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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88)화 (188/218)

188화

“가엾은 내 오필리어, 그새 반쪽이 되었구나! 어쩌면 좋니?”

맹렬히 돌진해 온 성인 여성의 무게가 내 위에 얹어졌다.

“미안해! 기껏 네가 날 찾아 줬는데, 내가 연락을 받지 못해서… 그 바람에 네가 갇혀 버렸어.”

“아니야! 나도…… 걱정 끼쳐서 미안해. 카밀.”

카밀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자니 그녀가 분개하며 뇌까렸다.

“메디프 그 인간, 너를 이따위 춥고 더러운 곳에 가두고 방치하다니!”

이어서 감방 구석구석을 돌아본 카밀은, 나의 연약함과 섬세함에 비해 메디프가 얼마나 무신경했으며, 꼴에 갖다 준다고 가져다 놓은 물품들은 얼마나 엉성하고 후진지에 대해 대단히 효율적으로 비난했다.

“잠깐만, 카밀.”

직접 만나 보니 카밀은 여전히 내가 알던 그 친구였다.

안도감이 들면서도, 이번엔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너는 메디프와 약혼했잖아. 여기로 날 만나러 오는 걸 다들 좋아하지 않을 텐데.”

순식간에 카밀의 표정이 썩었다.

“…절대로 그 인간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 내 말 믿지?”

“역시 그렇구나! 다, 다행이긴 한데…”

이어지는 카밀의 눈물 나는 감금 스토리를 들었다. 갇힌 끝에 억지 약혼이라니. 새삼 그녀도 로판의 등장인물이라는 게 느껴졌다.

베일리스 후작, 대체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러는지…

“그래서 말이야. 나, 집을 나왔어.”

“……!”

“그래야만 널 지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카밀은 망토 속에 숨겼던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짤그랑대는 보석과 묵직한 금화가 희미한 빛 속에서도 번쩍번쩍했다.

귀족파 수장의 금지옥엽. 베일리스 후작가를 든든한 배경 삼아 휘두르던 악녀 카밀이, 스스로 집을 나오다니.

그것도 날 위해서?

수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 오필리어.”

카밀은 내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본인도 집안의 이익문제로 감금에다 강제 약혼까지 당했으면서, 녹색 눈 안에 담긴 건 오로지 나를 향한 걱정뿐이었다.

“너는 황태자… 클레멘츠 1황자를 믿고 따라갔지. 고민도 숱하게 하고 고생도 많았을 거야. 그러니 이제 나와 같이 지내자.”

“카밀…….”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그러당겨 쥐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같이 여행을 떠나자. 나는 동물을 연구하고, 너는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 먹고.”

개과천선했다가 약혼에서 탈주한 악녀 언니와 맛집 기행 다니며 유유자적 살기. 빙의 인생으로 꽤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

하지만 나는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사람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역시 너는, 그렇게는 안 되는구나.”

카밀은 표정만 보고도 내 대답을 읽은 모양이었다. 조금 슬픈 미소가 그녀의 입술에 그려졌다.

나는 클레멘츠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 복잡한 수도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카밀과 클레멘츠 사이에서 클레멘츠를 선택해 왔다. 병아리를 향한 유난스러운 애정에서 시작했다곤 해도 카밀의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내 대답이 실망스럽더라도 그녀는 나를 존중해 주었다.

“그래.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 마음…. 네가 가르쳐주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간절한지 알고 있으니까, 그런 너의 사랑을 도울게.”

그렇게 말하는 카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따스해 보였다.

“어쨌든 좋으니 나가자. 단 1분 1초라도 너를 이곳에 더 놔둘 순 없어.”

“그렇지만 어떻게…?”

메디프는 때가 되면 오래지 않아 풀려날 거라고 했지, 지금 풀려날 거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제법 억센 힘으로 날 끌어당기는 카밀을 따라 나오자, 감방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던 간수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래?

눈으로 묻자, 카밀은 다 방법이 있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보석금을 냈는데도 폐하의 허가가 필요하다느니 버티길래 간수장을 협박했어!”

“……!”

가끔 보면 카밀이 정말 백화한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카밀과 함께 감옥을 빠져나왔다. 황궁의 쪽문으로 나와 달려가는데, 저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다시 잡으러 온 건가? 메디프인가? 베일리스 후작? 설마 황제?

뜻밖에도, 아른대는 불빛에 나타난 모습은 카시스였다.

“듀프레 후작님…?”

