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84)화 (184/218)

184화

“얘야, 괜찮아. 다 괜찮단다. 응?”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속이 타실 텐데도, 부모님은 날 달래기에 급급했다.

“으흑! 우리 딸… 마음고생 해서 어떡해?”

아버지는 결국 당신까지 울음을 터뜨리셨고.

“진정이 되면 천천히 말해 보렴. 무슨 일이 있었건 내가 다 해결해줄 수 있단다.”

어머니는 얼떨결에 아버지까지 달래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어릴 때와는 달리 이젠 황실마저 관련된, 딸이 가져온 문젯거리를 해결해줄 수 없단 걸 아시면서도.

결국 나는 다시 내 방에 돌아와 누웠다. 우선은 푹 쉬라는 부모님의 엄명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반나절이, 또 멍때리다가 자고 일어나면 한나절이 지나 있었다.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뛰쳐나가고 싶었다. 클레멘츠가 어떻게 나오든 그의 앞을 가로막거나 옆에 서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을 다해 청혼하고 비참하게 차였다. 마음의 꽃밭을 열어 보여줬는데 그는 사뿐히 즈려밟고는 그냥 떠나 버렸다.

괘씸한 인간. 평생 솔로로 지내라지.

세상에 버림받고, 연인에게도 스스로 버림받고. 알아서 해라. 마왕이 되든지 말든지.

그러다가 나 자신의 생각에 놀라고, 클레멘츠에게 다정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원망했다. 당연히 나를 포함해서.

‘그가 나를 거절했으니 어쩔 수 없어.’

과정이나 이유야 어찌 됐건 이미 결론이 내려진 관계였다.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 그렇게 됐다.

사실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다. 주연과 조연. 제국의 황태자와 변방의 하급귀족.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분에 넘치는 모든 것과 작별이었다. 이 편이 자연스러웠다.

생각을 마치니 멍한 기분이었다. 창밖으로는 동이 터오고 있었다.

남색이던 겨울 하늘이 붉게 물들고, 다음으로 온통 황금빛으로 채워졌다. 시린 색의 하늘 속에서 아침노을은 질 수 없다는 듯 길게도 불타며 일렁거렸다.

“…….”

생각도 잠도 잊은 채 창문에 붙어 있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을까.

나나 클레멘츠, 혹은 글로리나 부인이 뭔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일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순간에도 저들의 잘못 때문에 고통받은 이들을 내버려 둔 채, 얼굴을 잘만 들고 편안히 지냈다.

이건 올바른 끝이 아니었다. 큰 줄기가 있는 대로 비틀렸는데 그냥 덮다니. 소설이었다면 떡밥 회수를 반절도 못 한 형편없는 마무리라고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자 비로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필리어?! 벌써 일어났니? 아니, 어딜 가는 거야?”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짐까지 단출하게 챙긴 나를 어머니는 깜짝 놀라 쫓아오셨다.

“남주인공을 구하러…… 아니. 수도엘 다시 다녀올게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남아서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버지가 울상을 지으며 날 쳐다보셨다.

“다 끝난 게 아니었니? 위험한 데는 가지 마렴!”

“잠은 제대로 잔 거야? 도무지 쉬질 못한 것 같은데 꼭 지금 가야 해?”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돌아올게요.”

그러고 보니 저주에 휘말린 뒤로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집은 영 뒷전이었던 것 같다.

“죄송해요.”

하지만 어떻게든 말리지 못해 안달이 나신 부모님을 겨우 달래 드리고 집을 나섰다.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평생 꿈꿔 왔던 평온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 * *

“…….”

“…….”

한창때의 남녀가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서로를 노려보았다.

여자 쪽은 크림빛 물결이 그대로 사람이 된 듯 우아한 분위기의 숙녀. 남자 쪽은 탁 트인 하늘처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어울리는 청년이었다.

둘 다 외모가 출중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서로와 한 자리에 엮여 있는 이 상황이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역시 내 생각대로야.”

상석에 앉은 클라우디아가 품격 있게 웃으며 말했다. 카밀은 눈 깜짝할 새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부족한 제가 2황자 전하의 짝으로 어울린다고 말씀해 주시다니, 황송할 따름이어요. 황비 전하.”

메디프는 그런 카밀의 말투와 몸짓 하나하나가 소름 끼친다고 조용히 생각했다.

“무슨 말을, 카밀. 그대처럼 황자비, 나아가 황태자비에 어울리는 여자가 클랏샤에 또 어디 있다고.”

“물론 황비 전하의 안목을 믿습니다. 아, 곧 황후 폐하가 되실 분이시지요.”

메디프는 서로의 처지를 높이며 눈웃음을 짓는 두 여인을 썩 좋지는 못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밀은 마음속으로 아비의 멱살을 붙들고 뒤흔들고 있었다.

‘아, 아버지! 베일리스 후작! 이 망할 노친네!’

사람이 된 오필리어를 비호하려고 한창 힘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성녀가 방문하는 듯싶더니, 일이 황태자와 오필리어에게 불리한 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어떡하지? 당장 오필리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에일린… 아냐. 어머니 쪽의 인맥과 연결하면…….”

어떻게든 교회의 핵심 인물에 닿을 생각을 하며 저택을 서성이던 카밀에게, 베일리스 후작이 무심한 척 끼어들었다.

