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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98)화 (198/218)

198화

특히 클레멘츠가 나를 떠올려 냈기에 그렇게 든든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니. 어딘가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지는 이야기였다.

결국, 끈질긴 악의와 복수심을 갈고 닦던 마왕은 그렇게 사라졌다.

“…….”

“내가 태어나며 흡수한 기억엔 그 인간의 것도 상당히 섞여 있는데…… 아마도 그 둘이 너무 밀접하게 엮여 있었기 때문일 거야. 동화되다시피 했거든. 그러니까…….”

새 마왕은 난생처음 더듬는 기억에 집중하듯, 잠시 머리를 매만지며 침묵했다.

“내 전대는 실패한 거네. 그 힘을 빼앗아오는 데에.”

붉은 눈으로 클레멘츠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그랬구나’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찾고 싶지는 않아. 너는 내 아들도 아니잖아?”

“…그럼 셀레네 샹그리아는 어떻게 되었어요?”

셀레네의 모습을 닮았지만 다른 존재였다. 옛 마왕은 소멸했다고 하는데, 그럼 셀레네는 어디로 갔을까?

“떠났어. 혹은 죽었다고 해야 하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인간들과 똑같아진 것 같아.”

황궁 한구석에 있을 그녀의 비석이 생각났다. 차라리 잘된 일일까. 안식을 얻으셨을까.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나는 너희가 좋아.”

“……?”

“해괴한 소릴…….”

클레멘츠의 말에 아주 동감이었지만 그런 말을 꺼낼 분위기는 아니었다.

적당히 팔을 꼬집으니 다행히 그는 입을 다물었다.

“보내 줄게. 집에들 가.”

새 마왕이 출입구를 향해 팔을 뻗자, 양 문이 활짝 열렸다.

“……이렇게 그냥 돌아가라는 건가?”

“그래. 현왕의 후손 뒤싱겐, 마족들 너무 부려먹지 말고. 인간은 너희끼리 잘 살아. 서로 건드리지 말자고.”

“……그러지.”

가볍게 건네진 제안을 숙고하던 클레멘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로써 인간계와 마계 사이에 새 규율이 정립된 듯싶었다.

그는 지체없이 내 팔을 이끌었다.

일어났던 일을 곱씹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클레멘츠를 이 지경까지 괴롭혔던 그 마왕의 이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열린 문 앞에서 물으니, 웃음기 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안 정했어. 네가 정해 줄래?”

“제가요?”

가만히 내려다보는 클레멘츠와 눈을 마주쳤다가, 마왕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았다.

정확히는 그 은발과 붉은 눈, 짐승을 닮은 발과 생나무 의자를.

역시…….

‘아르테미스’가 좋을 것 같다.

“여긴….”

열린 문 밖으로 발을 내놓자,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정경이 우릴 반겼다.

호화롭되 낡고 을씨년스러웠던 마왕성은 어디로 간 걸까.

온갖 종류의 초록색 넝쿨과 나무들이, 왕성한 기세로 주변을 뒤덮었다.

쿠르릉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물이 흘러와 성 주변을 메웠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예전 모습이 사라져 갔다. 마치, 옛 마왕의 흔적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려는 듯했다.

처음 마계로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해결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떠나간 셀레네의 존재가 가슴에 무겁게 새겨졌다. 만약, 그분이 아니었다면…… 아니. 생각하지 말자.

감사하게도 결국 클레멘츠는 내 옆에 있었다.

우선은 돌아가서 다른 일들을 끝맺는 걸 생각해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 일단.

“손을 다쳤잖아요. 클레멘츠.”

“괜찮아.”

“안 괜찮다니까요!”

암만 목숨은 건졌다지만, 인간계까지 그 먼 거리를 피가 뚝뚝 흐르는 손으로 갈 순 없었다.

다행히 마계를 향하면서 전투를 예상한지라, 간단한 약과 붕대를 주머니에 챙겨 왔다.

푸르게 흐르는 물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앉아 그의 상처를 감싸 주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다친 거예요? 마왕이 전하를 해치려고 하진 않았을 텐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억과 환상이 조합된 미로 속에서, 널 봤다.”

“저를요?”

“너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었지.”

환상 속에서도 날 봤다는 대목에서 설렐 뻔했는데… 처음 봤을 때?

그건 병아리를 봤다는 뜻 아냐, 이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클레멘츠의 눈은 정말로 따스했다.

“그때 그곳을 나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저를 만나려고요?”

“……그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지만, 동시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를 통해서 그렇게 되살려낸 의지는 금빛이 도는 작은 검의 형태를 띠었다. 그것은 마왕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만큼 강력하기도 했다.

이왕 그렇게 좋은 걸 손에 들었는데, 벽도 싸게싸게 부서져 주면 좀 좋아?

클레멘츠도 그랬다. 그렇다고 손이 그렇게 될 때까지 벽을 부순 거냐고 물어야 하는데……. 꾹 다물려 있던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그렇게 제가 보고 싶으셨으면서… 왜 그리 매정하게 쫓아내셨어요?”

