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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200)화 (200/218)

200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마계와 다 같이 싸워 황태자를 되찾았다는 소식은 백성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수도 전체가 열광하고 환호하는 분위기를 보니 한 줌 남아 있을 반대파도 그다지 걱정되지 않았다.

메디프가 궁을 벗어나면서 구심점을 잃은 그들은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기 황권을 이을 후계자의 부재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기회주의자에 가까운 황제도, 이쯤 되면 클레멘츠를 간절히 기다린 척 버선발로 뛰쳐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는 달랐다.

“이상하군. 분명 그대는 시미크 교에서 파문되어 수도로 돌아올 수 없지 않나.”

황궁으로 가는 마차를 멈춰 세운 건, 힐다가드 성녀를 앞세운 클랏샤의 성직자들이었다.

“이렇게 대놓고 교단의 규율을 무시하는 건 그대의 독단인가, 제국의 의도인가? 뭐가 됐든 나는 결단코 악마와 연관된 죄인을 황궁으로 들여놓을 수 없네!”

사방이 클레멘츠를 환영하는 물결로 가득한데도, 과연 원칙주의자인 성녀는 조금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차를 수행하던 이들이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당당히 내렸다.

사실 교회가 막아설 것은 예상된 범위 안이었다.

그에게 결정적인 불명예를 준 건 모두의 앞에서 당한 파문이었다. 그러니 회복하는 과정 역시 모두의 앞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따라서 일부러 교회를 피해 수도까지 도착했다.

“더 이상 관련이 없어도 죄인입니까? 직접 마계로 내려가 마왕을 죽이기까지 했어도 오명을 씻기엔 부족한지요?”

클레멘츠는 차분하게 물었다. 어느새 그가 마계로 향한 건 오명을 씻기 위한 갸륵한 행동이 되었으나, 중요한 건 결과였다.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솔직히 마왕이 어떻게 인간에게 죽는다는 거지? 다들 속고 있는 게 분명해!”

기다렸다는 듯, 성녀 뒤에 포진하고 있던 성직자들이 제멋대로 따지고 들었다.

발렌틴 주교와 리베르틴 추기경, 그노시드 대주교랬나? 실질적으로 파문 판결을 내렸던 얼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클레멘츠는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이어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

“잠깐… 지금 뭐 하는……?”

뒤늦게야 그들은, 그게 클레멘츠가 파문당할 당시의 재현이란 걸 깨달았다. 나는 마차에 올라탄 채 카시스와 함께 열심히 내적 팝콘을 와작거렸다.

드러난 상체는 깨끗했다. 전과 달리 흉흉한 기운이 서린 붉은 문신이 보이지 않았다.

“저건!”

성직자들이 뻐끔거리는 사이, 어느새 그들 옆에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푸들 같은 곱슬머리와 동그란 안경. 언젠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아카데미 마법 학장 산드라 팔라스였다.

“존경하는 성녀님, 그리고 대주교님께선 제1황자 전하를 저주했던 마왕의 이름이 기억나십니까?”

“……기억나지 않소.”

“또, 혹시 누구라도 좋으니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어라……. 그러고 보니 나 역시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 주었던 새 마왕의 이름은 선명히도 기억하는데.

셀레네와 함께 죽었던 존재에 대해선 이름도, 겉모습도, 분위기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클레멘츠에게 시련을 주지 않았다면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마저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저분에게도 도움을 얻기로 되어 있었나요?”

“맞습니다. 새 연구과제 때문에 바쁘다면서 기꺼이 시간을 내더군요.”

내가 묻자, 카시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오는 내내 한 시도 쉬지 않고 바빠 보이더니, 이렇게 촘촘히 연락을 취해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자. 아카데미 마법 학장의 강의입니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으세요.”

산드라 총장은 병아리 시절 만났을 때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마법에 대한 기묘한 열정이 일렁이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악마를 비롯한 초월적 존재들은 다른 존재의 인지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이명을 많이 가진 마족일수록 강하지요. 역으로, 소멸한 악마의 이름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왕과 연관되었단 이유로 파문했던 황족이, 그 마왕을 소멸시키고 돌아왔다. 근원적인 부분을 해결했으니 오히려 어디 구석진 곳으로 추방하는 것보다 좋은 결과였다.

하지만 힐다가드 성녀는 망설였다.

“그대의 노고엔 감동했소. 하지만 정식 절차를 거쳐 파문된바. 당장 그대를 황궁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그에 대해선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성녀님.”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이 살짝 열리고, 카시스가 내려서 예를 표했다.

“뭔가?”

