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06)화 (206/218)

외전 5화

Epilogue 2. 행복하게 오래도록

길었던 여행이 끝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클랏샤의 성벽이 보였다. 떠나 있는 동안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는데, 저 도시는 그다지 변한 게 없는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돌아가네.”

“너무 아쉽다. 그렇지?”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카밀이 불쑥 물었다.

“으, 으응?”

카밀은 여행 중간에 합류했다. 내가 혼자서 가 보고 싶었던 곳들을 방문하고 굵직한 생각을 정리한 다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언질도 없이 훌쩍 떠날 수가 있느냐며 서운함을 토로한 다음, 같이 수도 밖으로 나온 지금 약속했던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곧 돌아가려던 내 일정 경로가 대폭 수정되었다. 전국의 소문난 먹거리를 함께 맛보고, 내친김에 이웃나라까지 가서 귀여운 소동물들을 잔뜩 견학하고 왔다.

이후에 전해 듣기론 황궁에서 날 기다리던 클레멘츠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하지만, 이미 떠난 길을 물릴 수는 없는 일.

그렇게 여정을 마치고 수도 근교의 카페에서 같이 목을 축이던 참이었다. 어느새 1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여행 하나는 원이 없도록 한 셈이었다.

그런데 아쉽다니. 아쉬운가…?

“안 가 본 곳으로 다음에 같이 떠나면 되지. 원래 아쉬움을 남겨야 다음에 더 즐거운 법이래.”

“우리 오필리어는 늘 생각이 깊고 현명하구나.”

카밀은 행복하게 웃고는 내 앞으로 쿠키 그릇을 밀어주었다.

평소 같았다면 좋다고 오독오독 씹어 먹었겠지만, 지금은 선뜻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오필리어는 언제나 충분하고도 넘치도록 먹어야지.”

“곧 결혼하잖아. 많은 사람들이 볼 텐데. 볼살이 갑자기 늘어난 것 같지 않아?”

“…….”

‘결혼’이라는 내 말에 카밀의 화려한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것도 잠시. 우아하게 미소 지은 그녀가 내 얼굴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아닌데? 하나도 안 늘어났어. 처음 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 귀엽기만 한걸.”

내 몸은 내가 알았다. 그건 아닐 텐데….

각종 미식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결과는 몸 곳곳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걱정 마. 설령 네 볼살에 대해 헛소리하는 놈이 있어도, 다음 날이면 수도에서 안 보이게 될 테니까. 네 예비 남편을 포함해서!”

“그, 그게 무슨 얘기야?”

강제 이주를 포함한 권력 남용에다 잘하면 반역까지 불사하겠단 의미로 들리는데!

그러지 말라고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카밀은 나를 꼭 끌어안은 상태였다. 그때 내 등 뒤에서 무척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그 말은 모반죄로 처리해야 하나?”

“클레멘츠!”

“그러기 전에 내 신부를 놔주지 그래, 카밀 드 베일리스.”

어쩌면 좋아, 내 신부라니!

카밀이 팔을 풀어주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달려가 안긴 품은 예전처럼 너르고 탄탄했다.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수도를 코앞에 두고 쉬고 있다는데, 당장 달려오고 싶어서 버틸 수가 있어야지.”

보고 싶었다.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얼굴 여기저기에 입맞춤이 와 닿았다. 막상 다시 만나면 어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도록 기쁘기만 했다. 바보 같은 웃음이 연달아 터질 만큼.

“약속이고 뭐고 너를 그냥 데려와 버릴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고민했어.”

“잘 참았네요. 당신은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어요.”

사실 황궁으로 불러들이지만 않았다뿐이지, 그동안 클레멘츠의 과보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여행길에 가벼운 시비라도 걸렸다 하면 득달같이 쫓아와 그 자리를 갈아 엎어버렸다. 그것도 내가 떠난 뒤에 나타났다가 워프 포탈을 타고 은밀하게 사라졌으니, 그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나조차도 알아채지 못했다.

먹는 음식이며 가는 장소, 만나는 사람이 보고되는 건 당연지사.

참다못해 항의 편지를 보내 가며 싸운 적도 있었다. 그 뒤로 그의 유난은 한풀 가라앉았으나, 더 은밀하고 치밀해진 것 같았다.

“…….”

한참 재회의 기쁨을 누리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카밀이 대단히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살짝 입술을 뗐다. 타고난 미모조차 지워지는 표정이었다.

“결혼…… 축하해.”

“축하 감사히 받지, 베일리스.”

“하, 하. 전하께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카밀이 두 손을 꼭 말아 쥐었다. 좀 더 작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기어이 제게서 오필리어를 채 가시는 군요, 전하.”

클레멘츠는 아랑곳 않은 채 나를 데리고 등을 돌렸다.

“가자, 오필리어. 내가 아니더라도 수도엔 오매불망 너만 기다린 이들이 많아.”

* * *

그 말대로였다.

여행도 여행이었지만 숙소로 돌아와서도 나는 내내 바빴다.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흥미가 생겼지만, 연달아 사건들이 터지는 바람에 손을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제 황태자의 비서관이 될 수는 없겠지만, 황태자비가 되어서도 그 지식은 더없이 유용할 터였다.

결혼 준비와 관련된 서신들도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그것들을 처리하는 한편 나의 적성과 능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 두 가지 일을 하기로 했다.

