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09)화 (209/218)

외전 8화

Special ep 1. 여름 호수의 약속

국혼식으로부터 3개월 후.

황태자 부부는 조금 늦은 신혼여행을 왔다.

푸르른 물결이 햇살에 빛나며 넘실거렸다. 여름 호수의 정경은 분명 아름다웠다.

언젠가 오필리어는 클레멘츠에게 이런 여름 호수에서 붕어를 잡아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오필리어?”

“어때요? 재밌겠죠?”

“…….”

부드럽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릴 들으니, 불만이 있어도 입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혼한 뒤로 어째 저보다 바빠진 것은 둘째 치더라도 여행이라면 이미 질리게 했다는 그녀를 겨우겨우 궁 밖으로 이끌어 도착한 게 이곳이었다.

오필리어의 집 근처에 있다던 호수는 혼우드에 있었다. 신혼여행까지 가서 벨라루시아 모나한의 간섭을 받게 될 가능성이 상당하단 뜻이었다.

반면 이곳 소이아 호는 수도와 그리 멀지 않았다. 모나한 백작의 간섭은커녕 오랜 시간 궁을 비우지 않아도 되리라고 오필리어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시간은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절찬리에 방해받고 있었다.

단둘이었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정말로 잘 와주셨습니다. 이번 여행은 제가 책임지고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호수의 관리인이었다. 갈색 눈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열의가 흘러넘쳤다.

관리인뿐일까. 호수 주변에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지역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클레멘츠는 그들을 노려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서 눈가에 힘을 풀어야 했다.

“마침 며칠 뒤엔 소이아 호 붕어낚시 대회가 열립니다. 두 분께서 자리를 빛내 주신다면 길이 남을 영광일 텐데요…….”

관리인의 말에 클레멘츠는 속으로 냉소했다.

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몰려들 그런 행사와는 일정이 겹치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다. 오붓한 신혼여행을 보내고 싶었던 그가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방해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호수로부터 1만 키보스 반경을 봉쇄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필리어가 유난스럽다고 싫어할까 봐 그냥 두었더니, 그 결과가 이거였다.

심지어 그녀는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아, 그런 대회가 있다니…! 하지만 일정이 안 맞네요. 아쉬워요.”

“꼬, 꼭 예정된 날씨에 대회가 열려야 하는 건 아닙니다! 모처럼 귀한 분들께서 걸음 해주셨는데…. 그냥 당장 내일로 날짜를 바꾸도록 하죠!”

“네? 그렇게까지요…? 그건 무리 아닐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침 모여 있던 시민들에게 소리치자, 즉각 대답이 들려왔다.

“저희는 좋아요!”

“그냥 내일 하죠, 뭐!”

“우호! 황태자비 전하 만세!”

클레멘츠는 간절히 생각했다. 제발 다들 관둬 줬으면 좋겠다.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관리인은 물론 군중과도 몇 마디 주고받은 오필리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클레멘츠! 낚시대회는 호수의 서쪽에서 열리고, 마법사들이 동쪽에 모여 음악 분수 공연을 한대요.”

“…하하, 그렇군.”

“고깃배를 빌릴 수도 있다고 하네요. 우리 둘이 타고 가서 낚시해요! 호수가 워낙 커서 가운데까지 도착하면 조용할 거예요.”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와중에도, 클레멘츠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모든 생각을 잊었다.

오필리어가 얼마나 즐거운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무덤덤하던 심장에 그 감정이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갈비뼈 아래가 저렸다.

그녀만 즐겁다면 그 모든 번잡한 짓들에 기꺼이 어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클레멘츠는 천천히 웃었다.

“재미있겠군.”

* * *

하지만 다음날은 새벽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럴 순 없어…….”

쿠르릉.

흰 원피스를 입고 창문에 달라붙은 오필리어의 둘레로, 푸른 번개로 인한 역광이 졌다가 사라졌다.

“이러면… 이러면…….”

“아쉽게도 낚시 대회는 취소되었겠군.”

클레멘츠는 말해 놓고서야 제 말투가 전혀 아쉽게 들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충격받은 오필리어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비, 비가 그칠 가능성은…….”

