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97)화 (197/218)

197화

고향의 환상을 보는 아이의 눈은 갈망에 젖어 있었다. 마왕도 그걸 알았다. 그 사람은, 셀레네는 낙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팔을 뻗으려 해도 너무 짧았다. 자신은 조각나고 찢어진 영혼에 불과했다.

그때, 금빛으로 빛나는 아이가 문득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자그마한 발걸음이 향한 방향은 반사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차가운 불꽃에 영혼을 갉아 먹히던 클레멘츠가 내는 빛이 있었다.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정지한 건 마왕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텐데?

거기다 혼돈 그 자체인 아타누르 안에서 안내자를 벗어난다는 건, 영원히 미아가 될 것도 각오했다는 의미였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안 된다고 절규하는 마왕을 따라 허겁지겁 쫓아갔다.

이윽고 도착한 미로 속엔 수정 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마주한 아이들이 있었다.

환각 무더기 속에서 클레멘츠를 따라다니던 작은 조각의 기억이, 본체인 셀레네에게 흡수되었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 그리고 셀레네는 기억해 냈다.

금빛의 저 아이는 왜 다른 귀한 것들을 무시하고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서로를 보는 저 눈빛들은 무엇인지.

어떻게 클레멘츠는 누구도 이겨 내지 못한 아타누르의 환영을 물리쳤는지.

그것은 사랑이었다.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랑…….’

셀레네의 영혼은 전율하며 뒤척였다. 짧은 생의 기억에 그 역시 무엇을 열렬히 사랑한 적이 있었나?

한때는 황제가 주장한 사랑이라는 허울에 기만당하고, 실망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셀레네 역시도 사랑을 아는 이였다.

사람들을 위해 소원을 빌고 지혜를 모으는 샤먼의 도를 사랑했다. 언제나 묵묵히 곁에 있어 주었던 글로리나를 사랑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괴를 막고 싶을 만큼, 제가 죽은 뒤에도 그 모든 것들이 오래 숨 쉬어 나갈 세계를 사랑했다.

그리고 저 아이, 클레멘츠를.

이토록 오랫동안 지키고도 원망 한 점 생기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사라지든 마왕이 먼저 사라지든 상관없다니,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나 싶었다.

절대로 마왕 따위가 저 아이를 삼켜 버리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 다음 생의, 또 다다음 생의 영혼까지 바쳐 다시 기나긴 세월을 썩어간대도 상관없었다. 도리어 행복할 터였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너의 가족이고, 언제까지나 너를 지키는 사람일 테니.’

아주 뒤늦게야 셀레네는 깨달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구나.’

영원한 고통을 무색게 할 기쁨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름다운 폭풍이 조각나 있던 모든 존재를 감쌌다.

더는 아무것도 괴롭지 않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지?

마왕의 앞에서 벗어나 보랏빛이 비치는 곳을 따라가다가, 마침내 클레멘츠를 찾아낸 것까진 기억났다.

우리는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지만 단단한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저 너머로 가려면 또 얼마나 멀리 달려야 할까?

여기저기에 실금이 보이긴 하는데, 정말 이 벽을 무너뜨리려면 얼마나 두드려야 할까?

재회의 기쁨 한구석에서 그런 걱정이 올라오고 있을 때였다.

눈을 감았다 뜨니, 조금 다른 공간이었다.

여전히 아타누르 안인 듯 사방에 투명한 벽이 보였다. 하지만 안쪽은 훨씬 더 넓었다.

무엇보다 클레멘츠가 내 옆에 있었다. 감동에 젖어 그의 손을 잡으려던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뭐예요!”

한쪽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 손엔 못 보던 황금빛 단검이 피에 젖은 채 들려 있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잠시만. …지금은 느긋이 이야기 나눌 때가 아닌 듯하다.”

다친 손을 내 반대편으로 숨기는 그를 흘겨봤지만, 주위를 살펴보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마왕 글러토니아.

아타누르의 환상 속에서 마주했던 그녀가, 넓은 공간 한복판에 붙박인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끄아아악-!!”

헝클어진 적갈색 머리칼과 넝마가 된 고대식 복장으로 간신히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만큼 마왕의 모습은 처참히 망가졌다.

붉은 문신이 새겨져 있던 피부가 완전히 녹아내렸고, 사지의 형체도 흐물거렸다.

“미, 미친….”

본능적으로 클레멘츠의 팔에 매달렸다.

어째서인지 마왕은 무언가에 매인 것처럼,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건 위험한 존재였다. 연약한 우리가 갑자기 왜 최종보스와 한 방에 갇힌 거람?

클레멘츠도 그 점을 잘 자각한 듯, 나를 품 안으로 꼭 끌어안았다.

“조심해!”

“꺄아아아악!”

뭔가가 훅 다가오는 느낌에 있는 대로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무언가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을 떠 보니 뭔가 붉은 덩어리가 우리 앞의 허공에 부딪힌 듯 뭉개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 내 목소리가 펼친 듯한 보호막에 금빛 날개 모양의 잔상이 깜빡이다가 사라졌다.