“오필리어님.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이제야 나타나서는 무슨 볼일이죠, 카시스 듀프레?”

대답하려고 하는데 카밀이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섰다. 아니… 얘는 이제 내 앞을 막아서는 게 버릇이 된 것 같다.

나를 향하던 부드러운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이 섰다.

카시스는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급변한지라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오필리어 님을 찾아 보필하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겠지. 나는 옛 샹그리아 저택에서 바로 혼우드에 있는 집으로 이동되었으니까.

유폐 이후 클레멘츠는 측근들과 모든 연락이 끊어졌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 행방이 묘연했을 것이다.

사위가 아직 어두웠다. 카시스 옆에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마차가 있었다. 카밀의 녹색 눈이 경계심을 한껏 담아 날카로워졌다.

그때 마차의 창문이 열리고, 온화한 얼굴이 드러났다.

“오필리어 님.”

“……!”

“어서 타시지요.”

글로리나 부인이었다.

“나 혼자 오필리어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제일 큰 도움이…….”

글로리나 부인까지 나타나니 더는 의심할 수 없는지, 카밀은 내키지 않는단 얼굴로 함께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한 명이 돕는 것보단 어쨌든 여러 사람인 편이 낫겠지…. 그래. 오필리어를 위해서는…….”

구석에서 꿍얼거리는 그녀를 태우고, 마차는 으리으리한 건물에 도달했다.

듀프레 후작 저택이었다.

“레이디들께선 당분간 여기서 지내시는 게 어떻습니까.”

“누가 도움이 필요하대요? 됐거든요.”

예의 바르게 권유하는 카시스와, 앙칼지게 거절하는 가출 소녀 카밀.

그들을 일별하며 집사의 안내를 따라가자, 응접실에 낯익은 얼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글로리나 부인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 앉은 엔시가 날 향해 손 인사를 했다.

또, 클레멘츠가 가져다주는 이익 덕분에 그를 지지하던 수도 귀족들.

전통적으로 적장자에게 충성을 바쳐 온, 듀프레 후작 휘하의 동부 귀족들.

소수지만 그와 이런저런 논의를 주고받던 상인들도 있었다.

“황실도 교회도 한순간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이야….”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클레멘츠의 몰락은 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자신과 가문의 미래를 걸었다.

이제 와서 페리윙클과 메디프의 편에 줄을 대려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클레멘츠를 복권시키거나, 적어도 파문이라도 무효화하는 게 그들의 살길이었다.

하지만 역시 황실과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기는 어려운 일인지. 드문드문 빈자리가 꽤 보였다.

“황실의 태도가 강경합니다. 어떻게 대처할지 저희끼리라도 확실히 의견을 모으는 게 좋겠습니다.”

카시스는 클레멘츠파의 수장답게 그들의 의견을 비평하고 취합했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제 생각을 말해 봐도 괜찮을까요?”

고민하다가 입을 열자, 역시 그들 중 일부는 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잘만 해나가고 있던 황태자가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계기는 나에게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내게도 이 상황을 해결할 책임이 있었다.

* * *

2황자의 궁.

이제 새 황태자의 처소가 되었지만, 예전과 큰 차이는 없었다.

굳이 꼽자면 황궁과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마법사의 탑이 폐쇄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메디프는 서재에 앉아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어머니께서… 카트레프티스를 망치려고 하셨단 말이지.’

그를 회유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치부하기엔, 참으로 그럴싸했다.

실제로 여름 무도회 날, 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마탑의 선물에 손을 댄 게 아닐까 싶어 확인하러 가지 않았었나.

‘거기선 망가진 거울 대신 숨어든 병아리 아가씨를 발견했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마탑을 추억할 유일한 물건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마탑을.

“정말…… 그런가.”

그는 신음하듯 속삭이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페리윙클의 피를 받았다면 마법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처음 마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그 말이었다. 실제로 이 혈통엔 적성도 재능도 넘치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마법을 사랑하게 만들어 놓곤 그에게서 앗아갔다.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무력하게 끌려다녔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건가?

황명으로 마탑 생활을 청산해야 했을 때도, ‘다 널 위해서’란 미명 하에 혐오스러운 악행을 방조했을 때도.

“단지 내가 원한다는 이유로 저항할 수 있었나?”

어쩌면 오필리어가 맞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엄마 말 한 번 지독하게 안 들어 보지 않을래요?”

확신에 차 있던 금안이 떠올랐다. 메디프의 안에서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누르고 눌러 왔던 반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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