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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95)화 (195/218)

195화

나는 고개를 돌려, 식탁 너머에 펼쳐진 커다란 육각 구조물을 보았다.

얼음처럼, 거울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것. 저게 바로 아타누르겠지.

마왕은 저기에 묶였으니, 만일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저 구조물로부터 멀어지면 될 것이다.

고작 대문 바깥으로만 벗어나도 마왕은 거의 힘을 못 쓰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높은 확률로 클레멘츠가 저기 있었다. 아니…….

“……!”

곁눈질로 아타누르를 자세히 보던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저 투명한 줄로만 알았던 벽 안쪽에 희끄무레한 형상이 보였다.

쉬는 듯이, 자는 듯이 누워 있는 클레멘츠는 얼음 속에 갇혀서인지 평소보다도 차갑고 창백해 보였다.

그로부터 익숙한 보라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전에 그가 소환을 할 때마다 보았던, 피에 깃든 마력의 색이었다.

‘이 미친 마왕이 진짜…….’

클레멘츠에게 풍부한 마력이 있으니, 일단 그것부터 빼앗아 뭔가 조작하려는 걸까?

아니면, 이것도 클레멘츠를 변화시키려는 계획의 일부이거나.

그때.

한눈을 파는 나를 눈치챈 건지, 마왕의 평이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흉포해졌다.

“하늘의 황금 새.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목소리로 마계를 잘도 휘저어 놓았겠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 역시 순간 숨 막히도록 짙어졌다.

“너 같은 게 날 방해하도록 놔둘 순 없어!”

거의 동시에 격한 충격음과, 무언가 파삭 바스러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한쪽 팔의 팔찌를 확인하니, 추가된 보석 장식 하나가 부서져 있었다.

‘마왕이 날 공격한 거야.’

등골이 오싹하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벨라가 미리 걸어 준 보호 마법이 없었다면 지금쯤 온몸이 짜부라들어 있었을지도.

클레멘츠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마계를 빠져나가야 할지 짧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자, 잠깐…! 으아악!”

나를 공격한 마왕의 목소리가, 별안간 날카롭게 찢어지는 비명이 되었다.

“뭐야……?”

목소리 뿐이고 눈으로 보이지도 않으니, 전혀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비명에 이어 짧은 외침과 욕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고대어가 번갈아 가며 한참 이어졌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만 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셀레네 디 샹그리아, 얼마나 더 나를 못살게 굴어야만 만족할래?’

이윽고 마왕은 목을 조르는 손에서 간신히 벗어난 것처럼 크게 숨을 터뜨렸다.

“…하! 그래, 좋아!”

그리고 어딘지 광기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 정도 되는 존재라면 한 눈에 알 수 있지. 오필리어 레오라. 너…….”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식탁 쪽을 향해, 아타누르를 등지고 섰다.

경계를 놓지 않으며 발걸음은 계속 뒤를 향했다. 애당초 다른 곳을 향한다는 선택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니?”

“무슨 개소리죠? 전 클레멘츠만 되찾으면 바로 돌아갈 건데요.”

“혼우드 말고. 진짜 너의 집 말이야.”

그 말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내 집.

세월이 얼마나 흘렀든, 이곳이 소설 속 세계란 걸 잊었을 리 없었다.

휴재가 끝나길 기다리던 ‘뷰티 앤 더 비스트’.

‘현실 세계’의 내 몸은 아직 살아 있을까? 집이랄 게, 진짜 내 세상이라 할 만한 게 아직 남아 있을까?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가?

“…….”

머뭇거리는 티가 났는지, 마왕의 목소리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다음 순간,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신비롭고 고풍스럽게 꾸며졌던 마왕성 내부는 온데간데없고, 수정을 투과해 나온 듯 반짝이는 빛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4차선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 눈에 익은 건물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가 살던 도시의 모습은 친숙하면서도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시점은 서서히 이동해 이제는 내가 다니던 대학이 보였다. 한쪽으로 내가 자취하던 건물이 보였다. 버스가 실어나른 학생들이 교문으로 밀려들었다.

[20XX년 신입생 입학을 축하합니다.]

현수막의 문구가 눈길을 붙잡았다.

분명 이 몸으로 살기 시작한 지 8년이 넘었음에도, 저곳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럼… 아직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어떤 수업을 듣고, 어떤 사람들을 만날 예정이었지?

아, 아니야. 기억하지 말자.

“아타누르에 대해 들어는 보았니, 이세계의 영혼아?”

“…….”

글로리나 부인이 셀레네 황후에 대해 얘기해줄 때 살짝 들었을 뿐.

나는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자세히는 몰랐다.

“태초부터 있었고, 영혼을 기가 막히게 잘 포획하고 잡아 두며, 튼튼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본디 아타누르의 의미는 시공의 열점(熱點)이야.”

“열점이요?”

“깊이 생각할 건 없어. 이곳의 밑바닥이 세계의 바깥과 연결된다는 거지. 바닷속의 열점이 땅속의 물질을 분출하듯, 아타누르의 아래엔 이 세계의 존재를 저쪽으로 통과시키는 차가운 불꽃이 흐르니까.”

