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02)화 (202/218)

외전 1화

Epilogue 1. 그 후, 오필리어는

클레멘츠에게 청혼을 받은 뒤 시작된 여행도 어느덧 중반 일정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도시 간 통행 문제에서부터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도시에 진입하려면 성주가 발급한 통행증이 필요한데, 내 이름이 너무 유명해진 탓이었다.

설마 내가 방문한다고 그렇게까지 할 줄은…….

내 이름을 본 성주와 주요 인사들은 성문 앞까지 마중 나와서 플래카드와 꽃을 흔들었다.

나는 그저 개인적으로 여행하려 했던 것뿐인데, 다들 긴장한 기색으로 졸졸 따라오면서 극진히 대접하려 하니 내가 여행을 떠난 목적에도 어긋났다.

게다가 한두 도시에서 그칠 것도 아니고. 제국 전역을 돌아다닐 건데 계속 이러면 민폐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가명으로 임시 신분증이라도 만들어 볼까 생각했지만, 그런 게 합법일 리 없었다.

명색이 클레멘츠가 ‘제국법의 공정한 수호자’인데, 아내가 될 내가 신분증을 위조하고 있을 수도 없고.

고민하다가, 그다음엔 도시를 통과하는 상단에 끼어 신원을 보증받고 검문을 통과했다.

그들에게만 조용히 내 원래 신분을 밝히니 협조를 받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도시를 돌아보고 있으려니, 드디어 아무도 내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자유가 얼마나 달콤하던지.

하지만 문제가 생겼으니. 하필 우연히도 거기서 일어난 강도 사건에 내가 휘말리고 만 것이다.

오래전부터 은행 금고를 노리고 준비한 계획범죄였다는데, 하필 그날 내가 광장에 놀러 갈 건 뭐람…….

다행히 사건 장소는 내가 있던 곳에선 충분히 멀었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없었다. 당연하지만 날 포함해서.

하지만 주기적으로 내 위치를 모니터링하고 있던 클레멘츠는 그만 폭주해버렸다.

정신을 차리니 사태는 제국군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문제는, 군복을 입은 일개 소대가 내게 따라붙었다는 것. 누가 봐도 대놓고 황태자비 전하의 행차였다.

결국 나는 편지를 보내 클레멘츠와 대판 싸워야만 했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참으로 피곤한 기억이다.

일련의 사건들이 있고 난 뒤에야 나는 해결책을 찾았다.

* * *

“어서 오세요. 독스타나입니다!”

성문을 지키던 수문장에게 통행증을 건네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재빨리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적인 여행이에요. 조용히 보내다가 갈 겁니다.”

‘아시죠?’라는 눈길을 보내자 수문장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명감마저 느끼는 표정이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우렁찬 목소리가 내 뒤에 따라붙었다.

통행증을 발급할 당시에 그 어떤 의전이나 지원도 원치 않는다는 서한을 첨부하면 되는 거였는데.

혹여 이 서한을 무시하거든 황실의 이름으로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으리란 미약한 경고도 함께.

이렇게 단순한 일로 그 난리를 부린 걸 생각하면 낯이 뜨거웠다.

도시 안은 척 봐도 활기가 가득했다.

이곳은 남부의 독스타나.

주요 도시는 아니었지만, 광업과 공예가 발달하여 꾸준히 부를 쌓는 곳이었다.

남부의 햇볕에 곳곳에 있는 공방 용광로의 열기가 뒤섞여 더운 공기를 만들어 냈다.

거리에는 가공된 광석을 운반하는 마차들이 적지 않게 굴러다녔다.

상점의 진열장 역시 품질이 높아 보이는 보석과 장신구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잘 정돈되어 있지만 양이 많아서 흘러넘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와….’

어느 공방에서 울려 퍼지는 맑은 망치 소리가 발길을 묶었다.

열린 문 사이로 진지하게 작업하고 있는 공예가들이 보였다.

수도에도 보석은 많았지만, 그런 것들을 만드는 현장에 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멋지다.’

보석을 비롯해 많은 물건들이 어디선가 뚝딱 만들어지진 않는다는 것쯤은 알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건 큰 자극이었다.

마치 제국의 심장인 클랏샤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들이 장기와 지체처럼 서로 연결되어 긴밀히 작동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달까.

독스타나는 유명한 귀금속 산지인 만큼 관광 사업도 어느 정도 발달해 있어, 공방이나 광산을 수월하게 견학할 수 있었다.

이따가 공방 한 군데를 둘러보기로 예약해두었으니, 지금은 보석 광산을 먼저 둘러볼 생각이었다.

“이곳 독스타나에서는 금뿐만 아니라 다양한 보석들이 채굴됩니다. 광산이 곧 도시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지요.”

깊은 땅속으로 들어오니 바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같은 시간대에 나 말고도 광산을 보러 온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과 함께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을 쓰고,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걸었다.

더 깊이 들어가자니, 안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어?”

“노랫소리야.”

지하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노랫소리는 신비로웠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힘차고 경쾌했다.

“아.”

안내자는 반색하며 붙임성 좋게 설명했다.

“우리 광산의 광부들이 노동요를 부르고 있네요.”

노동요라.

