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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96)화 (196/218)

196화

이윽고 의미 불명의 웅웅거리는 소음이 되었다.

“전하.”

“전하!”

“전하…….”

그를 부르는 소리들이 앞다퉈 소음을 뚫고 나왔다.

클레멘츠는 가만히 앞에 앉아 그들을 관조했다.

저 글들에, 그리고 말들에 얽매여 살아온 세월이 우스워졌다.

황제가 되는 길은 그의 앞에 놓인 유일한 선택지였다. 부친의 변덕 하나에 통째로 막혀 버리고 말 선택지에, 그토록 아등바등 매달리고 놀아났다.

한평생이 그 모양이었다.

앉은 자리 앞에는 왕관이 있었다. 황제의 상징인 금강석을 아낌없이 박은 왕관은 반짝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빛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한 손가락으로 툭 밀어내자, 왕관은 바닥에 떨어지며 수정이 깨지듯 산산이 조각났다.

동시에 주변을 메우고 있던 책들과 날뛰던 귀족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인간이 그를 버렸으니, 마왕은 이제 마계의 지배자가 되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까지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유일한 길을 틀어쥔 자에게 선택을 강요받는 꼴은 똑같은데.

그저 모든 것이 공허할 뿐이었다. 있는 거라곤 투명한 벽과 허상뿐인 이 공간처럼.

클레멘츠는 일어나서 걸었다.

“어디 가니?”

벽에 비친 셀레네의 환영이 그를 따라 걷든 말든, 무시했다.

앞만 보고 걸어가지 않으면. 환각에 정신을 잃고 깊게 빠져들게 되면,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아타누르에 잡아먹히고 말 테니.

그래서 그는 걷고, 또 하염없이 걸었다.

시공간이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이 뒤섞이고 영혼마저 변형되는 이곳. 아타누르 안의 변화무쌍한 마력에 저항하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것도 소용없으리라.

육각의 결계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한. 이 안의 무질서와 허망함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갉아 먹히리라.

적당한 때에 마왕은 아타누르를 열 테고,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잃은 클레멘츠를 맞이하리라.

그때가 되면 아무래도 상관없을 터였다. 마족이 되든, 인간들을 전부 죽이든.

그러나 어찌하겠나. 클레멘츠는 이미 지쳐 버렸다.

더 이상은 마왕의 흉계에 대항할 방법도,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투지는 희미해지고, 피로는 더욱 커져만 갔다. 시간은 줄어들고 또 늘어나면서 흘러갔다.

클레멘츠는 단지 각인된 행동처럼 걸어 나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를 둘러싼 환영은 수시로 모습을 바꾸었다. 어떨 때는 황궁의 복도였고, 어쩔 땐 아카데미의 강의실이었다. 혹은 클랏샤의 광장이나 바다, 엔클레이오가 열리던 후원, 무도회장.

그것도 아니면, 어느 서부 귀족의 저택. 그 근처를 둘러싸던 숲.

마침내 너무도 오래 헤매어 버린 클레멘츠가 그 숲의 이름마저 잊었을 때였다.

작은 샘이 보였다. 일행과 함께 말을 세워 두고 목을 축이기 좋아 보이는 곳이었다.

말도, 일행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순간 뭔가를 찾아야겠다고 느꼈다.

자신조차 그게 뭔지 몰랐다. 마치 몸에 각인된 듯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뒤편의 수풀로 들어간 순간, 클레멘츠의 모든 생각이 멈춰 버렸다.

거기에 아주 조그마한 아기 새가 있었다. 노랗고, 사랑스러운.

“클레멘츠. 그 병아리는 뭐니?”

셀레네의 물음이 빚어진 환청처럼 들려 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무척 조심스레, 삐약거리는 아기 새를 주워 들었다.

이 역시 환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기에 깨어져 버릴까 봐 더욱 겁이 나서.

“……오필리어.”

입을 열어 이름을 말하는 순간, 기억이 물밀 듯이 흘러들어왔다.

이 아기 새가 누구인지,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만난 시간은 짧았으나 오필리어를 빼놓고 그동안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허울 좋은 허망뿐이던 그의 세계는 빛을 찾았고, 그는 그 빛이 제 어둠에 먹혀 사그라들기 전에 놓아 주었다.

그녀는 이제 안전할 것이다.

불명예스러운 1황자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자신이 그리 만들었으니.

그의 입술은 서서히 미소를 그렸다.

살아온 삶은 무력함과 울분 속에 흐려졌지만, 오필리어를 만나고 놓아 보낸 기억은 영영 퇴색하지 않을 듯이 눈부셨다.

추억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였다.

“다시는 너를 볼 수 없겠구나.”

그날의 이별이 마지막이었다. 다정한 그녀는 인간들의 세상에 녹아들어 삶을 이어가리라. 그는 영혼의 담금솥 속에서 끓이고 녹여져 다른 존재가 되리라.

하지만….

‘오필리어도 그걸 원할까?’

