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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82)화 (182/218)

182화

셀레네 황후님이 원한 것도 어쩌면 이게 아니었을까. 결국엔 아들이 행복하게 살길 원했던 게 아닐까?

설령 교단이니, 황실이니, 정계니. 그런 이들이 등을 돌리더라도 여전히 함께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건 몰락도 추락도, 파멸도 아니라고.

아마 지금쯤 클레멘츠가 보는 내 눈동자는 절박하리만큼 간절해 보일 것이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졌다.

마침내 클레멘츠가 입을 열었다.

* * *

“이번 생은 저와 함께 살아 주세요. 저의 충실함에 대한 권리를 가지시고, 저의 보호자가 되어 주세요.”

갑자기 찾아온 오필리어가 털어놓은 이야기. 아리게 웃는 얼굴은 믿을 수 없도록 고왔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들은 가느다랗게 뽑히는 뜨거운 사탕 가닥이 되어, 그를 속수무책으로 칭칭 감았다.

이대로 굴복하면 된다.

작고 노란 아기 새, 벽지 출신의 한미한 귀족 영애. 오필리어는 자신이 한사코 조촐하고 미약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목마른 자를 전율시키는 단 한 방울의 달콤함이었다. 깨지지 않는 얼음을 녹이는 햇살이었다. 손짓 하나, 말 한마디로 그의 주권을 가져가는 왕이었다.

그러니 알겠다고만 하자.

그러겠단 한 마디, 혹은 약한 끄덕임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넘치도록 기뻐할 것이다. 그런 뒤 보여줄 눈부신 미소에, 모든 걸 내려놓고 덩달아 녹아 버려도 좋다.

행복하리라.

한평생 곁에 있겠다는 약속. 조건 없이 지켜주겠다는 맹세.

오필리어가 잘라다 입에 넣어 주는 행복을 먹고, 작은 손을 잡고 따라 걸으며 걸음마를 배운다. 그녀가 아는 작고 자유롭고 눈부신 세상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저 사랑스러운 이는 이것이 행복이라고 진심을 담아 속삭일 테고, 그러면 그는 믿을 것이다. 그녀의 세상을 가진 것이니 전부를 가진 것과 같으리라. 어쩌면 나중엔 그의 한구석에서도 봄 햇살을 닮은 향기가 날지도 모른다.

“오필리어.”

차가운 손에 부드럽고 따스한 볼이 닿았다. 피부를 적시는 더운 눈물 한줄기마저도 경이로웠다.

나의 오필리어.

“그럴 수 없다.”

“……!”

뒤통수라도 세게 얻어맞은 듯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클레멘츠는 눈썹을 찌푸렸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꺼내어 바닥에 던져 놓고 지근지근 밟는다면 이런 느낌이리라.

“왜요?”

오욕의 황태자. 뒤싱겐의 수치. 악마에게 팔린 출생.

‘우리를 마계의 희생양으로 내어줄 위험 인자’.

영원한 비밀은 없었고, 황비와 황제는 그의 비밀을 만천하에 내어주기로 작정했다. 경멸과 불명예가 한평생 그를 따라붙을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도 바깥엔 성기사들과 수도 경비대가 어떤 허튼짓을 벌이지는 않는지 저택을 촘촘히 둘러싸고 있었다.

수도의 성벽을 넘은 소문은 퍼질수록 흉해져, 제국 끝으로 가면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될 것이다.

그 괴물은 그보다도 오필리어에게 훨씬 가혹하리라.

경멸은 그녀에게 이르러 증오가 되고, 불명예는 모독이 되리라. 여린 살과 눈물짓는 얼굴을 탐하는 이빨들이 그녀를 물어뜯어도, 오필리어는 제 몸집보다도 큰 그를 한사코 지키겠다고 끌어안고 놓지 않으리라.

울었다가도 일어나고 씩씩하게 털어내며 할 말이 귀에 선했다.

“당신이 옆에 있어 주니 모두 괜찮아요.”

견딜 수 없는 쪽은 그였다.

“왜요? 왜…?”

오필리어는 고개를 떨궜다. 한두 줄기 비어져 나오던 눈물이 속절없이 양 뺨을 그어댔다.

“제가 전하를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나요?”

“아니.”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 한다면 믿을까.

“사실 전하께서 이렇게 되신 건 저 때문이에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흐느끼는 오필리어를 끌어당겨 제 옆에 앉혔다. 작은 몸이 자연스레 품 안에 들어왔다.

“애당초 내 출생은 불완전했고, 황비는 날 눈엣가시로 여겼다. 황제 폐하께선 나에 대한 의구심을 결국 떨치지 못했지. 그러니 언젠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오필리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불리함이 있었다 해도 클레멘츠는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 지모와 능력을 갖추었고 충성스러운 조력자들이 있었다. 자신이 마수에게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황궁으로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아니.”

클레멘츠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날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선택한 거야.”

젖은 황금색 눈이 그를 향했다. 기묘하게도 클레멘츠는 그 순간, 웃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이나 가질 것들보다 네가 소중했다. 그러니 다른 걸 조금 잃더라도 널 구하는 게 나았지.”

“조금이 아니잖아요. 그건 조금이 아니에요.”

“울지 마.”

마수 앞에 던져진 소녀를 구해 와 계약서를 내민 날부터 알았다. 무결하던 구조물에 작은 균열이 하나 생긴 것처럼, 언젠가는 그녀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고. 그런데도 버리지 못했다. 조금 더 깊이 얽히지 못해 안달을 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었지만, 뜨거운 피를 흘리는 심장이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 안에 한 사람이 살아 숨 쉬었다. 웃고, 울고, 맑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클레멘츠는 더 이상 자동인형이나 기계가 아니었다.

