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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01)화 (201/218)

201화

“반가우시죠?”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부자 사이에서 슬쩍 물었더니, 코넬리우스 황제는 뒷목을 잡으며 나를 가리켰다.

“너! 아직까지도 여길 들쑤시는 게냐. 그래, 너라면… 너라면 메디프 놈이 어디 있는지 알겠지! 당장 말해라!”

“죄송하지만 저도 몰라요, 폐하.”

“으윽!”

정말 모르니 애석하게도 고해 드릴 수가 없다.

벨라의 영지 혹은 마탑에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니 어쨌든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오필리어를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더 이상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클레멘츠가 바들바들 떨리는 황제의 손가락으로부터 나를 막아섰다. 싸늘한 목소리에서 그의 표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 보기에도 좋지 못할 테고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클레멘츠도 클레멘츠였지만 내 위상 역시 또다시 올라가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황태자를 구한 여자.

제 몸으로 마계의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파마의 새.

까마득한 선대의 축복을 받은, 전설의 아다만티스.

이런 나를 날개 삼아 클레멘츠 역시 순조롭게 원래 위치를 회복했다.

* * *

그가 다시 정식으로 클라티아의 황태자가 된 날, 나는 클레멘츠의 궁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문 밖으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예견된 승리였다.

잠시 ‘제1황자궁’으로 불렸던 이 건물은 또다시 황태자궁으로 불리게 되겠지.

그리고 클레멘츠는 내 평화로운 상상 속에서처럼, 이 나라의 좋은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럼 이제 나는 갈 때가 됐나.”

향기로운 찻물을 마저 비우고 일어나는데, 어디선가 튀어나온 팔들이 나를 양옆에서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맞아요, 오필리어 님!”

유렌과 카렌. 장기간의 메이드 일로 다져진 그들의 팔심은 선뜻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어디라니…… 제가 가야 할 곳으로요.”

“무슨 그런 섬뜩한 말씀을 하세요!”

“맞아요, 글로리나 부인! 오필리어 님 좀 말려 주세요!”

대체 무슨 일일까. 카렌이 부르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리며 글로리나 부인까지 나타났다.

“저 역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오필리어 님.”

부인은 따뜻한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제발 전하를 버리고 가지 말아 주십시오.”

“…….”

저기……. 나는 부모님께 제대로 된 해명도 못 하고 집을 나왔단 말이에요.

그리고 버린다니? 떠난다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역으로 내가 파르르 떨자, 세 사람은 당황했다.

“계약도 파기하고…… 먼저 절 차버린 사람은 클레멘츠라고요!”

“!”

청혼까지 했는데 비참하게 거절당했다는 말까진 자존심이 상해서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내게서 울분이 느껴졌는지, 세 사람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들끼리 뭔가 수근거리는가 싶더니, 글로리나 부인이 대표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그에 관해 전하와 나누실 말씀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지금 백금의 정원으로 가 보시는 게 어떠할지요?”

“거기로요? 지금요?”

“예.”

하긴 작별인사 정도는 제대로 해야겠지.

사실 이대로 헤어지는 건 나 역시 내키지 않았다.

클레멘츠가 없는 곳에서 씩씩하게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그가 나 없이 살아갈 거라는 것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묻는다면. 모르겠다.

절망의 한복판에 빠져도 봤고, 가장 위험한 곳을 헤치고 나왔는데.

정작 바로 앞에서 보물상자처럼 빛나고 있는 해피 엔딩에 손을 대기가 두려웠다.

그건 정말로 끝이니까. 그 뒤는 아무도 모르니까.

“……!”

그때, 발밑에 자그마한 꽃잎이 채였다.

코끝을 자극하는 달콤한 냄새를 맡고서야 그게 오렌지 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얗고 통통한 꽃은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많아져서, 백금의 정원에 도착했을 땐 바닥을 두껍게 덮을 정도가 되었다.

아직 겨울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이 많은 오렌지 꽃이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고, 공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향기로웠다.

그리고 파티라도 있는지 아주 우아하게 꾸며진 정원 한가운데, 클레멘츠가 서 있었다.

“오필리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에 모든 생각이 멎었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간 네게 받은 것들에 비해 감사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감사요?”

“너는…….”

그의 태도는 평소처럼 매끄럽고 위엄있었지만, 어쩐지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말끔하게 넘겨 올린 머리라든지, 몸에 딱 잘 맞는 황태자의 정복과 망토도 그렇고.

물론 조금 전까지 정식 황태자로 다시 책봉되고 와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너는 말 그대로 내 목숨을 구했지만, 그 전에도 나는 꼭 너로 인해 새로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진지하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순간을 위해 그 모든 걸 감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값지고, 달콤한 미소였다.

“네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 넌 모르겠지.”