“잠시 성녀님만 따로 마차로 모셔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뭐? 그런 게 어디 있나?”

“맞소. 듀프레 후작. 할 말이 있다면 당당하게, 모두의 앞에서 하게!”

성녀 주변의 성직자들이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러나 카시스는 굴하지 않고 대답했다.

“교단의 명예와 직결된 건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늘 온화한 표정에 가려져 있던 카시스의 차가운 인상이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명예……?”

찔리는 게 많은 성직자들이 움찔해 있는 동안, 결정을 마친 성녀가 마차에 올랐다.

날 마주 보자 그녀의 연녹색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대는.”

“안녕하세요, 힐다가드 성녀님.”

나는 문제의 ‘성녀에게만 따로 말씀드릴 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다름 아닌 저 바깥에 있는 성직자들의 비리에 관한 문서였다.

발렌틴 주교는 밤에 사복 차림으로 술을 마시고 행객과 시비가 붙었다. 그냥 시비였다면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술김에 그 행객을 폭행하는 바람에 피해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리베르틴 추기경은 가학적인 성향의 투기장에 드나들 뿐 아니라 상당한 액수를 후원하는 큰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수도의 변두리엔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천인공노할 업소가 있었는데, 최근 치안대장이 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노시드 대주교는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에게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규모의 뇌물을 받아먹었다.

물론 기부금과 뇌물의 경계가 모호한 면이 있었지만, 너무 많이 해먹다 보니 교회에서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아도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문서를 훑은 성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평온하던 얼굴이 분노로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당연했다. 절차며 뭐며 따지기 전에 이미 판결문을 내린 성직자들부터가 진작에 파면감이었으니.

증거를 수집하는 데는 엔시를 비롯한 글로리나 부인 휘하의 정보원들, 그리고 최근엔 카밀의 심복인 시엘로가 열심히 해 주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시엘로는 병아리인 나를 황태자궁에서 납치한 그 사람이었다.

클레멘츠는 일찍부터 이들의 약점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성녀의 방문이 예정되면서 그들이 갑자기 근신하는 바람에 증거 수집이 늦어졌다고 했다.

그사이 교회와 황비가 손을 잡고 클레멘츠를 밀어붙였던 거고.

하지만 클레멘츠가 파문되자 금세 긴장이 풀려 예전의 생활로 돌아왔고, 이렇게 허무하게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신의 종을 자처한다는 사람들이!”

주름진 손안에서 문서가 우그러졌다. 아이고, 너무 흥분하시면 안 되는데.

“진정하세요, 성녀님.”

솔직히 그녀에 대해 감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직접 진심을 다해 부탁했는데도 클레멘츠를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원칙주의자인 성녀의 면모를 생각하면, 머리론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런 성녀이기에, 이번에는 기대해 볼 만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 이 문서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 대중 앞에 공개할까요?”

“지금 이걸 가지고 나와 거래를 하겠다는 건가, 레오라 가문의 오필리어?!”

성녀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오필리어 님…….”

내가 직접 성녀를 구슬릴 줄은 몰랐던지, 카시스가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것도 잠시. 그 역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녀를 살폈다.

분노에 씨근대는 숨결이 가라앉기도 전에 그녀는 결정을 마쳤다.

힐다가드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한 편 일평생 교단을 위해 헌신한 자.

시미크 교단의 명성이 추락하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막으려 하는 게 당연했다.

“그만!”

마차에서 내려선 힐다가드가 외쳤다.

“성녀의 권한으로 제1황자의 파문을 일시 해제하오.”

“뭐라고…?”

“그렇지만 성녀님!”

성직자들은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을 보며 성녀가 느꼈을 감정은 예상할 만했다.

“해산!!”

위협적인 노호가 좌중을 침묵시켰다. 얼마 뒤, 길이 열렸다.

* * *

그 뒤론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성녀는 신성 왕국으로 돌아갔고, 얼마 되지 않아 문제의 고위 성직자들이 파면되었다.

이후 신성 왕국으로부터 클레멘츠의 파문을 해제한다는 공식 문서가 도착했다.

2황자를 지지하던 이들이 아직 우왕좌왕하긴 했으나, 궁 안의 지지 구도는 빠르게 클레멘츠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2황자파의 중심이던 황비는 국혼마저 마다한 채 황비궁에 틀어박혔고, 메디프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반면 유일하고 치명적이었던 클레멘츠의 약점은 완전히 극복되었다.

“네 놈……!”

황제는 돌아온 클레멘츠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음……, 반가웠겠지?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친아들이 돌아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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