“아무래도 없는 듯해.”

그제야 오필리어가 그를 홱 돌아보았다.

세모꼴로 치켜뜬 눈. 뾰로통해진 입술. 골이 난 모습이었다.

클레멘츠는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가볍게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무 사랑스러운 아내와 살아서 심장이 안 좋아질 수도 있을까?

“당신 지금 신났죠?”

“아닌데.”

“딱 보니 신났구만! 낚시가 싫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클레멘츠는 일부러 쿵쾅대며 다가온 작은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끌어안았다.

“놔줘요!”

“솔직히 말하면 낚시가 싫은 게 아니야.”

그는 오필리어를 한 차례 더 강하게 안고 속삭였다.

“너와 둘이서만 있고 싶었던 거지.”

“…!”

“수도에서나 바깥에서나. 사람들이 널 하도 찾으니 이런 날이 와야만 독점할 수 있군.”

“…….”

그랬다. 분명 결혼을 했는데, 어째 같이 있을 시간이 더 줄어들었다.

오필리어는 황족의 의무를 다하겠다며 계속해서 일거리를 찾아냈다. 이쪽에 재능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찾아낸 것도 하나같이 필요한 일들이라 말릴 수도 없었다. 급기야는 클레멘츠가 그녀를 쫓아다니며 관심을 갈구해야 할 지경이었다.

품 안에서 바둥거리던 몸이 다소곳해졌다. 클레멘츠는 그 움직임에서 가만히 쓰다듬으면 얌전해지던 병아리를 떠올렸다.

한편 오필리어는 생각했다.

‘미친 거야?’

바깥엔 차가운 비가 세차게 내리붓는데, 제 얼굴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낚시 대회는 취소되었지만, 미리 낚아 보관해 둔 붕어는 아직 신선했다.

접시의 뚜껑을 열자, 각종 양념을 넣고 찐 생선의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흰 살은 입안에서 크림처럼 살살 녹았다.

‘햐, 맛있다.’

오필리어는 생각했다. 과거 클레멘츠에겐 잡은 물고기를 요리까지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 같지만, 자신이 이런 실력을 갖출 일은 아무래도 요원해 보였다. 낚시에서나 힘을 좀 써 보는 게 그나마 현실적일 것 같았다.

한편 클레멘츠는 생선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우물거리는 오필리어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눈치 없는 바깥 놈들이 있든 말든,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제 아내가 먹는 모습이 좋았다. 처음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녀는 이렇게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물론 다른 걸 먹는 모습도 좋았지만.

오필리어가 알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그는 태연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바깥에는 여전히 폭우가 쏟아졌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오늘은 방 안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근데 뭐 하고 놀지?’

이렇게 비 오는 날이면 벨라와 함께 방에 틀어박혀야 했는데, 뭘 했더라. 주로 그녀가 떠들고 벨라는 못들은 체하긴 했지만, 대화하면서 같이 책을 읽거나 수를 놓거나….

‘공기놀이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클레멘츠와 공기놀이라.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저 커다란 손에 조그만 공깃돌들이 들어갈 걸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왜 그래?”

“아무것도요.”

“수상한데.”

“……크흠. 그나저나 그건 뭐예요?”

클레멘츠가 직접 그려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건, 일종의 놀이판이었다.

드문 여유를 즐겼던 어느 어린 날, 황궁의 메이드가 남몰래 알려 준 게임.

살인적인 일정에 치여 가며 자란 그가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놀이였다.

“와.”

룰 설명을 듣는 오필리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건…… 보드게임!’

주사위를 굴릴 뿐인 게임 방식은 단순하지만, 꽤 중독성이 있을 것 같았다. 이거라면 확실히 하루 종일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건 내기와 함께해야 제맛이죠?”

“물론이지.”

“오. 생각해 둔 요구사항이 있으신 모양인데요?”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즉답이 나왔다. 클레멘츠는 생각해 둔 바를 읊었다.

“내가 이기면, 궁으로 돌아간 뒤에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비워줄 것.”

“……!”

“한 판에 세 시간씩.”

