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클레멘츠는 창밖을 대충 눈으로 더듬으며 픽 웃었다.
‘광장이라.’
클라우디아건 황제건 어지간히도 이를 갈았음이 분명했다.
황궁의 뜰 안이나 교회의 육각 벽 안쪽에서였다면 일부 귀족들과 성직자들끼리만 알고 말았을 텐데.
평민들까지 우르르 보러 나온 광장에서, 대낮에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그가 더는 재기할 수 없도록 파묻을 모양이었다.
광장의 둘레에서 마침내 마차가 열렸다.
중앙에 마련된 단상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선 비바람에 뚝 떨어져 내리는 흰 꽃의 처연함마저 느껴졌다.
모여 선 인간들은 술렁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마저도 저렇게 아름답다니, 저 아름다움도 분명 마성의 증거일 거라고.
“…허면 대주교의 권한에 따라, 신성 왕국의 판정 결과를 반영한 최종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소.”
대주교 그노시드는 수정과 진주로 장식된 두루마리를 폈다.
황후의 죽음 당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입막음했지만, 결국 비밀이란 없는 법. 그동안 황실의 치부로 남아 있던 증언들까지 그러모아져 저 판결문에 들어가 있었다.
“전문가들의 분석을 참고한 결과, 증언들과 일치하는 마적 존재는 마왕 글러토니아. 본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온 피부에 역병처럼 드러나 있는 붉은 문신으로 특정이 가능하다고 하더이다.”
그 증언들은 하나같이, 그의 어깨에 자리한 붉은 문신을 확인하면 마왕과의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황태자의 어깨에 있는 문신을 확인하려 한다. 전하.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거대한 인파가 일순 숨을 죽였다.
황족을 위해 준비된 단상에 앉아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황비와 황제. 고귀하신 시간을 다 포기하시고 몰려와 여기서까지 언쟁하는 귀족들.
황태자께서 저런 분인지 몰랐다며,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를 속삭임을 귀에서 귀로 옮겨 대는 평민들.
온갖 악마와 괴물들을 욱여넣어 둔 뒤싱겐의 피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는가.
그는 저 혼자서만 신의 이름으로 심판받게 되는 상황이 우스웠다.
“그럼 전하,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견습 사제가 한 명 다가와 그의 옷을 벗겨냈다. 클레멘츠는 작게 코웃음 치다 팔을 벌렸다. 겉옷과 조끼, 마지막으로 셔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견습 사제의 눈부터가 크게 벌어졌다. 그 경악은 광장에 선 인물들 전체에게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흰 피부 위에 선명히 새겨진 붉은 문신을 본 대주교의 표정에 놀람이, 다음엔 감추지 못한 희열이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 스스로 변호하기 위해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마침내 목소리는 기대로 떨리고 있었다.
“무슨 변명을!”
“저토록 선명한 흔적인걸!”
“그동안 우리들의 황태자님이라고 존경하고 사랑했던 세월들이 아까워!”
멀리서 어떤 평민이 소리쳤다.
황실 경비대는 그쪽에 힐끗 눈길만 줄 뿐, 제대로 제지할 생각조차 없었다.
“더 증명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소?”
높이 쌓아진 단 위. 황제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힐다가드 성녀가 앉아 있었다.
비둘기색 베일을 머리에 두른 성녀는 엄격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펴들고 있는 대주교에게 눈짓했다.
최종 승낙의 의미였다. 그는 마구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며 판결을 읽어내렸다.
“황실과 클랏샤 교단, 그리고 신성 왕국 본교단의 신중한 결정에 따라……”
클라티아 제국의 황태자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을 시미크의 진정한 종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며.
블론다누스 황제 이후로 개정된, 시미크의 신자만이 클라티아의 정식 황족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법률에 따라, 그의 황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인간계를 적대하는 마성 개체와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연결 고리가 되어 클라티아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는 중론에 따라, 황태자 클레멘츠를 클랏샤를 포함한 모든 황족과 귀족의 영지에서 영구 추방한다.
판결이 끝났을 때, 클레멘츠는 저도 모르게 단 위의 황족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위에 있는 이들 중 그와 시선을 마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제와 황비, 동생인 메디프마저도.
이제 그는 황태자가 아니었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도 아니었고, 제국법의 공정한 집행자도, 클라티아의 미래도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선택하고 그가 선택했던 ‘인간’은 그를 버렸다. 가진 거라곤 몸뚱이와 몸 안에 흐르는 피뿐.
그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 중, 하얀 셔츠를 느릿하게 집어 올려 걸쳐 입었다. 소맷부리 위로 익숙한 형태의 자수정 커프스가 반짝였다.
그대로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몰려들어 있던 인파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그로부터 어떤 눈길이 따라붙건 더는 그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 * *
시야가 뒤섞이며 클레멘츠의 모습이 완전히 흐려졌다. 검은 구름과 빛무리가 나를 둘러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집 앞이었다.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레오라 가문의 낡고 작은 저택.
