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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85)화 (185/218)

185화


전의를 잃고 아득히 빗나가 버린 사고는 평소라면 고려할 일 없는 메디프의 입장까지 살피기에 이르렀다.

‘저놈은 내게 감히 왜 저러는가’에 대한 답안은 금세 나왔다.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저는 마음에 둔 여자가 있어요. 그러니 영애와의 결혼을 내가 반길 거란 착각은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네요.”

평소였다면 ‘얼씨구. 나도 마음에 둔 병아리가 있어요.’ 따위로 대답했겠지만, 이왕 함량 미달의 입장에서 헤아려본바. 조금 더 캐 보기로 했다.

대체 2황자 주제에 누굴?

얼토당토않으나, 놀랍게도 추리기 시작하니 후보는 하나로 좁혀졌다.

“벨라루시아 모나한?”

“……?”

“……허.”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던 메디프가 갑자기 여러 귀족 영애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때와, 그 즈음하여 자주 부딪치던 사람을 떠올려 보면 답이 나왔다.

이리 빤한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라니.

‘역시 한심하군.’

카밀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 여자가 오필리어를 누구보다 아낀다는 것쯤은 아시겠죠? 2황자님 탓에 오필리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모나한 백작이 잘도 황자님께 좋은 인상을 느끼겠네요.”

“…….”

‘형제 관계는 그렇다 쳐도 오필리어와 친하게 지내 놓고, 당신이 사람이냐’라고 추가 공격을 날리려던 카밀은 멈칫했다.

메디프는 그 말에 정말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다.

“당신 말이 다 옳아요. 카밀 드 베일리스.”

“…….”

“그리고 지금으로선 당신과 과연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어요. 어른들 눈치를 봐서 적당한 기회에 파혼했으면 좋겠군요.”

그 부분은 카밀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럼 이만 피곤하다는 핑계로 거처로 돌아가 볼까 하는데요.”

“마침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빨리 집이나 가 버리라고 말하는 메디프의 얼굴은 그 즈음해서 정말로 지쳐 보였다.

카밀은 둘 사이가 온전히 멀어지기 전에 뒤돌아서 물었다.

“아, 한 가지는 대답해 주셔야겠는데요.”

갇혀 있는 동안 일어났던 이야길 들어보면 아주 가관이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상처받고, 고생했을지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지고 절로 이가 갈렸다.

그러나 클랏샤 어디에서도 그 아일 찾을 수 없었다.

“오필리어는 지금 어디 있죠?”

풍문 속에서도 오필리어의 행방은 황태자와 함께 샹그리아 저택을 나온 순간 묘연해졌다.

* * *

“지난날 황실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을 잊고, 신과 백성들 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새 걸음을 딛고자 이에 다시 후계자를 정하노라.”

단상 위에 황제가, 아래에는 겨울옷을 덧입은 귀족들이 서 있었다.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는 메디프였다.

“황실의 선조들과 시미크의 뜻에 따라, 제2황자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을 새 황태자로 봉한다.”

주요 귀족들이 엄숙히 지켜보는 가운데, 황태자의 상징인 칼과 아다만티스가 새겨진 견장과 메달이 메디프에게 내려졌다.

다시 일어났을 때, 클라티아의 황태자는 이제 클레멘츠가 아닌 메디프였다.

“요즘은 황실 정세가 도대체 어떻게 될 모양인지 알 수가 없군.”

“그러게 말이야. 작년 이맘때만 해도 클레멘츠 전하야말로 황위를 이을 유일한 황자로 보였는데….”

“누가 아니랬어. 그런데 갑자기 제2황자 전하께서 황태자가 되다니.”

황궁의 정문 너머로 새 황태자의 탄생을 지켜보던 평민들이 속삭였다.

“베일리스 가문이 발이 빠르기는 해.”

“그토록 황태자비가 되고 싶어 하더니. 베일리스 영애도 드디어 소원을 이뤘군.”

황비의 옆자리. 별처럼 빛나는 티아라를 쓰고 도도한 모습을 뽐내는 카밀은 누가 봐도 황실이 내정한 황태자비 감이었다.

“새 황태자 전하께선 진지하게 학문을 연구하던 마법사시라던데. 황실과 나라의 일에 대해 잘 아실지 모르겠군.”

“이 사람아, 그건 편견이야. 황족들이 배우는 제왕학은 빠짐없이 익히셨다 들었네. 성격도 마법사 하면 생각나는 괴짜가 아니라, 훨씬 쾌활하시다 하고.”

“그래도 전의 황태자 전하께서 참 열심이시긴 했지. 레이디 오필리어와 함께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어.”

“…….”

전 황태자 클레멘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한 차례 긴장했다.

그들은 정문 양옆의 경비병을 살폈다가, 좀 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분이 이번에 수도 남쪽에도 황립 의료소를 여셔서, 우리 아버지가 지병을 치료받으실 수 있게 됐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학비를 지원하셨다더군. 시장 바닥에 보이는 어린 거지들이나 소매치기가 많이 줄어든 느낌이었소.”

