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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94)화 (194/218)

194화

중간 즈음부터는 악마들이 찾아왔다.

“뒤싱겐- 아니, 새 왕이시여.”

“저희의 왕이 되어 주시기 위해 오신 겁니까?”

소환한 적 있는 악마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클레멘츠는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캐묻다가 포기하고 길을 안내했다.

마왕성 앞,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악마가 몸을 낮춘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뒤싱겐.”

장미 넝쿨에 깃든 영혼, 붉은 마공작. 크렘시아가 장밋빛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드디어 우리의 왕이 되어 주려고 왔어? 마족에게 씐 굴레를 풀고, 마계를 해방시키려고?”

“……글쎄.”

인간은 그를 버렸고, 악마들은 왕이 되어 달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아직 악마들의 기대에 부응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마왕을 만나고 싶었다. 어미를 속이고 잡아먹은 마왕과 얼굴을 마주하고 묻고 싶었다.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으니, 이젠 만족하냐고.

“어쩌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마계를 택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마왕을 대면하고 나면 이제 한 가지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너무나도 기다려 왔던 일인데, 왜 내 눈엔 네가 너무도 슬프고 외로워 보일까?”

계단 위에 무릎을 꿇은 크렘시아는 손을 뻗어, 클레멘츠의 턱을 살짝 받쳐 들었다.

“이대로 널 들여보내도 되는지 모르겠어, 나의 뒤싱겐.”

크렘시아가 연신 들여다봐도 보랏빛 눈은 건조하기만 했다.

“나는 오십 년이고, 백 년이고 더 기다릴 수 있으니 충분히 생각하고 들어가.”

그때, 마왕성의 대문이 덜컹거리며 굉음이 울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크렘시아.”

귀를 먹먹하게 하는 음성은 성안으로부터 들려 왔다.

크렘시아는 창을 꽉 움켜쥐며 문 쪽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마계에서는 왕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저래 보여도 마왕은 아타누르에 얽매인 존재일 뿐이야. 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지.”

“…….”

“그러니 절대로 주눅 들지 마, 나의 뒤싱겐.”

아주 작게 속삭이는 대모를 뒤로하고, 클레멘츠는 마왕성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렴, 아들아!”

겉의 웅장한 모습과 다르게 성안은 휑하리만큼 단순했다.

한쪽엔 공간의 대부분을 채우는 투명한 육각의 구조물이, 다른 한쪽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진 큰 식탁이 있었다.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탁이라.’

셀레네의 술책에 묶이기 전, 글러토니아는 미식가 마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타누르에 봉인되어 목소리만 남았고, 흔적처럼 왕으로서의 속성이 나타난 건가.’

언뜻 화려해 보이는 만찬 식탁은,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목재가 삭았으며 그릇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

긴 시간 풀려나고자 안간힘을 쓰며, 마왕의 힘마저도 쇠락했다는 증거였다.

성안의 모습을 훑어본 클레멘츠가 말했다.

“내겐 어머니가 없는데.”

“그게 무슨 서운한 소리니!”

날카로운 소리가 휘몰아쳤지만, 클레멘츠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고고하게 서 있었다.

“클레멘츠!”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돌아봤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네 아버지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갔단다. 페리윙클과 베일리스, 샹그리아. 듀프레, 뒤싱겐! 귀족의 이름을 단 모든 이들이 나를 조롱하고 짓밟았어. 평민들은 날 손가락질하고 마녀로 낙인찍었단다.”

“…….”

“그들에게 복수해 주렴. 클라티아 사람들의 피로 나를 위로해 줘.”

저 목소리는 아마 셀레네 디 샹그리아의 것이리라.

하지만 고작 생모의 목소리에 눈이 뒤집혀, 인간들을 도륙하러 뛰쳐나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이별한 자식에게 하는 첫 마디론 살벌하기 짝이 없네.”

“…프흐.”

목소리만 남은 마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속네.”

그 말과 함께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클레멘츠는 갑작스러운 두통에 무릎을 꺾으며 무너졌다.

“하지만 상관없지. 어차피 너는 내 뒤를 이어 왕이 되고, 마계는 마침내 승리를 쟁취할 테니까.”

“닥쳐! 아들이라고? 나는 네놈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관련 없다니? 나를 통해 태어났다는 표식이 아직도 네 몸에 선명히 남아 있을 텐데.”

“그 장난 같은 표식은 지워 버리고, 내게 저지른 짓들도 책임지고 되돌려 놔!”

의식을 좀먹는 고통 속에서, 클레멘츠는 이를 악물며 간신히 외쳤다.

크렘시아의 말대로 마왕은 이 장소에 묶인 존재였고, 클레멘츠의 손에는 뜻대로 부릴 수 있는 마족들이 있었다.

그들의 힘으로 마왕을 온전한 소멸까지 이끌겠다고 협박하리라.

혹은, 마족들에게 자멸을 명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마계를 부흥시키려는 마왕의 꿈은 산산 조각날 것이다.

“훗.”

하지만 마왕은 그의 속마음을 읽은 듯 비웃음을 날렸다.