“너, 너무 많아요! 두 시간으로 해요!”

신혼여행을 미루고 미룬 게 미안해서 따라오긴 했지만, 돌아가자마자 바로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미소에 오필리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신혼인 남편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 오필리어 레오라….”

“…….”

“뒤싱겐.”

“……!”

하얗던 볼이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상태로 첫 게임이 시작되었다.

주사위가 구르고 말이 움직였다. 먹구름이 덮여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오필리어는 내리 3일의 시간을 클레멘츠에게 저당 잡혔다. 세 시간을 두 시간으로 깎은 게 무색한 결과였다.

“…이럴 리가 없어.”

“그러게 진작 나와 놀아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독기 머금고 달려들 일도 없었을 텐데.”

“으윽…!”

“그렇지 않나, 나의 비?”

클레멘츠는 완전히 여유로웠다.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

내리 졌는데도 짜증이 날 만큼 재밌어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오필리어는 주사위를 꼭 쥐곤 그를 노려보았다. 게다가 이쯤 했으면 한 번은 이겨야겠다는 호승심마저 들었다.

이럴 때조차도 클레멘츠는 완벽하게 잘생겨서 오히려 조금 짜증이 났다. 기묘한 일치감이었다.

“그렇게 웃을 시간도 얼마 안 남았어요! 저 이번 판 느낌 완전 좋거든요!”

사실이었다. 이번 판은 실로 오랜만에 그녀가 이기고 있었다.

이게 정말 그녀의 운인 건지. 아니면 이젠 그녀가 이따위 알량한 게임 그만두겠다고 할까 봐 클레멘츠가 실력을 조절한 건지는 알 바 아니었다. 어쨌건 오필리어는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이겨서, 설욕하는 게 중요했다.

주사위가 기세 좋게 굴러갔다. 그녀의 승리였다.

“만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쾌재를 불렀다. 타이밍 좋게도 창밖엔 낙뢰가 떨어졌다.

“들으세요! 승리의 대가로 제가 받아낼 건 바로… 으악?”

승부에 집중하느라 장시간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게 문제였다. 감각이 둔해진 다리가 늘어진 테이블보 위를 잘못 밟았고, 그녀는 휘청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클레멘츠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받쳐 들었다. 얼떨결에 테이블 위의 게임판도 후드득 쏟아져 버렸지만, 오필리어는 무사했다.

다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의 얼굴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가까웠다.

“…….”

따뜻한 불빛이 둘 근처를 조그맣게 밝혔다.

매끄러운 입술이 움직였다.

“받아낼 것은?”

분위기가 반전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필리어는 눈을 질끈 감으며, 그 위를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사실 클레멘츠에게 더 이상 받고 싶은 건 없었다. 갖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요즘 들어 서로에게 소홀했던 것도 자신 쪽이었다.

그렇다고 ‘받아낼 거요? 끝내주는 하룻밤?’ 같은 소리를 지껄이느니, 죽음을 택하고 말지!

“…오필리어.”

눈에 띄게 거칠어진 목소리가 맞붙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필리어는 제 몸무게를 완전히 그에게 내맡긴 채 다시 얼굴을 겹쳤다.

“이게 네가 받는 거야? 아닌 것 같은데.”

폭풍우가 치는 밤은 역으로 너무도 조용했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마음, 저도 알아요.”

나지막한 헛웃음이 울렸다. 클레멘츠는 그에 새빨개져 버리는 귓바퀴를 제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저도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고, 둘이서만 붙어 있고 싶고 그런데….”

“…….”

“다른 사람들 시선도 있고. 그런 건 아무래도 조금. 아니 많이.”

‘부끄럽잖아요.’ 끝에 가서는 거의 숨소리나 진배없어진 고백을 듣는 순간, 클레멘츠는 다른 어떤 생각이나 행동도 할 수 없어졌다.

사랑스러운 제 신부를 침대로 안아 옮기는 것 외에는.

연신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구분해낼 필요도 없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년 이 무렵이면 소이아 지방에 줄기차게 비가 쏟아진다는 걸, 오필리어가 알게 된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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