“너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 그럴 거면 걱정이라도 더 이상 끼치지 마시든가요. 결국 제가 찾아올 수밖에 없게 해 놓고.”

“윽, 잠깐……. 아프구나.”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아댔단 걸 깨닫고 황급히 놓았다.

“그러는 너는, 대체 어쩌자고 여길 왔지? 마왕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잘못됐으면 대체 어쩔 뻔했어?”

“전하께서 여기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안 와요!”

“…….”

클레멘츠가 한 방 먹은 표정을 짓더니, 그 뒤 우리 사이의 공기가 조금 묘하게 흘렀다.

그는 다치지 않은 손을 내 뺨에 가져왔다. 닿을 듯 말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내 잘못을 인정하지.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제가 진작 말했잖아요. 우리…….”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좀 함께하자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힘을 합쳐 이겨내자고.

내 말을 예상한 건지 클레멘츠가 살짝 웃었다. 지친 기색이 남은 얼굴도 미소가 더해지자 수려했다.

하지만 난 더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러면 내 쪽에서 두 번이나 청혼하는 것 같잖아. 이미 한 번 까였는데…!

“우리?”

“됐어요!”

그의 웃음기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입술에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고마워.”

너무 순식간이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 동안.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나를 찾아와 줘서,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네가 없었다면 ‘인간’인 나는 그대로 끝났을 거야.”

나는 그저 클레멘츠를 되찾고 싶었을 따름이지, 진지한 감사의 말을 들을 생각은 못 했다.

서로의 얼굴이 좀더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클레멘츠가 갑자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뭔가 장밋빛을 띠는 물체가 급속도로 가까워져 왔다.

“나의 뒤싱겐! 성에서 나왔구나!”

“……크렘시아.”

“우리 아기 새 아가씨도 있네? 네가 우리 뒤싱겐을 데리고 나왔니? 아이고, 예뻐!”

“앗, 어…!”

장미색 머리칼을 길게 나부끼는 악마.

크렘시아는 너무 가까이 날아온다 싶더니, 대뜸 내 얼굴을 낚아채 볼 여기저기에 키스를 날렸다.

한참을 쪽쪽거리던 크렘시아는 갑자기 우뚝 멈추더니 뭔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잠깐만. 얘가 뽀뽀를 나랑 할 게 아닌데…….”

“…….”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떨어져 나갔다.

하얀 드레스 위에는 흉갑이 걸쳐져 있었고, 손에는 예전에 보았던 장미 모양 창이 들려 있었다.

“제국 인간들이 마계를 침략했어.”

“……뭐라고?”

클레멘츠의 경악한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이 이야기를 아직 안했군.

“…그렇게 됐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일단 급히 나가 봤는데, 저들이 드디어 널 지킬 마음이 든 모양이야.”

크렘시아가 창끝을 바닥에 콩 찍자, 장미 모양의 무구는 부드럽게 접히며 허공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제 말대로 마계가 침략당했음에도 태평한 태도였다.

인간들의 침공 정돈 간지럽지도 않다는 건가? 아니면 설마 벌써 다 죽이고 왔다거나…….

“저…… 그런데 여기 계셔도 돼요?”

“응? 내 영지가 침범당한 것도 아닌데, 왜?”

장밋빛 눈의 악마는 천진하다 싶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계는 아무래도 자기 영지를 더 우선시하는 분위기인가.

이어 그녀는 우리 뒤의, 이제 완전히 모습이 뒤바뀐 마왕성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새 마왕이 태어났으니 곧 마계의 기틀은 잡힐 테고. 저들이 요구하는 대로 나의 뒤싱겐을 내놓으면 곧 물러갈 텐데.”

그리고 날 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아기 새 아가씨?”

“아하하… 네에.”

“우리 마왕이 황태자를 데려간 것도 뭐, 사실이었고. 결국 내가 바라는 이가 다음 왕이 되진 않았지만…….”

크렘시아는 무언가 한참 생각하는 듯 클레멘츠를 바라보았다.

“나의 뒤싱겐. 네가 우리의 왕이 되는 것보다도, 무엇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악마이면서 인간의 대모가 된 크렘시아의 입장도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를 여태 이렇게나 아끼고 있다는 것도.

“자, 자! 못된 왕을 물리쳤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활기찬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한 크렘시아가 손을 휘둘렀다. 진분홍빛 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장미색 갈기를 가진 흰 말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아름다운 말은 처음이었다.

“이 아이가 너희를 데려다줄 거야.”

우리가 말에 오르자, 크렘시아가 말의 엉덩이를 탁 두드렸다. 그리곤 작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크렘시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말 그대로 바람처럼 달리는지라 앞을 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오필리어.”

클레멘츠가 살며시 날 감싸 안으며 긴 분홍색 갈기를 붙잡았다. 마계의 벌판을 달리던 말은 곧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나도 비행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금세 익숙해졌다. 하늘을 달리는 말을 타고 보는 풍경은 제법 낭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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