흘러내린 자국을 따라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았지만, 보호막 자체는 건재해 보였다.

오오.

“저 아주 믿음직하죠?”

일단 품 안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생색을 냈다.

사실 나조차도 저런 게 발동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래도 요행인 것 같지만!

깜빡이는 금빛 날개를 멍하니 보던 클레멘츠가 이내 살짝 웃었다.

“그렇구나.”

“사실 어떻게 그냥 맞았어도… 저쪽보단 덜 아파 보였을 것 같기는 해요.”

전신이 녹아내리고 있는 마왕.

나의 비명을 기점으로 글러토니아는 더욱 심하게 몸부림치고 있었다.

“끄흐으윽!!”

그 순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같은 생각을 했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유일한 날붙이는 클레멘츠가 들고 있는 금빛 단검이었다.

태초부터 있었다는 아타누르의 벽에 금이 가게 한 물건이니, 보기보단 강할 것이다.

어쩌면 툭 치면 쓰러질 정도로 약해져 있는 마왕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지도.

찰나 간 우리는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내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클레멘츠는 자세를 잡고 멀리 떨어진 마왕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요거나 먹어라, 이 악덕 마왕아!”

단검이 하나였으므로 나는 별수 없이 옆에서 기선제압을 담당했다.

멋진 스윙이었다.

어차피 글러토니아는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보이지 않았다.

일단 처리한 뒤 벨라가 준 팔찌의 귀환 마법을 발동시키면, 함께 인간계로 돌아갈 수 있을 터.

그 순간엔 시간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느껴졌다.

금빛 궤적이 마침내 녹아 가는 마왕에게 명중했고, 연이어 보라색과 황금색이 섞인 빛무리가 크게 폭발했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었다.

“잘했구나, 내 아이들아.”

아주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뜻 달콤한 포도주 향기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클레멘츠가 나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 품을 즐기다가 번쩍 눈을 떴다.

우리는 아타누르 밖으로 나온 듯했다. 그런데 마왕성의 풍경은 그 안으로 들어갈 때완 달라져 있었다.

상당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식탁은 우지끈 무너져 있었다. 자기와 청동으로 된 그릇들이 모조리 깨졌고, 풍미를 자랑하던 음식은 온데간데없었다.

처참한 모습도 잠시. 만찬 식탁은 곧 완전히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 흩어진 뒤엔,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인물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안녕.”

클레멘츠는 나를 등 뒤로 쏙 밀어넣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포도주처럼 붉은 두 눈이었다.

달처럼 흰 은발이 바닥에 끌리도록 길었다. 무척 아름다운 형태였지만 ‘저건’ 인간이 아니었다.

전신에서 희미하게 흐르는 빛, 그리고 등 뒤의 커다란 날개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클레멘츠의 목소리엔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 역시 잔뜩 긴장한 채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지만, 자세히 보면 저 날개 달린 존재는 적의가 없다 못해 순수해 보였다.

눈빛에서 엿보이는 건 호기심,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호감.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는 데에 너희가 기여했다……라고 할 수 있겠네?”

식육목 짐승의 발을 닮은 손이 무너진 식탁을 가리켰다.

“가장 강했던 마족이 죽었어. 오래된 법칙에 따라 내가 새로 태어났지.”

“…오필리어, 이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무슨 소리죠? 같이 도망쳐요. 제 손 꼭 잡으세요.”

자신이 바로 새 마왕이란 소리에 우리는 도주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날개 달린 마왕은 여유롭게 웃으며 허공에 기대었다. 즉시 발밑에서 파릇한 나무가 자라나 몸을 떠받쳤다.

“다만 이전의 왕은 지금까지완 다른 점이 있었어. 어느 인간의 영혼에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 발버둥 치고 있었단 점이야.”

“…….”

셀레네 황후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성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환상을 보았다. 어쩌면 나의 목숨까지도 죽은 황후가 구해냈는지도 몰랐다.

눈치를 보아하니 클레멘츠도 대충 비슷한 기억을 되짚는 듯했다.

“영혼은 파장이자 에너지. 서로에게 간섭하고 또 간섭되어, 긴 세월 끝에 인간 쪽이 먼저 사라질 예정이었어.”

그 옛날 마왕과 얽혀 사라진 황후의 영혼은 이날 이때까지도 소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외롭고 고되었을까.

또한 저 말대로 셀레네가 먼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면, 마왕은 힘을 되찾고 말았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인간의 영혼이 힘을 얻었어. 폭발하듯 강력한 힘이었지. 그 바람에 너덜너덜해져 있던 마족의 영혼이 거의 파괴되어 버린 거야.”

“…….”

“거기에 그쪽의 아가씨가 내지른 파마의 음성. 그리고 뒤싱겐의 후손이 아가씨를 생각하며 되살려낸 순수한 의지의 힘. 그것들은 모든 것이 왜곡되는 아타누르 안에서도 위력을 발휘했어.”

모든 걸 내어놓아 그야말로 우리 둘의 몸뚱이밖엔 남은 게 없다 생각했던 순간에도, 우리는 마왕에게 대적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