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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89)화 (189/218)

189화

며칠이 쉽게도 흘러갔다.

카시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광장 근처의 시계탑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당성이에요.”

말 그대로 이미 교회와 황실은 정당성을 선점했다. 클레멘츠를 파문하고, 그 자리에 메디프를 앉혀 버렸으니.

지금으로선 뭘 해봤자 국가의 신성한 결정을 부정하는 반동세력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고심한 끝에 내가 선택한 길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다만티스로서 내 영향력은 아직 건재했다. 수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내가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 황후 셀레네 폐하가 악마를 소환했다는 소문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대악마 중의 대악마인 마왕 글러토니아를 소환했지요.”

그 자리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상히 풀어놓았다.

셀레네가 악마를 소환한 이유는 무엇인지.

어째서 청하지도 않은 마왕이 그 소환에 끼어들 수 있었던 건지.

그동안 셀레네의 선택과 비극에 관련된 이야기는 황실의 비밀이었다. 클레멘츠의 출생이 악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지점만 선택적으로 퍼져나가, 뜬구름 잡는 악의적인 소문만 무성했다.

그것이 클레멘츠에게 독이 되었다.

내 생각은, 그럴 바에야 아예 전후 사정을 밝혀 버리자는 거였다.

그러고 나면 그동안 자극적인 소문에 가려졌던 진실이 한 가지 드러난다.

마계의 지배력을 탈환하고자 마왕이 짠 계략에, 셀레네와 클레멘츠가 걸려들었다는 것.

특히 갓난아기에 불과했던 클레멘츠는 피해자라는 점이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확실히 몰랐던 부분이네…….”

의도한 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클레멘츠 전하께 좀 너무했던 거 아닌가? 그분이 잘못했던 건 없는 거잖아.”

많지는 않았지만, 대번에 상당히 우호적으로 변한 이들도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다들 아시는 사실이지만, 초대 황제이신 유스티온 폐하께서도 악마를 봉인하거나 소환하며 자유롭게 다루셨습니다.”

“…….”

초대 황제를 언급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효과적이다.

“하지만 유스티온 폐하께서 악마를 부린 것은 이 땅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이용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목적과 마음가짐으로 이용했느냐가 아니겠는가?

저들끼리 수런거리던 청중들은 어느새 진지한 기색으로 듣고 있었다.

“후손의 후손인 우리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켜 낸 나라입니다. 만일 황족의 혈통 때문에 우리의 황태자 전하께서 마계의 표적이 되셨다면….”

“…….”

“끔찍한 마음에 꺼릴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지키고 맞서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 클레멘츠와 마계의 관련성을 아예 밝혀 버리자는 내 전략은 벌써 효과를 보고 있었다.

연설에 앞서 이미 신문 기사를 통해 같은 내용을 퍼뜨렸다. 일전에 ‘황가의 마스코트’ 보도로 큰 이익을 보았던 연맹일보사가 적극적으로 돕고 싶단 의사를 표해 왔다.

어느덧 냄비 받침 취급에서 벗어나 어엿한 주류 신문사가 된 그들은 큰 힘이 되었다.

어딘가 석연찮았던 클레멘츠의 파문과 추방이,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억울한 일’로 변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황실이 합심해 씌워 둔 이미지가 뒤집히고, 명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문제는 정작 클레멘츠 본인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였지만.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힘을 합치고, 여러 일에 착실히 실마리를 보이고 있건만.

추방이 결정된 이후 홀연히 떠난 클레멘츠가 어디를 향했는지는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집에 가 있는 동안 카시스는 이 문제 때문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전하의 행방을 추적해 보았습니다만….”

카시스가 건넨 것은 제국의 서쪽 끝, 혼우드 땅의 지도였다.

“영지민의 목격담을 종합해 모나한 백작이 올린 보고입니다.”

“벨라가요…?”

보라색으로 표시된 클레멘츠의 행적은 안개의 숲 근처에서 끊겨 있었다.

혼우드, 그리고 안개의 숲. 아마도 카시스와 나는 같은 공간을 떠올렸으리라.

‘마계.’

아무리 현왕의 후손이자 마계의 왕자라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를 험한 곳에 가 있을 그가 너무도 걱정되었다.

인간들의 세계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클레멘츠는 결국 마계로 가길 택하고 만 걸까?

아니면, 모든 일의 원흉인 마왕과 대면하러 단신으로 떠나 버린 걸까?

뭐가 됐든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 * *

황궁에 위치한 대회의실.

커다란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은 서로 맞은편에 앉은 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에 앉은 이들의 대표자는 카시스 듀프레.

반대쪽은 조슈아 페리윙클이었다.

“그래서….”

조슈아 페리윙클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마계까지 개입된 위험천만한 일에 제국 전체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카시스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오필리어가 제안한 발표와 보도로, 여론은 꾸준히 반전되고 있었다.