노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솔깃해졌다. 남부의 노래라서 그런지 색다른 리듬과 곡조를 가지고 있었다. 입에도 잘 붙어 어렵지 않게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오오…….”

여행하며 가지고 다니던 수첩을 펼치고 귀를 기울였다. 가사와 음을 간단히 받아적으니 즐거워졌다.

‘후렴 부분은 잘 손보면 무대에 올려도 재미있겠다.’

하지만 좀 더 앞으로 가서 그들의 모습을 접했을 때, 노동요에 대한 관심은 싹 사라졌다.

땀에 젖은 모습으로 분주히 일하는 광부들은 노련하고 보람차 보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다 같이 후렴구를 부르는 광경에선 빨려 들어갈 듯한 에너지마저 느껴졌다. 단 한 사람만 빼고.

혼자서만 입도 뻥긋 안 하는 광부의 목에는 검은색 초커가 걸려 있었다. 헬멧 밑으로 살짝 빠져나온 머리카락은 붉었다.

침묵이란 결국 목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

목에 걸린, 광부 작업복과는 지독히도 안 어울리는 초커가 내 눈길을 끌었다.

“으으음…….”

지금 내 목에도 드레스 색과 맞춘 초커가 걸려 있었다.

내 목에는 여섯 잎 꽃 모양의 문양이 있고, 그건 목소리에 담긴 마력의 표지였다.

클레멘츠가 낯뜨거운 시를 읊어 강화를 걸어준 뒤, 초커를 둘러 주었던 여름 무도회 날 밤. 그 이후로 나는 곧잘 초커를 하고 다녔다.

특히나 이 문양은 내가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알려주는 표지이기에.

그런데 하필이면 저쪽도 초커라니.

아마 지나친 연상일 것이다. 하지만….

‘심란하네.’

결국 나는 견학 프로그램이 끝나고 광산 밖으로 나온 뒤, 안내자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도 있는 데서 대놓고 묻기는 좀 민망하니까.

“조금 전에 보니까 한 분은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던데요. 뭔가 이유가 있을까요?”

내 질문에 안내자는 놀란 눈치였다. 그런 뒤엔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말입니다….”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라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뭔가 있군. 정말 뭔가 있어.

분명 관광객에게는 못할 소리라서 입을 틀어막는 것일 터.

냉정한 벨라에게 계속 치대었을 때의 끈질김을 발휘해 몇 번 더 물어보니, 안내자는 체념한 듯 대답했다.

다만 다 털어놓은 건 아니었다.

“예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과 관련이 있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요?”

“예…. 아, 하지만 우려하실 일은 없습니다! 독스타나 광산은 언제나 안전 수칙에 유의하여 운영되고 있으니까요.”

“네에……. 그래야겠죠.”

갑작스러운 소리를 늘어놓는 안내자를 빤히 보았다.

“말씀하신 그 녀석은 가족과 관련해서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아마 노래할 기분이 나지 않나 봅니다. 하하….”

이게 아니다. 분명 뭔가 더 있었다.

일단 안내자에게 인사한 뒤, 자리를 벗어나며 생각했다.

광업 도시에 일어날 만한 불미스러운 일. 과거의 일임에도 노래할 수 없다고 할 정도면 가족과 관련된 비극일 것이다.

‘광산 붕괴인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건 늘 매몰될 위험을 전제로 하거니와, 안내자가 묻지도 않은 안전 수칙 따위로 튀는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그런 일이 있기는 했었지만,

문제는 왜 그 소년 혼자만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위기였냐는 거였다.

하지만 찝찝하다고 뭔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뒤로 한 채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광산 다음은 보석을 가공하는 공방을 견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란세이 귀금속 공방’이란 세련된 간판 밑의 문을 열자, 독스타나에 와서 처음 보았던 공방보다 시설이 좋고 쾌적한 공간이 드러났다.

깐깐한 인상의, 초로의 사내가 나와 나를 맞았다.

“레오 님이십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필리아 레오’라는 가명을 사용해 여행하고 있었다.

지금 나는 짙은 갈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머리가 길어지기도 했고.

제국 전체에 생김새가 알려지긴 했지만, 역시 머리 모양이 인상을 좌우하는 법. 이 정도만 바꿔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다만티스 오필리어가 이런 지방에 와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하는 것도 아니니까.

“란세이 공방주님. 안녕하세요.”

독스타나에서 손에 꼽히는 귀금속 장인인 란세이는 깐깐한 성격으로 악명이 좀 있었다.

독스타나로 떠나오기 전, 옆 도시에까지 날아든 카탈로그에서 본 그의 작업물이 마음에 들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연한 색의 보석을 사용한 것이, 내 이미지와 어울릴 것 같았다.

이왕 견학할 거라면 여길 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서면으로 견학할 뜻을 전했었다.

처음에 왔던 답장은 이러했다.

[공방은 장인들의 것입니다. 최근 독스타나엔 돈을 받으며 외부인에게 작업 현장을 공개하는 근본 없는 것들이 늘어난 모양이지만 저는 그런 일은 본분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라면 ‘앗, 그렇군요.’ 하고 다른 공방을 알아봤겠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너무 진취적으로 변해 버린 걸까.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다음 편지에서 나는 단독 견학 비용을 제시하여 보냈다.

다행히도 제시액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란세이는 즉시 단독 견학을 수락했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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