“원거리 해양 무역은 정계 밖의 전문가들도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분위기가 조심스레 퍼져나갔다.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제 그분께선 안 계시니. 무역 사업이 언제 다시 개시될지 알 수가 없군. 나도 투자했는데 말야….”

그 말에 누군가 즉시 꼬투리를 잡고 들었다.

“지금 그러면 그분이 되돌아와 다시 저 자리에 앉길 바란다는 소리요? 황실 무서운 줄을 모르고…!”

“뭐?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참나, 당신이야말로 못하는 소리가 없네!”

무역 이야길 꺼낸 남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의식도 끝났겠다, 예민한 화제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졌다.

거의 대부분 흩어진 뒤에도, 망토를 쓴 작은 키의 여성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오필리어였다.

‘메디프가 황태자가 됐잖아…? 그리고 카밀은 황태자비라고?’

워프 포탈을 타고 수도에 올라와 보니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이곳까지 오기 전 사람들에게 물어 확인한 바로는, 클레멘츠는 파문 및 추방 처분을 당한 뒤 행적이 묘연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무작정 상경하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니, 사실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카밀을 만나봐야겠어.’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그녀가 소원대로 황태자비가 되었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과 달랐다.

오필리어가 알기로, 카밀이 원하는 건 더 이상 그런 게 아니었으니.

베일리스 후작 저택. 한 번 납치되었다가 발길을 끊었지만, 이곳을 향하는 길은 자연스럽게 기억났다.

“후작 영애를 만나고 싶어요.”

정문을 막고 있던 문지기는 코웃음을 쳤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입구컷이었다.

원래도 내가 대단한 귀족이 아니긴 했지만, 지금은 허름한 망토를 뒤집어쓴 수상한 사람이니 더더욱.

“카밀 님과 막역한 사이란 걸 보증하는 물건이 있어요. 이걸 전달하면 영애께서 분명 알아보실 테니, 아가씨의 하녀를 불러 주세요.”

“…흐음.”

이렇게까지 말해도 문지기는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말며 고민하기만 했다.

이해는 했다. 카밀은 사교계 유명인사이자 예비 황태자비였다. 어떻게든 만나 줄을 대기 위해 문간에서 개수작을 부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전속 하녀인 에밀리. 아니면 점심과 밤에 교대를 서는 줄리아나 로렌도 괜찮아요. 비교적 어리고 신입이지만 카밀이 예뻐하는 플로리라도. 혹은 유모이신 메이시스 부인이라도요.”

그제야 그의 표정이 변했다.

납치당했을 때 들어 둔 사용인들의 이름이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문지기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 전, 미리 가져온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쪽지와 함께 카밀이 강제로 사다 바쳤던 초록색 병아리용 보석이 들어 있었다.

“빠짐없이 전하지 않았다가 아가씨께 들키면, 과연 문지기님이 일자리를 보전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혹시 모르니 엄포까지 놓아둔 뒤에 후작 저택을 등졌다.

내 예상이 맞다면 카밀이 자발적으로 메디프의 비가 되겠다고 나섰을 리는 없었다.

원래도 2황자파에 가까웠던 베일리스 후작이 강요한 결과라고 하는 쪽이 더 아귀가 맞았다.

클레멘츠를 쫓아다니거나 병아리 애호가가 되는 것까진 딸을 아끼는 후작도 내버려 두었겠지만, 두 황자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카밀의 혼처를 정하는 일에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앞에서 분명 변했고, 내 친구가 되었던 카밀이 그렇게 갑자기 돌아섰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카밀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들을 늘어놓고서, 불가능한 것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점쳤다.

큰 결심을 하고 수도에 왔으니 뭔가 행동을 취해야 했다.

그러니 카시스와 카밀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황궁에 쳐들어가 클레멘츠의 복위를 청하고 싶었지만, 여러 모로 위험했다.

사람들에게 듣기로 카시스는 여전히 클레멘츠의 든든한 지지자로서 남은 세력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도 늘 친절했다. 샹그리아의 옛 저택에서 갑자기 고향 집으로 보내져 버렸으니 카시스도, 글로리나 부인과 메이드들도 걱정했을 것이다.

카시스를 만나보고 카밀의 생각도 확인하여, 가능하다면 힘을 모으고자 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의외의 상황이 나를 맞았다.

“레오라 남작영애.”

“…베일리스 후작님?”

곱게 늙은 얼굴에 험상궂은 표정을 띤 후작. 그의 뒤에 포진하고 있는 건 황궁 근위병들이었다.

“고귀하신 아다만티스께서 제 여식을 은밀히 만나고자 하셨다니. 영광이옵니다.”

젠장. 들켰구나.

“하지만 황제 폐하와 황비 마마께서 영애를 몹시 만나 뵙고 싶어 하실 터인데. 뒤싱겐 황가의 신하 된 도리로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근위병들이 내 양팔을 잡아챘다.

“잠깐만요! 대체 무슨 근거로 저를 마음대로 잡아가시는 거죠? 제국법에 이런 경우가 있나요?”

“의문이 있다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망할 아저씨. 자기 딸을 억지로 결혼시키려 들더니, 일단 황제에게 환심을 사려고 나까지 끌고 가는 거구나.

선두에 선 후작의 하얗게 센 뒤통수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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