‘황자가 마계에 잡혀 있는 상황에 대해, 제국은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내심 클레멘츠를 지지하지만 교회와 황실의 눈치를 보며 갈팡질팡하던 이들도 슬그머니 다시 모여들 정도였다.

카시스를 비롯한 클레멘츠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국군이라도 동원하여, 마계로 나아가서라도 클레멘츠 황자님을 되찾아야 합니다.”

“허.”

“그분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페리윙클 공작께서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되찾지 않으면, 그때야말로 제국은 마계가 일으킨 혼돈에 집어 삼켜질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페리윙클의 마법사들이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텐데.”

다시금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 그 문제를 정하려고 다들 귀한 시간 내서 모인 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주의를 환기했다.

클레멘츠 파가 소집한 의회였다. 귀족 과반수 이상의 동의가 모이면, 황제에게 올리는 성명서가 완성되었다.

베일리스 후작은 당연히도 페리윙클 공작 옆에 굳건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기는 무척 불편했다.

“카밀. 대체 네가 왜 거기 앉아 있는 게냐?”

맞은편에 있는 외동딸의 존재 때문이었다.

“어차피 베일리스 가의 가주는 나다. 가주가 아닌 이는 의회에서 의견을 내지 못해. 당장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

아비가 기껏 황태자비를 시켜주겠다고 힘써 놨는데, 다 된 밥에 재 뿌리고 집을 나가선 이제 귀족 의회 맞은편 자리에 있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딸자식 때문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군.’

“제가 왜요, 아버지? 저는 베일리스가 아니라, 스타테일의 가주로서 여기 있는 건데요.”

“뭐라?”

베일리스 후작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카밀의 어머니, 록사나 스타테일은 스타테일 가의 마지막 직계였다.

그녀가 후작과 혼인한 뒤, 스타테일 가문의 계승권은 그녀의 유일한 친자식인 카밀에게 내려왔다.

3대 귀족가인 베일리스의 영애라는 후광에 가려져 있었지만, 카밀은 스타테일 가의 가주이기도 했다.

“하. 그래도 소용없어. 성명서는 폐하께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과반수를 넘기지 못한다. 테이블의 양쪽에 앉은 귀족의 수는 공교롭게도 정확히 반반이었다.

그때, 뒤늦게 누군가 회의장 문을 열고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평균보다 작은 키와 긴 은발. 적포도주색의 달마티카.

아나스타시아 디 샹그리아가 생긋 미소 지었다.

“의회가 소집된 건 알았지만, 영지에 계신 어머니께서 위독하시어 참여가 늦었습니다.”

소녀의 목에 걸려 있는 건 가주의 인장이었다.

*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기까지, 황실 역시 평온하지는 않았다.

“황태자.”

클라우디아가 아들의 궁에 들어섰다. 금장을 단 바닷빛 치맛자락이 문턱을 스쳤다.

분명 안에 계시단 시종의 말을 들었는데, 넓은 방 안엔 인기척이 없었다.

“메디프?”

클라우디아는 눈가에 배었던 웃음기를 지웠다.

아들이 곧잘 쓰던 책상 위에 덩그러니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에 든 건 편지였다.

[……그동안 휘둘려 드린 것으로 충분하다 느낍니다. 이제는…]

아들 녀석답지 않게 담담한 어조. 줄을 맞춰 써 내려간 정갈한 필체.

구구절절한 과거의 심정. 그리곤 영영 이별을 고하는 내용.

“후훗. 녀석….”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기분이 좋았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깜찍한 짓을 하는 아들의 일탈쯤, 한 번은 눈감아줄 수 있었다.

“중요한 시기라는 걸 기억하면 좋을 텐데.”

다음날. 황태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줄을 대어 둔 외국 왕족과의 면담 자리에 메디프가 기어이 나타나지 않은 다음에야, 황비는 분노에 싸여 날뛰었다.

“그놈을 찾아와!”

푸른 유리 장식품들이 연달아 쨍그랑 깨져나갔다.

“이 쓸모없는 놈들! 황태자가 가출했는데 어떻게 그걸 몰라? 페리윙클의 마법사들은 다 풀어라. 황궁의 기사들도! 가능한 인력은 죄다 동원하란 말이다!”

명령대로 사람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메디프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이럴 리 없어. 이럴 리 없어…”

클라우디아는 방 안을 배회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클레멘츠의 지지자 놈들이 그 애를 꾀어낸 거야. 은근히 정에 약하다는 걸 알고! 그 간교한 놈들에게 카밀마저 넘어갔다지? 하!”

그녀가 명했다.

“여봐라, 당장 듀프레 후작의 집을 압수 수색하라!”

“황비 전하…!”

하지만 비서관은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황실의 힘이 강하더라도 근거 없이 제국 3대 가문의 저택을 수색하기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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