀를 모자라게 접대하다니.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삐휴우우.

가느다란 한숨이 조그만 배를 소르르 빠져나갔다.

‘어쩌면 좋지?’

“어서 오십시오. 오필리어 황녀님. 클랏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마차에서 내려선 황녀가 활짝 웃었다. 그 뒤로 검은 머리의 여성이 따라 내렸다.

“듣던 대로 클랏샤는 멋진 곳이네요. 수도에는 바다가 없어서, 한 번도 구경을 못 했거든요.”

“언제든 원하실 때 둘러보십시오.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카시스 듀프레 님이시겠죠?”

인사를 마친 오필리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공작님께선 어디 계신가요?”

“그것이…….”

카시스는 속으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주군께선 과연 어디 가셨을까? 평소 이러실 분이 아니니, 뭔가 사고가 난 게 분명했다.

“부득이한 일이 있어, 직접 맞이하지 못함에 사과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곧 나타나실 겁니다.”

“그렇군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주군의 부재를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

그는 그런 사명감에 불타며 황녀 일행을 인도했다.

오전 일정은 꽤나 순조로웠다. 가볍게 성 근처의 농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으니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뭔가 찾을 게 있다며 급하게 나가는 보좌관의 뒷모습을 보다가, 오필리어가 말했다.

“저택 구경을 하고 싶은데.”

“얌전히 계세요, 전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이 머나먼 북부에서 무슨 꼴을 당하시려고요.”

벨라루시아 모나한이 말했다.

그녀는 황녀의 최측근이자 시녀였다. 또한 혼우드 근처의 영지를 가진 젊은 백작이기도 했다. 퉁명스러운 말투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오필리어만큼은 벨라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그렇게 걱정돼, 벨라? 여기는 공작의 성이잖아. 새 뒤싱겐 공작의 성미가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소문이 자자한데.”

“하! 그거야 소문일 뿐이죠. 그리고 전하께선 항상 이리 튀고 저리 튀잖아요.”

“괜찮아. 나 스스로 지킬 힘은 있는걸. 잠깐 이 앞만 둘러보고 돌아올게.”

“이…! 무슨 이렇게 대책 없는! 위험하게!”

모나한 백작은 파들파들 떨었다. 황녀가 저렇게 티 없이 밝게 웃으면, 그녀는 한껏 당황해 말과 행동이 꼬이곤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황녀는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 벨라는 자기 자신과 오필리어를 번갈아 탓하며 홀 안을 서성거렸다.

‘그냥 나가서 다시 데려오자!’

그녀가 결심하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꺄아악!”

황녀의 비명소리였다. 벨라는 밖을 향해 번개처럼 튀어 나갔다.

쾅!

“무슨 일이야! 아니, 무슨 일이에요!”

“벨라…….”

복도에 주저앉은 가녀린 뒷모습이, 황금빛 머리카락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뭐야! 도대체 웬 놈이!’

벨라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꽉 쥔 주먹이 벌벌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도는 그녀의 작은 손에는 웬 하얀 병아리가 놓여 있었다.

‘무슨?’

오필리어의 손바닥에 놓인 주제에 감읍하진 못할 망정 불만스러운 표정이, 딱 마음에 안 드는 병아리였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네?”

벨라의 아름다운 벽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래서요? 지금 저 비루먹은 병아리 때문에 비명을 지르신 건가요?”

“삐, 삐익…….”

“비루먹었다니! 어떻게 우리 병돌이에게 그런 냉정한 말을 할 수가 있어?”

오필리어 황녀는 병아리를 소중히 감싸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렇지, 병돌아?”

“…….”

커다란 황금빛 눈이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그를 향했다. 클레멘츠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아, 미치겠군.’

어처구니없는 애칭에, 비루먹은 병아리라는 모욕적인 언사는 그렇다 치자.

오전 일정이 마무리될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카시스가 나올 홀 앞으로 온 것까지도 좋았다.

그런데 카시스가 아닌 황녀가 저를 먼저 발견해 버리다니. 일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녀가 지른 비명 때문에 주변에 배치해 뒀던 경비병들도 달려오고 있었다. 완벽하게 짜 놨던 계획이 잔뜩 꼬여 버릴 기미가 보였다.

“앗.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 아이는 병돌이라는 이름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

“!”

대체 왜 그쪽 아이냐는 의문은 둘째치고. 생각보다 기민한 여자였다. 병아리의 표정을 읽다니.

황녀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삐돌이는 어떠니?”

클레멘츠는 기민하다는 평가를 잽싸게 취소했다.

“삐.(싫다.)”

“별로라는데요.”

병아리 클레멘츠의 조그마한 고개가 이번엔 벨라를 향해 돌아갔다.

“그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벨라?”

“비루비루요.”

“…….”

“…….”

“삐루삐루?”

클레멘츠는 이 여자들이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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