클레멘츠와 내가 탄 마차는 수도에 입성하여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달렸고, 아카데미 마법대학 앞에서 멈춰 섰다.

“어서 와요, 전하. 그리고 삐약이 씨. 이렇게 부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산드라 학장님, 안녕하세요.”

마법대 학장 산드라 팔라스.

독스타나에서 티네와 로네 남매를 만난 이후,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국에는 마법이 발전했지만, 아직 나처럼 목소리를 이용해 마력을 쓰는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자연히 티네처럼 터무니없는 비난과 오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연구를 통해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한편 강하고 유용한 힘을 가지게 될 수 있을 터였다.

인연이 있는 산드라 팔라스 총장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연구를 진행해 주었다. 놀랍게도 결과 역시 긍정적이라, 고대의 시 몇 가지에 성악을 접목해 마력을 증폭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자, 여기 보고서. 지난번 서신으로 진행 상황은 미리 알려드렸죠?”

그녀가 건넨 보고서에는 악보와 수치, 도표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아직은 보조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그치지만, 앞으로 쓰임새가 더 발전할지도 몰랐다.

“기존 학생들을 대상으로도 검사해 봤는데, 예상외로 조금이나마 목소리에 마력을 가진 이들이 없지 않았어요. 다음 학기에 그 애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는요? 정말 흥미로운 연구 주제를 맡아서 제가 비 전하께 절이라도 하고 싶은걸.”

새 연구 주제가 마음에 들었던 듯, 학장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리고.

“오랜만이야, 티네.”

연구실에 앉아 있던 익숙한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독스타나에서 봤을 때보다 밝아진 모습에 덩달아 미소가 나왔다.

그녀는 더 이상 흉물스러운 검은 천으로 문양을 가리고 있지도 않았다.

“비 전하!”

티네는 눈물을 훔쳤다. 지난 세월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씩 웃었다.

“목걸이, 완성해서 황태자궁으로 보내 놨어요.”

짧은 만남을 마치고, 마차는 다시 수도를 가로질렀다.

티네와 훈훈하게 작별하려는데, 산드라 학장이 난데없이 메디프를 간절히 찾기에 급히 빠져나왔다.

공식적으로 종적을 감춘 메디프인데도, 아직 연구생으로 욕심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효율 좋은 도비를 향한 교수들의 집념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클레멘츠에게 물었다.

“공사는요?”

“모든 게 잘 진행되고 있다. 바로 오늘 아침에 내가 직접 가서 점검했어.”

수도를 떠나 있는 동안 떠올려 낸 두 가지 중 나머지. 바로 클랏샤 시민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였다.

제국인들은 음악을 좋아했다. 칼로카이리 축제의 백미 역시 노래 대회였는데, 안타깝게도 음악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전용 공간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극장은 있지만 콘서트홀은 없달까.

하나쯤 만들어 두면 문화의 발전에도 제국의 위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건의했고, 문화부의 열렬한 동조와 함께 예산안이 통과되었다고 들었다.

“한번 가 보고 싶은데….”

“나중에.”

하지만 수도를 가로지른 마차는 콘서트홀 현장이 아닌 황궁으로 향했다.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일만 하러 다니면, 나랑 결혼은 대체 언제 해 줄 거지?”

클레멘츠가 속삭였다. 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드니, 천천히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졌다.

마침내 반듯한 이마가 맞닿았다. 나는 웃었다.

“날짜도 이미 잡혔고, 이렇게 제가 왔잖아요.”

“중간에 네가 도망쳐 버릴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럼, 이제 수도 밖으론 안 내보내 줄 거예요?”

장난스럽게 묻자, 그는 내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기울어진 고개 너머, 창밖으로 가까워진 황궁의 풍경이 보였다.

하얗다. 그리고 꽃밭이었다. 곧 있을 경사를 온 세상에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리고 환영한다고 외치는 것처럼.

“원한다면 어디로든 가. 다만 이제 못 기다린다.”

“그러면…?”

“내가 따라갈 거야. 네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음…….”

좋긴 한데, 좋은 건가?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날들. 내가 어디를 가든 졸졸 쫓아오는 클레멘츠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황태자로서 위엄은 조금 떨어지겠지만… 귀여울 것 같았다. 마치 오리처럼.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클레멘츠의 손을 잡고, 황태자궁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려섰다.

신혼부부의 터전이 될 궁은 예전보다도 특별히 반짝거리는 모습이었다.

“오필리어 님!”

유렌과 카렌, 그리고 글로리나 부인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맞아요! 입어 볼 드레스가 산더미란 말이에요!”

“어…? 웨딩드레스는 이미 고르지 않았던가요? 결정해서 서신으로 보내 드렸는데.”

“그렇지만 그 옆에 있던 후보 13번이랑 끝까지 고민하셨잖아요. 당연히 그것도 입어 보셔야죠!”

그런 거야?

카렌에게 기묘하게 설득당해 끌려가는 동안, 유렌이 기민하게 쫓아오며 장신구 세트 역시 직접 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걸이는 이미 티네가 만든 아다만티스 작품으로 정했는데, 그에 어울리는 귀걸이와 팔찌 역시 A와 B 두 선택지가 있다는 거였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난 듯 누군가가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보고 싶었어요!”

보통 그 말이 먼저 아닌가?

흐뭇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글로리나 부인과 클레멘츠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행복한 고민 속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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