“이미 온갖 이유를 끄집어내 너를 버린 인간들이다. 그 어미에 이어 아들도. 이제 와 나의 표식을 지우고 마계와의 연결을 끊는다고 해도, 그들이 다시 너를 받아들여 줄까?”

“…….”

“잘 생각해야지.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인간들이 없어도 너는 마계의 왕이 될 수 있지만, 너를 따르는 마족들마저 없어진다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인간계에서도 줄곧 그리 살았잖니?”

목소리밖에 남지 않은 마왕이 표독스럽게 웃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을 들었을 때, 클레멘츠의 눈이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는 차갑고 투명한 벽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영혼을 먹어 치운 포식자가 웃었다.

* * *

아다만티스는 참으로 빠른 새였다. 나는 맹렬한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빛으로 된 푸른색 리본 같은 것들이 떠올라 나를 안내했다. 메디프가 마력을 분배해 만들어 준 길잡이 표였다.

마계의 중심부로 갈수록, 땅은 물론 하늘에까지 수상한 기운이나 마물 떼가 달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초음파라도 쏠 기세로 울어 젖히면 간편하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아다만티스는 최고다. 닉타와 메라에게 저주를 풀어달라고 하지 않길 잘했다.

『다 왔다고?』

길을 안내해 주던 파란색 빛 리본이 스르륵 풀어졌다.

서서히 허공에 녹아드는 걸 보니, 메디프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보단 역할을 다하여 사라진 것 같았다.

일단 이 근처인 것 같긴 한데, 아래쪽은 어두운 데다 안개까지 쫙 깔려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날아들긴 곤란했다.

마왕성을 찾아 기웃대던 나는, 마침 근처에서 날고 있던 새를 발견했다.

『야.』

『왁! 깜짝이야!』

마계의 새…… 그러니까 마수의 일종인 걸까?

새파랗고 뾰족뾰족하게 생긴 새는 확실히 인간계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마기를 풀풀 풍기고 있기도 하고.

그러나 어쨌든 새의 모양을 하고 있으니 말이 통할까 싶어 불러 봤는데, 다행이었다.

『여기 마왕성이 어느 쪽이냐?』

『으아악! 살려 주세요!』

아니, 안 죽여.

파란 마계 새는 내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듣기 고통스러운지 괴성을 질렀다.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걸 보니 마수이긴 한 모양이지….

골이 울린다, 귀가 찢어지는 것 같다며 호들갑 떠는 걸 묵묵히 기다렸더니, 이윽고 파란 날개 끝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예전에 왕이 살던 커다란 성이라면 저쪽으로 쭉 내려가시면 됩니다. 따… 딱히 당신이 무서워서 가르쳐 주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 그래.

내가 대답할세라 저 멀리 날아가는 새를 일별하고, 가리킨 방향으로 날아갔다.

험준한 암석 산지 사이에, 척 봐도 검고 살풍경한 마왕성이 있었다.

거기서부턴 새의 모습이 딱히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거니까, 사람인 편이 낫겠지.

셀레네 황후가 제 영혼으로 마왕을 묶어 버렸기 때문인지, 성 주변은 황량하고 썰렁하기만 했다.

다시 사람으로 변신한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마왕이라 함은 보통 최종 보스. 힘이 묶여 있다곤 해도 아마 평범한 인간인 나 따위는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지. 저 너머에 클레멘츠가 있을 테니까.

여차하면 벨라가 준 팔찌가 나를 지켜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 문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을 때.

“어서 와.”

고혹적인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만찬이 나를 반겼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동시에, 풍성하게 익다 못해 쉬어 버린 술과, 부패한 고깃덩이의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먹겠니?”

“아니요.”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은 입에 넣지 않는 게 상식 중의 상식. 그것도 이렇게 수상한 자리에서야 말할 것도 없었다.

“후후. 독은 들어 있지 않아.”

예. 독이 들어 있지 않은 대신 제 영혼을 저당 잡히게 하는 주문 같은 게 걸려 있겠죠.

목소리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식탁의 상석에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적갈색의 긴 머리와 노출이 많은 고대식의 복장이었다. 자세히 보려고 하는 순간, 그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야?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마왕이 사람을 현혹시키는 거야 당연한 것.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클레멘츠는 어딨죠? 저는 그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알아.”

“클레멘츠를 돌려줘요!”

그 순간, 또다시 누군가의 환영이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긴 은발이 익숙했다.

깜짝 놀라 돌아보면, 역시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곤란하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얻은 기회인데?”

“얼마나 기다렸든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벨라에게 들어갔던 대마녀의 영혼이든, 이쪽의 마왕이든.

왜 까마득한 예전 일로 이젠 관계도 없는 클레멘츠를 못살게 구는지.

“실제로 코앞까지 왔는데, 말이 되든 안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에겐 아타누르의 불꽃이 필요해. 내 후계자의 자격은 갖췄지만 아직 인간이니, 그 영혼을 마족에 걸맞게 변모시킬 필요가 있거든.”

예상대로 마왕은 내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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