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뭘 처연한 척이야? 한 대 때려도 되나?
“오필리어. 당신 정말 위험했다고요. 그 자리에서 폐하께 얼마나 많은 말을 더하려고 했나요?”
“그쯤에서 그만하려고 하긴 했는데요.”
흐음.
생각해 보면, 황제가 정말로 내게 화가 났다면 어떤 후환이 벌어졌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메디프가 오히려 적당할 때 끼어들어서, 감옥에 좀 갇히고 말았던 걸 수도.
“험한 데 가둬서 미안해요. 황제 폐하를 달래느라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역시.
이렇게 조금씩 잘해 주려고 하는 모습이 더욱 의뭉스럽고 아니꼬웠다.
황궁에 인질로 붙잡혀 있을 때도 메디프는 이런 태도였다.
“사연 있는 척은 그만 하세요. 전하.”
“…….”
그간의 정을 봐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마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메디프는 황비의 아들로서 지금 상황의 수혜자였다. 실제로 클레멘츠를 밀어내고 황태자가 되었고, 이대로라면 황제도 될 수 있겠지.
“황비의 악행을 묵인하고, 심지어 동조하기도 하셨잖아요.”
클레멘츠에게 해를 끼치는 걸 훤히 봤는데. 이런 애매한 태도론 반감만 부추길 뿐이었다.
그래 놓고선 은근히 슬프다는 표정이나 짓고.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혼자 슬픈데요? 전하께서 선택하고 결정하신 일 아닌가요?”
“오필리어. 나는….”
“왜요, 마음 같아선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사정이 그렇지 않았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뭐라고요? ……하!”
메디프는 발끈했다. 그가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이미 황제 앞에서도 설칠 만큼 겁을 상실해 있었다.
“그건… 어떻게 당신이….”
중얼거리던 메디프는 어느 순간 충격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맞는 말이겠네요. 당신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만해요. 하지만 저는…….”
또다시 입을 벙긋거리던 메디프는 좁은 감방 안을 몇 바퀴 서성거렸다.
“그러니까, 당신을 지키려던 건데.”
“허어?”
“…….”
이내 메디프는 감옥 귀퉁이에 주저앉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 한다는 말이…뭐라고?
기운이 빠지는 느낌에 그대로 그를 쫓아내고 싶었다. 한숨이라도 쉬듯 입을 열었다.
“하아…… 대체 왜요?”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청보랏빛 눈이 나를 처량하게 올려다보았다. 순간 저 하늘빛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주먹을 지그시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황비든 페리윙클 가문 사람들이든, 전하를 황위에 앉히려고 애쓰는 건 당연한 거죠. 전하께선 그들을 지켜보고 묵인하는 게 이득이고요.”
“…….”
“그런데 왜 저를 지키고 싶으셨는데요?”
“제 진심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하면, 그게 당신에겐 또 하나의 기만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역시 메디프를 때리기로 했다.
딱!
“으악!”
은밀히 감춰 뒀던 꿀밤을 그대로 내지르니, 메디프는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머리를 감싸며 움츠러들었다.
“당신 정말 겁도 없군요. 감히 저를….”
“황태자를 때린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거든요.”
“대단하네요.”
맥없이 웃는 그의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아, 내내 마음속에 있던 짐작을 툭 던졌다.
“형님을 좋아해요?”
“……아니요?”
메디프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
부정하는 말투에서는 체념과 원망이 느껴졌다.
좋아했네.
하지만 나는 더 캐내지 않기로 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른 황족 형제끼리 뭔가 사연이 있었겠지.
“그리고 저도 좋아하고요?”
“아뇨?! 큰일 날 소릴 하시네. 물론 당신이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는 건 인정해요, 오필리어. 그렇지만 저는 이미….”
“아, 네.”
보아하니 메디프는 오늘 상태가 안 좋았다. 자긴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얘기까지 하려다가 입을 닫은 것 같은데.
누굴 좋아하지? 역시 벨라려나.
“그래요. 오필리어. 저에겐 당신들에 대한 적의가 없어요.”
가만히 고백하는 메디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나직했다.
“하지만 그럼 무슨 의미가 있죠? 어차피 저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걸요. 실제로 제 행동을 결정하는 건 첫째로 어머니, 둘째로 황제 폐하의 뜻이에요.”
“…….”
“그 다음은 어머니를 지지하는 친척들과 다른 귀족들의 뜻이겠지. ‘메디프가 뭘 바라는가’의 우선순위는 저 아래에 있어요.”
한없이 보온이 안 되는 지하 감옥에 쌩쌩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내 금빛 눈동자와 메디프의 자안이 한동안 또랑또랑하게 마주쳤다.
“아악!!”
나는 또 예고 없이 메디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뜻대로 할 수 없긴 뭐가 없어요? 손이 묶였어요? 발이 묶였어요? 다 큰 성인이 왜 자기 행동을 남이 결정하게 두는 거예요?”