이른 시각이지만 거실 쪽에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저 왔어요.”
“누구십니까…? 어? 아이고!”
“오필리어!?”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부모님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어머니는 오븐을 만지려고 끼고 계시던 장갑을 허겁지겁 벗었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버지는 아예 내게 매달려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대체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응? 그 험한 곳에서.”
구석진 혼우드라고 수도의 소식이 닿지 않는 건 아니다.
황실을 대변하는 병아리가 떠들어 대는 신문을 부모님도 읽으셨을 것이다.
그 병아리가 사실 아다만티스고, 나고, 황태자의 연인이라는 소식도.
황궁으로 보내는 편지에는 늘 건강 조심하고,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염려 섞인 내용뿐이었지만.
“너… 이제 돌아온 거니?”
“…….”
어머니의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클레멘츠는 이제 모두 끝났다고 말했다. 나의 절절한 마음도, 함께 미래를 꿈꾸자는 간절한 부탁도 전부 거절한 채 나를 보냈다.
사라지는 나를 끝끝내 바라보던 그 얼굴을 떠올리자 마구 울음이 터져나왔다.
“오, 아가!”
덩달아 눈물지으며 내 등을 두드리는 아버지 위로, 어머니까지 따뜻한 품으로 나를 감싸안고 토닥였다.
“이제 괜찮아.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다. 일단 푹 쉬고, 그동안 못한 이야기도 하면서… 우리랑 있자.”
“얼마나 네가 보고 싶었는지 몰라. 오필리어.”
내 침대는 어딘지 어색하고 허전했다. 빙의한 날 처음 여기서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지.
깨끗하고 아늑한 방에 누워 있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쁜 자식.”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목이 따끔거리며 메어왔다.
“하늘의 황금 새를 닮은 인간의 딸. 우리는 너를 풀어줘야 해.”
“뒤싱겐의 말이면 꼼짝없이 따라야 해.”
“…….”
그대로 베갯잇에 얼굴을 묻으려는데, 허공에서 반짝이며 나타난 두 마물이 휴식을 방해했다.
“저리 가요.”
“지금은 아니야? 내일 할까?”
“내일도 아니야? 나중에 할래?”
대답도 귀찮아서 시트를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등 뒤에서 넝마를 스치며 말없이 옥신각신하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다가 두 자매 마물이 사라지기 전, 난 홱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전하께선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교회. 황실. 귀족. 무시무시한 사람들과 맞서야 했으니 분명 고운 취급은 받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했는데. 힘이 되어 주고 위로해 줬어야 하는데….
아닌가?
필요 없다고 쫓아낸 건 저쪽이잖아. 왜 내가 여태껏 신경을 써야 해?
흥. 내가 필요 없다는 저 혼자 잘 해보라지. 나도 나대로 잘살 테니까.
“…….”
“됐어요. 저주는 풀고 싶을 때가 되면 제가 얘기할 테니까, 그때까지 어디 다른 데에들 계세요.”
“…….”
“처음 뵙던 때처럼 숲에서 서로 마법 쓰고 뛰노시든가요.”
그러곤 신경을 꺼 버린 것처럼 외출 준비를 하니, 밤과 낮의 마물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사라져 버렸다.
겉옷을 입고 정원으로 나서자 찬 공기 속으로 입김이 흩어졌다.
아직 가지에 남겨져 있는 발간 겨울 열매들을 따서 바구니에 넣었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활동이었다.
대충 춥고 배고파졌을 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친근한 훈기가 온몸을 감싸고, 고소한 향내가 났다.
“우리 딸, 왔니?”
수프 냄비를 휘젓던 아버지 옆으로 다가갔다. 쾌활한 이야기 끝에, 수확한 겨울 열매 중 몇 가지를 수프에 넣었다.
“딸 덕분에 더 맛있어졌네.”
“자. 마침 다른 요리도 다 됐어요.”
아버지는 그릇에 한가득 수프를 담아 주셨고, 어머니는 갓 구운 빵을 내밀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씩씩하게 인사하고 식탁에 앉자 부모님은 어딘지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래.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으니 된 거다. 세상천지에 날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이 어딨다고.
거기다 집에서 해 먹던 아침 식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무리 화려한 걸 매일 먹는다고 해도 결국 집밥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새큼한 열매가 띄워진, 고소하고 부드러운 수프. 버터 향이 솔솔 나는 따뜻한 빵.
오랜만에 맛보는 집 음식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저주도 마법도, 전개를 벗어나 날뛰는 주조연들의 간섭도 없는 이런 일상을 얼마나 꿈꿨는지.
행복해. 평화로워! 좋아!
“…흑!”
“……!”
그러나 꼴사납게도 빵을 입 안에 밀어넣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도무지 그칠 생각을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