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베일리스 후작으로부터 네가 나타났단 얘길 들었을 땐 긴가민가했다만….”
황제의 집무실.
후작에게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황제는 결박된 날 보며 비아냥거렸다.
“……클라티아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오필리어 레오라. 교단의 정식 처분이 있기 전 사라졌다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살 마음이 들었나 했더니만.”
무릎이 꿇려진 상태로 보니 훨씬 당당하고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수도에 나타나다니. 그새 생각을 바꿔 먹었나? 과연 얼마나 방자하게 굴 셈이었는지 궁금하군그래.”
“…….”
“아직도 신수의 후광과 네 인기를 믿는 거냐? 아니면 이미 파문된 클레멘츠를 다시 데려와 황태자로 삼으라 조르기라도 할 셈이냐?”
코넬리우스 황제는 내가 황태자비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화가 난 목소리로 나를 윽박지르는데, 듣고 있자니 나도 화가 났다.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다, 황제가 자기 자식의 일을 똑바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않는지, 일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잘못을 찾는 모습이 정말 짜증 났다.
“말씀하신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그보다도 먼저 황제 폐하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어차피 잡혀 온 처지에 뭐가 아쉽겠어?
막말로 나라의 상징인 아다만티스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나는 최대한 예의 있게 할 말을 다 하기로 했다.
“폐하께서는, 클레멘츠 전하께서 어떻게 태어나셨는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지, 그에 의해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도요.”
“오필리어 레오라! 네가 감히 황실의 일에 말을 얹느냐?”
그렇다. 나는 황가의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다.
방금도 말했지만, 진작 누군가는 해야 했을 말인데 고귀하신 분들은 안 하고 있어서다.
“그렇다면 태어나던 당시 무슨 일이 있었든, 거기에 그분의 책임은 없었다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뭐라?”
“안 그런가요? 클레멘츠 전하를 이용해 마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술책을 부린 건, 마왕입니다. 백번 양보해 셀레네 전 황후 폐하께 책임이 있다 해도, 두 분 모두 피해자입니다.”
말하다가 격해지지 않도록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한편 빨리 할 말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입을 열수록, 황제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클라티아의 황태자는 그저 개인으로 대표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 제국의 미래지요. 그런데 자리에 어울리는 의무를 지도록 성장 단계에서부터 숨 막히는 강요를 해 놓고.”
“…….”
“마계의 왕이 그분을 노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을 그분 개인에게 떠넘기셨습니다.”
“너!”
“마왕이 엮인 일이야말로 클레멘츠 전하가 태어나시기도 전부터, 그분이 클라티아의 황태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도요.”
황제가 벌떡 일어나며, 육중한 의자가 돌바닥에 요란하게 끌렸다.
“권리와 책임의 저울이 맞지 않습니다. 그건 누구에게라도 부당합니다.”
“짐이 언제까지나 너를 봐줄 것으로 생각하느냐? 아직도 병아리의 몸으로 짐을 눈속임하는 줄 아느냐?”
“…….”
“너의 부친이라면 짐 앞에서 감히 황실에 대해 떠드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너로 인해 부모가 불명예를 뒤집어써도 상관없느냐?”
부모님이 언급되자, 안 그래도 콩닥거리던 심장이 더욱 두근거렸다.
그래. 왜 이렇게 나오지 않겠는가? 누군가 눈 밖에 나면 가문까지 엮어서 불이익을 줘 버리는 게 황제의 권력인걸.
다른 누구도 이 모순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겠지. 자신이야 둘째 치고 가족이 소중하니까.
불과 며칠 전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이제 괜찮아.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다.”
답답하셨을 텐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날 보듬어 주던 분들이셨다. 내가 함부로 행동해서 그분들에게까지 피해가 간다면 그만큼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 어딨을까.
하지만 레오라 가문은 과거에 혼우드에 난무하는 마물들로부터 사람들을 지켰던 가문이다.
작고 가난해졌어도 귀족의 긍지는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만약 클레멘츠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나는 황궁에까지 찾아와 권리와 책임의 추 운운하진 않았으리라.
물론, 클레멘츠를 만나기 전의 나라면 헛소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먼 수도의 정세 얘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우리끼리만 조용히 잘 살면 된다고 했겠지.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좋았다.
나를 억지로 혼우드로 돌려보내던 클레멘츠의 얼굴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다른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제 생각이 바뀌진 않습니다.”
생각이 정리되자 더더욱 화가 났다.