“그, 그만 하세요! 오필리어! 아악!”
허억.
메디프의 괴로운 신음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물렸다.
나에게 이런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을 줄이야.
“당신은 몰라요. 이 황궁에서, 그리고 페리윙클 가문 사람을 가족으로 두고 태어난 사람의 인생이 어떤지.”
“흐음…….”
“형님도, 카밀 드 베일리스도, 모두 마찬가지예요. 차라리 당신처럼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사람은 소속된 가문이나 집단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따질 책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최종적인 권리도 자신에게 있다.
듣자 하니 메디프는 아주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의 결정에 휩쓸리며 살아온 것 같았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쌓이고 쌓인 것 같은데. 조금 처량……하긴 개뿔.
“악!!”
똑똑한 머리라 그런지 타격감이 제법 좋았다.
“물론 제가 잘못했지만… 이제 그만 하시면 안 될까요?”
벽에 붙은 횃불의 빛에, 청보랏빛 눈 가득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보였다.
그 말이 맞다. 무슨 일이건 폭력을 통해 해결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첫째로 황비, 둘째로 황제 폐하라고요.”
인자하게 웃어 보이는 내게 경계의 눈빛이 쏟아졌다.
“두 분께선 언젠가 돌아가실 텐데, 그날이 오면 전하께선 자유로워지나요?”
“…….”
“아니, 그래도 온전히 자유로워지시는 건 아니군요. 전하를 지지하는 귀족들, 또 지지하지 않는 귀족들의 의견도 고려하셔야겠죠. 귀족들뿐인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면 평민들의 뜻에도 따르셔야 할 텐데.”
살짝 드러난 메디프의 하늘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전하의 결단을 대신 해주겠네요. 전하 자신만 빼놓고요.”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마저 묻고 싶었다. 그게 과연 당신의 인생이 맞느냐고.
메디프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내 말엔 공감하되 이미 고착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헤매는 것 같았다.
“메디프 블레시드 황자님.”
“…오필리어.”
“무서운 분들인 거 알아요. 실망시키기 두려우시죠? 하지만 처음이 어려운 거예요.”
이렇게까지 넘어왔는데, 내가 해야 할 바는 명백했다.
“의외로 엄청난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진 않을걸요? 황족 신분 좋은 게 뭐겠어요. 그러니까….”
이러는 편이 메디프에게도 좋은 일이리라.
“이번 기회에 엄마 말 한 번 지독하게 안 들어보지 않을래요?”
클레멘츠를 닮지 않은 듯 닮은 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에 쐐기를 박듯,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황자님께서 마탑에서 가져오신 그 거울이요.”
“네…?”
“고귀하신 황비 전하께서 그 덮개를 반사 마법을 건 덮개로 바꿔치기하려고 하셨지 뭐예요. 그거 사수하느라 제가 고생 좀 했는데.”
“……!”
흔들리던 무언가가 급기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렇지 못했으면 아마, 다시는 카트레프티스를 쓸 수 없게 되었을 거예요.”
메디프가 나간 뒤. 그가 들여다 준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영락없이 감옥에서 하룻밤은 지내야겠단 생각에 모포를 깔고 있는데, 갑자기 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필리어. 오필리어…!”
창살에 융화될 듯 바싹 붙은 누군가가 속삭였다.
이내 철컹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문을 따고 들어왔다.
길고 풍성한 백금발이 횃불의 날카로운 빛과 흑암 사이에서 강한 대비를 이루었다.
카밀이었다.
“뭐라고? 지금…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버지?”
“오필리어 레오라가 제 발로 수도에 올라왔다고 했다. 내가 직접 황궁으로 압송시켰고, 이젠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더군.”
“대체 어떻게…!”
아비의 말을 들은 카밀은 분개했다.
“오필리어는 원래 저를 만나려 했다면서요, 아버지! 어떻게 남의 약속을 중간에 가로채고, 거기에 제 친구가 갇히도록 일조하실 수 있죠? 그게 아버지께서 내내 강조하시던 귀족 정신인가요?”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카밀!”
후작은 오히려 제 딸이 답답하여 가슴을 내리쳐댔다.
“메디프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실 게야. 너를 그분 곁에 앉히려고 내가 얼마나 했는지는 아느냐?”
“아, 절 가둬 놓은 사이 진행하신 정치공작 말씀이시죠?”
“이 철없는 것! 황비 마마께서 널 총애하실 때 제대로 처신하란 말이다. 그냥 뒀다면 또 그 병아리 녀석을 싸고돌 것 같아 내 미리 처리한 것뿐이야!”
“하….”
카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평생 등 뒤에 두고 휘둘렀던 베일리스라는 이름이 이제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당연히 이렇게 살 마음은 없었다. 메디프와 결혼할 생각도, 갇힌 오필리어를 모른 체할 생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