그녀가 자신을 잊고 살아가길 바랐다. 한편으로는, 잊지 못하길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을 수백 번 억눌러 가며 그녀를 보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봐 온 오필리어라면 정말로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사랑으로 남지 않아도 다정한 바탕은 남아서, 아주 오랫동안 그를 걱정하고 괴로워할 터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통증이 가슴에 차올랐다.

더는 그녀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물들을 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던 그 순간이 이미 오필리어에겐 지독한 배신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클레멘츠는 최소한, 아타누르에 잠식되는 결말만큼은 맞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 그가 아직 클레멘츠 자신일 때.

다음 순간, 모든 거짓된 것들이 물러갔다. 클레멘츠는 아타누르의 실체인 온전히 투명한 벽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단 하나, 손바닥에 올렸던 작은 병아리는 황금빛을 띠는 짧은 검으로 변해 있었다.

칼날 언저리를 소중히 쓰다듬어 보았다. 날카롭고 단단한 칼이었다.

망설이다가 그것으로 벽을 내리쳤다.

쩡 하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다행히 칼은 망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투명한 벽에도 아주 미세한 금만이 갈 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언젠가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시공간이 뒤틀린 미궁 속에서, 마침내 찾아낸 출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 속이라 하더라도.

오필리어는 이미 거기에 없거나, 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쩡, 캉, 쩌적 하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아타누르는 미세하게 진동했고, 클레멘츠의 손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상처입었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텅.

자신이 일으킨 소음이 아니었다. 클레멘츠는 손을 멈추었다. 이내 황금빛 검이 딸그락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벽 저편에 붙어 있는 작은 손바닥이 보였다. 피가 흐르는 클레멘츠의 손이 그 위에 겹쳐졌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오필리어?”

그 옆에 손바닥의 모양보다는 흐릿하게 나타나는 얼굴이, 기억만큼 사랑스러웠다.

울고 있었고. 입을 크게 벌려 무어라 부르짖었다.

사방에 늘어선 장해물 틈새로 먹먹하게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클레멘츠는 판단하기 전에 깨달았다. 그녀였다.

대체 어떻게인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오필리어가 그를 찾아왔다.

한 사람이 있었다.

여느 다른 이들처럼 주어진 명을 살아냈고, 죽었다.

하지만 그의 넋은 안식을 취하지도, 신의 곁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영혼이 갈가리 찢기더라도, 가장 거대한 악령을 제압하느라 진력이 나서 더는 견딜 수 없더라도. 마침내 세계의 모퉁이에서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져 봤자,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점차 흐려져 갔다. 그 사람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건, 집념과 관성. 상대하고 있는 악의 영을 향한 투지. 그리고 증오와 환멸, 혼란이 서로를 되먹이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게 소멸할까.

마왕이 먼저 사라질지, 아니면 자신이 먼저일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만두는 방법마저도 잊어버렸을 무렵에.

마왕과 그 사람이 유폐된 성에 의외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클레멘츠.’

그는 가까스로 자식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태중에 있을 때 선조의 이름을 따 지었다는 것까지.

거의 다 풍화되어 가던 인간의 마음이 희미하게 몸부림쳤다.

‘내 아들을 놔 줘!’

피차 흐릿해져 가는 영혼이었지만, 인간보다는 마왕 쪽이 우세했다. 주도권을 잡은 글러토니아는 그 사람을 모방해 가며 클레멘츠를 농락했다.

그는 화가 났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상태가 된 그 어느 때보다도 무력감을 느꼈다. 다시금 증오가, 그리고 환멸과 혼란이 그를 집어삼켰다.

한편 그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아주 작은 조각은 아타누르에 갇힌 자식을 따라다녔다.

조각은 그 아이가 길을 잃지 않길 바랐다. 함께해 주지 못한 세월이 아쉬웠다. 너무나 미력하여 슬픈 몸짓이었다.

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은 또다시 잊고 있던 감정에 흔들렸다.

놀라웠다. 이처럼 작고 밝고 생생하여, 이곳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이가 찾아오다니. 그의 자식을 위하여, 거의 다 흐려졌음에도 여전히 강한 글러토니아 앞에 서다니.

순간 생생해진 감각이 경보를 울렸다. 마왕이 클레멘츠는 죽일 이유가 없어도, 저 애에겐 그렇지 않아.

저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두어선 안 돼!

드문드문 남은 존재를 쥐어짜 매달렸다. 비명을 지르는 마왕의 정신을 다 끊어져 가는 실로 옥죄었다. 너무 늦지 않았나 했는데,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는 다행히 살아 있었다.

“…하! 그래, 좋아!”

시달리다 못한 악령이 제안했다. 아타누르의 힘을 이용해 저 아이를 원래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겠냐고.

그건 거짓말이었다.

암만 마왕이 오래 살아 지혜를 얻었어도, 아타누르의 잠재력이 강력해도. 아이가 정확히 돌아갈 확률은 희박했다. 거대한 차원의 폭풍에 휩쓸리거나, 운이 좋아도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눈을 뜨게 될 터였다.

‘안 돼.’

하지만 불과 조금 전에 힘을 털어 써 버린 까닭인지, 그 사람은 뒤편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거짓말이야. 아이야, 그 길을 택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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