“그럼…!”

알지 못하는 사이 나 역시 육각의 아타누르 속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바깥에선 분명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던 마왕이, 내 앞에서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으니.

“세계와 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연결돼. 열점보다 흔한 형태는 책이나 벽화, 옛이야기 같은 것들이지.”

“…….”

책 속의 이야기들이 실제로 다른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니.

믿기 힘들었지만, 내가 여기까지 와 있으니 정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곳을 통하면 네가 원래 세계로 되돌아갈 수도 있단 얘기야. 어때?”

마왕이 물었다.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니?”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학교와 집의 풍경을 보니 잊고 있던 기억들이 밀물처럼 되돌아왔다. 돌이켜 보면 정말 그리웠다.

하지만 이 사악한 마왕의 뭘 믿고 이런 중요한 일을 승낙한단 말인가.

모든 게 속임수거나 허상이라면?

아타누르를 통해 이 세계를 벗어난다고 해도, 원래의 내 몸에서 적절한 시점에 눈을 뜨리란 보장이 있나?

설령 전부 잘 풀린다 치자.

여기서 내가 가버리면 클레멘츠는 글러토니아의 손에 떨어진다.

그렇게 마왕이 되어 원래 세계에 복수하는 게 원작대로의 결말이려나.

하지만 나는, 이곳에 그를 두고 돌아가서 잘 살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사람에서 또다시 화면 속의 활자가 되어 버린 클레멘츠를. 부모님을.

그리고 벨라와 카밀과 메디프를… 나는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다. 괴롭고 외롭고 허탈하게.

표정을 보니 마왕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내가 자리한 검은 공간 옆, 수정처럼 투명한 벽이 이어진 길을 건너다보았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보라색 빛이 벽을 투과하며 희미하게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그래.

마왕이 아직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그쪽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안 돼…!”

글러토니아의 목소리가 저 뒤편에서 흐려져 갔다.

* * *

“클레멘츠. 이리 오렴.”

무척 여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정원을 거닐던 클레멘츠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은발이 바람에 사르륵 흔들렸다.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오후엔 악기 수업이 있잖니. 얼른 쉬고 점심 먹어야지.”

대여섯 살짜리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

여자의 생김새는 황실에 남겨진 초상화로부터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클레멘츠는 픽 웃었다.

저 사람, 그리고 이 정원과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

전부 수정처럼 투명한 벽 위에 비추어진 영상이었다. 아타누르가, 마왕이 만들어낸 환상.

“응? 왜 그러니. 어서 따라오지 않고.”

환상 속의 셀레네 디 샹그리아는 퍽 걱정스레 재차 손을 뻗었다.

클레멘츠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벽이 이뤄낸 미로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셀레네는 밝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통 좋아하는 음식이 없더구나. 가리지 않고 먹는 건 기쁘지만, 자식이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것도 어미의 기쁨이지 않니.”

“…….”

“특별히 맛이 좋은 요리는 없었니? 조리장에게 부탁해 만들라고 하마. 아, 그리고 이번 고대어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았다면서? 정말 자랑스러워!”

황후는 그가 태어난 날에 죽었다. 당연히 수업이니 시험이니 참견할 수도, 식사 시간 전에 그를 데리러 정원으로 나올 수도 없다.

그는 황궁 정원의 이 장소를 기억했다. 시간도 마침 악기 수업이 있는 날의 점심 무렵. 여섯 살쯤이던가.

당시의 클레멘츠는 더 놀고 싶었다. 놀이에 어울려 줄 사람을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서투른 주문으로 크렘시아를 소환했고, 그녀가 주변에 있던 사용인들을 다 죽여버렸다.

푸르게 빛나는 이 정원이 피로 물든 장면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지금은 살벌한 창을 쥔 전쟁광 악마도, 피와 시체도, 놀지 못해 한이 맺힌 소년도 없었다.

황후의 머리 위에 햇살이 유유히 부서졌다. 아마 그의 머리칼도 비슷하게 보였으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거짓된 풍경이며 오래된 기억 따위.

‘어머니. 이제 와서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클레멘츠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다음에 펼쳐진 건.

‘책.’

학문과 교양, 정치와 가십. 상업과 측량의 수치들. 찍어내거나 펜으로 휘갈긴 글자들이 고문헌과 실용 문서로부터 꾸역꾸역 밀려 나와 그를 포위했다.

‘…사람들.’

고급 비단을 몸에 감은 귀족들이 일렬로 나열된 회의석에 앉았다. 귀족파, 황비파, 황태자파. 병들어 죽었거나 사형당한 자들, 오래전 수도 정계를 떠난 자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클랏샤 공동 시장의 관리세를 올려 걷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낮춰야 합니다.”

“아카데미는 황실 예산만 좀먹는 도둑놈들입니다.”

“저번 여름 무도회는 너무 검소했습니다. 제국의 위신을 살려야…”

“대가문 출신 여인과의 국혼은 더이상 안 됩니다!”

처음엔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들의 말은, 서로 섞이고 묻히며 불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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