시야에서 그가 쑥 내려갔다.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니 알게 해 주고 싶다. 매 순간 내가 어떻게 감사를 표하는지 지켜봐 줘.”

“…!”

“나의 충실함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너의 보호자가 되게 해 줘.”

그는 나의 청혼을 그대로 뒤집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그가 내민 금빛 반지에서 하얗고 투명한 보석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떡해! 으악!

“용감하고 사랑스러운 나의 새,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가슴이 미치도록 쿵쾅거렸다.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이대로 ‘네’라고만 대답하면 동화 속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한 완벽한 장면이 될 거다.

거의 혼이 나가 있는 터라, 실제로 연신 고개부터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저, 저기…….”

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보랏빛 눈이 흔들렸다. 이제야 알아챈 게 우스울 정도로, 그 눈에는 갈망이 그득 담겨 있었다.

내 입에서 떨어질 선고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원하는 대답이 아닐 경우 세상 끝까지 나를 따라올 것 같았다.

조금 무서우나 오히려 그렇기에 대답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나?”

여전히 그의 손에 들린 반지는 엄청난 존재감을 뽐냈다. 쳐다보기도 황송스럽다. 분명 엄청나게 비쌀 거야.

클레멘츠와 결혼하는 건 황태자비, 그리고 높은 확률로 미래의 황후가 된다는 걸 뜻했다. 그런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사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똑똑한 클레멘츠는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한 듯싶었다.

“너는 이미 감당하고도 남았다.”

아니, 이해한 것 맞나?

“물론…… 여전히 전하를 사랑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언제든 같이 있었으면…… 해요.”

내 말에 클레멘츠가 비친 안도감이 놀라워서 말을 멈춘 사이, 그가 일어섰다.

한순간에 나를 감싸는 그의 품도, 갈급한 듯 찾아드는 입맞춤도, 오렌지 꽃의 향기가 가득했다.

* * *

“꼭 가야만 하겠어?”

“네.”

잘생긴 얼굴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머리를 달래듯 쓰다듬는 내 무엄한 손에는 예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작은 빛도 눈이 부시게 반사해 내는 보석이 참 어여뻤다.

이곳은 클랏샤의 성문 앞. 내 손에는 갈색 짐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날, 나는 황실의 중요한 사람이 되기엔 경험이 부족하단 걸 클레멘츠에게 설명하기 위해 애썼다.

물론 그와 함께 보내는 약 1년의 세월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수도와 혼우드를 오갔을 뿐, 이 넓은 제국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마계도 조금 알긴 하지만 그건 인간 세상이 아니니 제외하고.

그리고 나는 평생을 시골 영지 아가씨의 시녀로 지내다가, 이제 조금 도시의 삶을 맛봤을 뿐이다.

내가 어떤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는지, 무엇을 배우고 어떤 형태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지.

결혼을 하고 황궁에 앉아 세상을 굽어보는 사람이 되기 전,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충분히 내려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것들을 피부로 접하고, 감동하고 고민하면서.

이 생각에 결국 클레멘츠가 동의해 주어서, 그리고 기다리겠노라고 말해 주어서 정말 기뻤다.

“천천히 돌아와라. 다만 난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울 거니까 그리 알고 있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일 것 같아?”

아무리 내가 좋아도 다 큰 성인 남성이 엉엉 울기야 하겠어?

……하지만 영영 놔주지 않을 것처럼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 모습을 보면, 달밤에 몰래 처연한 눈물 두어 방울 정도는 흘릴지도?

어머. 그건 정말 보기 좋은……. 아니, 가슴 아픈 일이었다.

“허튼짓하는 놈 있으면 다 부숴 놓을 테니 그것도 알고.”

“……부디 그런 일이 없길 빌죠.”

거추장스러운 행렬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호위는 최소로, 그러나 확실한 실력을 갖춘 이들로 꾸렸다.

“그리고 도망가면 내가 직접 잡으러 갈 거다.”

“아하하, 도망 안 가요!”

귓가에 속삭여진 낮은 목소리는 진심이 한가득해 순간 무서웠지만, 나는 곧 웃어넘겼다.

그리고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짧게 입맞춤했다.

이렇게 멋있고 자상한 예비 남편을 두고 내가 왜 도망가겠어?

“전하야말로, 저 없는 동안 다른 여자를 보시면 죽음뿐이에요.”

“안 봐.”

“다른 남자도 죽음뿐이에요. 셋이 같이 죽는다고 보시면 돼요.”

“안 본다고. 오필리어 레오라 뒤싱겐.”

왠지 어색하고 간지러운 이름에 몸을 굳히자, 입술에 다시 부드러운 감촉이 와닿았다.

이번에는 작별의 키스였다.

이대로라면 성문에서 해가 떨어지는 걸 볼 것 같다.

어렵게 뒤를 돌아 나가니, 새로운 세상은 싱그러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등으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잔잔한 콧노래가 나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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