“αποκαλύπτω.”

조용히 읊조리자, 은은히 빛나는 종이가 허공에서 내뱉어졌다.

혼우드에서 작성한 계약서였다. 오필리어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당시 정했던 계약 기간은 1년. 아직 채우지 못했으니 곁에 남아 있겠다는 빌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기대는 무참히 깨어졌다.

“무고한 너를 억지로 변신시켜 1년이나 곁에 두려고 한 건 나였지.”

“아니요, 전하. 저는 좋아요. 다시 모습을 바꿔서라도….”

“이제 확실히 이야기하마. 더는 여기에 매여 있을 필요 없다. 계약은 끝이야.”

“아뇨, 잠깐만요!”

이어 읊어진 고대어 술식 몇 마디에, 계약서는 모서리부터 푸른 불꽃에 감싸여 타들어 갔다. 오필리어는 불타는 종이를 향해 손을 뻗어댔다. 두 사람이 한 계약인데 이런 일방적인 끝맺음이 말이 되냐며 소리쳤다. 그러나 클레멘츠는 굳건했다.

“이게 내 대답이다. 나의 의지고.”

불길 속에서 종이가 완전히 사라졌다. 버둥거리며 클레멘츠의 가슴을 퍽퍽 치던 오필리어는 울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욕인 것 같았다.

“너를 사랑해. 오필리어.”

손에 닿는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는 황금 실 같았다. 별안간 울음을 멈춘 여자가 둥글게 뜬 큰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 얼굴을 들여다 보며 클레멘츠는 자기 감정을 한 번 더 확신했다.

“나는 너를 정말 많이 아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존재가, 제 옆에 있는 대가로 험난함을 견디고 갈려 나가는 꼴을 용납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였다. 더 이상 그를 따르는 건 오필리어에게 해악이기 때문에.

“사랑해.”

입술과, 그 주변의 연한 살결이 손가락에 가볍게 눌려 들어갔다.

아마도 이 감촉이 그리울 것이다.

녹진한 목소리에 조금 넋이 나간 듯한 오필리어를 침대 위에 앉혀 두고, 클레멘츠는 협탁 위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잠시만요. 지금 뭐 하려고요?”

비척이며 일어난 그녀가 다가온 것과, 손바닥을 찔러 피를 낸 그가 주문을 외운 건 거의 동시였다.

"Εγώ, απόγονος του μεγάλου βασιλιά…….”

익숙한 울림이 무엇을 부르는 소리인지 오필리어는 금방 알아들었다.

‘현왕의 후손이 명하노니 모습을 드러낼지어다, 나의 노예인 밤과 낮이여.’

빛으로 된 쇠사슬에 묶여 굴러떨어진 건 오필리어의 꿈속에 나오는 기묘한 마녀가 아닌, 검고 흰 넝마를 뒤집어쓴 깡마른 마물들이었다.

“뒤싱겐!”

“우, 우리가 와도 되는 상황이 맞아?”

“맞나?”

“아니야?”

검은 닉타는 뒤통수를 긁적였고, 하얀 메라는 오필리어의 눈치를 살폈다.

“오필리어를 고향으로 데려가라. 그리고 아무 때나 그 아이가 원할 때 저주를 풀어 줘. 완전히, 영구히.”

“알았어, 뒤싱겐.”

“뒤싱겐, 우린 네 말을 들어.”

“뭐? 누구 맘대로! 싫어요!”

오필리어는 허공에 둥둥 떠서 다가오는 마물들에게 손가락질했다.

“다가오지 마요. 제 몸에 손댈 수 없어요. 이제 전하와 저는 계약관계조차 아니라고요! 저 사람이 계약서를 찢었다고!”

“하늘의 황금 새를 닮은 인간의 딸. 너는 뒤싱겐이 아니야.”

“뒤싱겐만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어.”

그 언젠가와 참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클레멘츠는 저주를 풀기를 명령했고, 마물들의 목소리에선 곤란함과 미안함이 풍겼다.

“싫어!”

오필리어의 반응만큼은 예전과 같았다. 밤과 낮의 마물이 손바닥을 맞대고 검고 희게 빛나는 마법진을 만드는 동안, 오필리어는 울부짖었다.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 당신 정말 후회할 거예요. 어떻게 나를 이렇게 버리죠?”

완성된 마법진에 닿자, 그녀의 형태가 빛을 뿌리며 흐려져 갔다.

클레멘츠는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겼다. 마지막으로 울린 목소리도.

“잘 기억해요. 나만 한 사람은 다시 없을 테니까!”

그녀만 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할 사람도, 사랑스러운 사람도.

그는 아마 후회할 것이다. 홀로 견디다 못해서, 무저갱에 비치는 햇살 같은 존재를 갈망하게 되리라.

“그러니 어서 도망쳐야지. 내가 널 나락으로 끌어들이기 전에.”

빛이 완전히 오필리어를 집어삼키고 소멸했다. 클레멘츠는 완전한 어둠 속에 남았다. 보이는 거라곤 그녀가 떨어뜨리고 간 눈물 자국뿐이었다.

“하여, 광장으로 모시라는 황명입니다…. 황태자 전하.”

아침이 다가왔다. 클레멘츠를 찾아온 황실의 사자는 무릎을 꿇고 황궁과 교회의 전갈을 읽었다.

클레멘츠를 태운 마차는, 황궁과 대로를 통해 바로 이어지는 광장으로 천천히 굴러갔다.

저택 문밖을 나서면서부터 인파가 몰렸다. 완전무결하던 황태자가 진창 속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놓치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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