부모로 완전 낙제점인 황제가 내 입을 막으려고 부모를 거론하다니. 정말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보다.
“지금까지 저는 클레멘츠 전하의 연인이나 신수가 아니라, 레오라 가문의 오필리어로서 말씀드렸습니다.”
“허!”
“그리고….”
이제야말로 입을 좀 다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황제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바로 서른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엔 근위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광이 나도록 닦여 있었고, 황제의 말 한마디면 움직일 것이다.
그렇지만 클레멘츠가 나에게 그랬듯이, 사랑한다는 건 이따금 걷잡을 수 없이 망한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지금은 에반젤린과 토마스의 딸 오필리어로서 말씀드립니다. 폐하께선, 아버지로서 그분을 지킬 생각이 있으셨습니까?”
“……!”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쯤에서 멈춰야 하겠지.
그러나 이 순간 황제의 표정을 보니, 샹그리아 저택에서부터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이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셀레네 황후께선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모든 걸 다해 아들을 지키셨는데요.”
“네가! 감히 네가 그 사람을 입에 올려?”
“세간에는 폐하께서 셀레네 님을 사랑하셨다는 말이 우세합니다만…”
“닥쳐라, 오필리어 레오라!!”
우렁찬 노성에 나는 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더 이상 내 말을 듣고 있을 만한 관용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폐하!”
그때 기세 좋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난입했다.
메디프였다. 황태자의 제복을 입고 있으니 좀 신수가 훤하군.
그는 황제와 근위병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있는 날 번갈아 보더니 뭔가 안도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이냐, 메디프.”
“오필리어 레오라가 잡혀 왔단 소식을 듣고 달려왔지요. 요주의 인물이 아닙니까.”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메디프는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았다.
“보나 마나 처지를 잊고 멋대로 입을 놀린 모양이군요. 이쯤이면 됐습니다. 더 이상 그녀가 성심을 어지럽히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네요.”
……?
“근위병!”
아비인 황제를 진정시킨 메디프가 소리쳤다.
그래도 이제 황태자라고 제법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예. 황태자 전하.”
“저 무엄한 불청객을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시죠.”
“전하! 어떻게 저에게 끝까지 이러실 수가 있어요?!”
나는 끌려가며 소리쳤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험난한 빙의 인생.
벨라의 시녀가 됐을 때만 해도, 아주 잘못하면 벨라가 감옥 가는 엔딩일 수도 있겠단 각오는 했지만.
정작 내가 황궁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춥네…….”
다행스럽게도 망토를 입고 갇히긴 했으나, 사방이 돌로 된 감방엔 모포 한 장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한가.
이 와중에 피로는 쌓여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잠깐 눈을 붙였다.
가물가물한 눈을 뜨니 몸은 얼음장 같았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다소간 험한 일은 각오했어도, 가장 큰 권한을 가지고 모든 일을 방조한 황제에게 할 말은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바른말을 해서 그의 태도를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던 건 너무 야무진 꿈이었던 걸까?
바르르 떨리는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오셔서 보석금을 내고 날 데려가려나.
적어도 형식적인 예의는 차렸으니 하극상이나 황실 모독죄로 집행되진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잘한 죄목을 갖다 붙일 수는 있어도…….
“설마 그렇게 쪼잔하겠어.”
그래도 명색이 대제국의 황제고 내 남자친구의 아버진데 마음을 크게 쓰셔야지.
쉬기 위해 돌바닥에 앉는 것과 눕는 것, 어느 쪽이 저체온증이 올 확률이 더 낮을 것인가 재어 보고 있을 때였다.
“지낼 만한가 봐요?”
어딘가 혈압 오르는 이 저음. 메디프였다.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엔 왜 오셨어요?”
“그건 이쪽이 할 말인데.”
문이 열리고, 메디프가 양옆에 달고 온 간수들이 모포와 음식을 방 안에 한가득 쌓았다.
이후, 메디프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그들을 내보냈다. 권력이 좋긴 하구나.
“클랏샤를 떠난 줄 알았어요. 잘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고고하신 아다만티스께서 진창 같은 수도에 다시 돌아오신 이유가 뭐죠? 이런 꼴을 보려고?”
듣자 하니 마치 나를 위한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꼴같잖았다.
“황자님. 저를 이런 곳으로 쳐넣은 게 바로 당신이잖아요.”
내 입술 보라색 된 거 안 보이냐고. 거울은 안 봤지만 익히 예상이 되는 바였다.
“그건….”
메디프는 청보라색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더니 한숨까지 폭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