“그냥 두거라. 대세는 이미 황비 전하와 2황자 전하쪽으로 기울었어. 황족들 사이에서 옳은 선택을 하는 것도 대귀족의 당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네? 아버지? 지금 뭐라고 하셨죠? 어이가 없네요.”

“나야말로 네가 병아리 놀음 하고 다닐 때부터 어이가 없었다.”

부녀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튼 절 막으실 순 없어요. 오필리어는 저의 사랑하는 친구! 그 아이를 돕기 위해서라면 전 뭐든 할 거니까요.”

“아니, 막을 수 있다.”

“……?”

“에밀리. 아가씨를 방으로 모셔 가려무나. 요사이 찬바람을 많이 맞아 몸이 상하신 것 같으니, 한동안 집에서 쉬며 요양해야겠다.”

전속 메이드 에밀리가 다가와 카밀을 이끌었다. 카밀은 황당해서 외쳤다.

“저 안 아픈데요? 이미 디브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 놨어요!”

“걱정 마라. 몸이 안 좋아서 쉬겠다고 전해 놓으마.”

“안 아프다고요! 이거 놔, 에밀리. 사람을……. 아버지! 저에게 이러셔도 되나요? 인권위에 신고하겠어요!”

다소 저항이 있었으나 그녀는 후작의 뜻대로 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인권위가 뭐냐?”

“레오라 영애께서 알려 주셨다고 하시더군요. 연약한 사람이 부당한 짓을 당하면 백마를 타고 출동하는 비밀 기사단이라고 합니다.”

“흐음…….”

마음속으로 약간 켕겼던 후작은 그 뒤로 며칠 동안 인권위 기사단에 대해 은밀히 알아보았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그동안 카밀은 최선을 다해 탈출을 시도했다. 한 번은 메이드를 매수해 이종사촌 디브와의 연락책으로 쓰려다 실패했고, 또 한 번은 드레스와 망토로 밧줄을 엮어 창문으로 탈출했다가 정원 즈음에서 잡히기도 했다.

마침내 금족이 풀리고 나니 국혼 일정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지, 파문을 당한 황태자 대신 메디프가 책봉된다지.

거기다 새 황태자비 내정자는 카밀 자신이란다. 이 부분이 카밀은 가장 어이없었다. 황비가 직접 의견을 냈다곤 하는데, 아무래도 황비와 아버지 사이에 은밀한 접선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카밀은 차오르는 분을 삼키며 다짐했다.

‘시엘로에게 명령해서 밤중에 몰래 아버지의 머리를 밀어버려야겠어.’

옛날이라면 몰라도, 카밀은 더 이상 황태자비 따위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상대가 2황자 따위의 함량 미달 한량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차마 권력자인 황비 앞에서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카밀은 흠잡을 데 없는 태도로 클라우디아의 비위를 맞추고, 그녀의 몸치장이나 식탁에 차려진 음식에 대해 성의 있게 감탄했다.

가히 귀족 영애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태도에 클라우디아는 흡족해했다.

“그럼 본론을 꺼내 볼까? 주책맞지만 나는 둘의 식 날짜를 가능한 한 가깝게 잡고 싶구나. 이렇게 훌륭한 내 며느리를 누가 채갈까 걱정되는걸.”

‘아, 정말. 마음대로 며느리라고 부르지 마시라고요.’

당신 며느리 하기 싫다는 본심을 누른 카밀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메디프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니.”

“응, 내 아들. 어떠니? 너도 카밀이 마음에……”

“저 꼭 이 여자랑 결혼해야 하나요?”

미소 짓던 클라우디아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정적이 머물렀다.

카밀은 고민했다. 피차 같은 마음이기도 하고 좀 속도 시원하지만.

‘저 인간 주제에 왜 나를 거절하지?’

“좋으시겠어요?”

황비궁을 구경시켜 준다는 명목 아래 카밀과 메디프는 나란히 걸었다. 멀찍이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클라우디아의 시선에서 벗어난 후, 카밀이 대뜸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렇잖아요. 계승권에서 벗어난 한가로운 황자 처지에서 단숨에 황태자가 되게 생겼는데. 어머니의 힘으로 교회에 신성 왕국까지 합세해 경쟁자를 밀어내고, 최고의 레이디이자 사교계의 백조까지 아내로 맞게 되었죠.”

“네. 좋네요.”

“네? 뭐라고요?”

카밀이 공격적으로 눈을 깜빡거리자, 메디프는 어딘가 염세적인 기색으로 웃었다.

“좋아요. 당신 말대로 손쉽게 황태자가 되고, 황제까지도 될 예정이고, 손 놓고 있어도 엉덩이 밑에 옥좌를 욱여넣어 주는 조력자들이 있어서 좋다고.”

“하. 전부터 느꼈지만 2황자 전하께서는 양심이라는 것이 아예 없군요?”

“당신 말이 다 맞다 쳐도 한 가지. 그쪽이랑 혼인해서 좋겠다는 말은 취소했으면 좋겠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평생 혼자 살고 싶거든요.”

“예?”

카밀은 ‘너와 결혼하느니 혼자 늙는 게 낫다’란 말을 생전 들어볼 일 없는 일등 신붓감이었다.

모욕감을 떠나서, 2황자 따위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가당찮음을 넘어 애잔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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