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조금 떨어진 전신거울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었다. 등과 허리를 잇는 부분에 새겨진 정교한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육각형의 얼개를 따라 빼곡히 적힌 이름과 주문, 저주들.
“하…!”
규모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는 났지만, 글러토니아는 그것이 어떤 구조물의 모조품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아타누르!’
엉큼스러운 셀레네가 무슨 속임수를 썼는지도.
‘가까운 곳에 우선한다’란 황금률을 이용해 제 이미 죽은 제 영혼을 육체에 묶다니. 영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끓여 대던 포도주의 냄새는 그 영혼의 향을 가리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지금껏 몰랐을까?
감히 마왕을 속이다니. 한낱 인간이!
“셀레네 디 샹그리아!”
마왕의 절규는 섬뜩하게도, 조금 처절하게도 들렸다.
헝클어진 은빛 머리를 쥐어뜯다가, 대뜸 침상 근처에 흩어져 있던 의료용 가위를 집어 들었다.
로메오는 황급히 달려들었다. 보아하니 허리에 새겨진 문신을 날붙이로 파낼 생각이었다.
글러토니아는 제 팔을 잡아채는 시녀장을 마력으로 내동댕이치려 했다. 하지만 뜻대론 되지 않았다.
마왕의 권능을 가능케 하는 영의 힘이, 족쇄에 매인 것처럼 온통 묶여 있었다. 아니. 힘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가 부자유했다.
무언가가 존재를 촘촘히 감아서 쥐고 있는 듯한 느낌.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불쾌감이었다.
“Μούτζα!”
이윽고 극도로 흥분한 마왕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정말 이 그림 하나면 마왕을 속일 수 있을까요?”
셀레네가 그린 그림은, 지금부터 로메오가 새겨 줄 문신의 도안이었다.
그녀는 긴 은발을 한쪽 어깨 앞으로 모았다.
“마왕의 담금솥은 세계의 창조와 그 연원을 같이해. 그만큼 얽힌 이야기도, 특성도, 권리를 주장하는 존재도 많지. 그중에 대표적인 여섯 가지를 채워 넣었어.”
눈앞엔 티 없이 매끈한 등이 있었다. 로메오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바늘을 들어 올렸다.
“‘가까운 것에 우선한다’. 적과 청을 막론하고 모든 마법에서 기초가 되는 인과율이야. 계약은 내가 수용될 아타누르를 마계에 있다고 특정하지 않았어. 영혼을 저장해 두는 창고, 육각의 용광로 아타누르라고 했지. 그즈음이면 충분해.”
문신은 여러 문헌에 기록된 ‘용광로’의 형태를 본떠 육각으로 그려질 테고, 셀레네 자신의 영혼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을 터였다.
영혼의 냄새를 감지하는 글러토니아를 속이기 위해, 매일같이 포도주를 끓여다 바칠 생각이었다. 막대한 양의 포도주가 이미 준비되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마왕은 육체를 사용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잡혀 있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
‘셀레네 디 샹그리아의 육신’이라는 감옥이 썩어 없어진 뒤엔 마왕은 자유로워진다. 그때를 위해, 마왕을 속박할 다른 주문이 필요했다.
샹그리아 가문의 장기는 영혼을 묶는 주술.
강대한 영을 속박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재료는 인간의 영혼이었다.
고대의 선조들은 인신공양을 통해 왕왕 수급하고는 했던 모양이지만, 셀레네가 준비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영혼뿐이었다.
“이 부분의 고대어를 제대로 새겨야 해.”
영혼에는 영혼으로.
마계로 돌아간 글러토니아가 헛된 짓을 하지 않도록. 셀레네의 아들을 끌고 가선 자신의 아들이자 마계의 왕이라 우기지 못하도록.
그녀는 갈래갈래 길게 조각나 마왕을 묶기 위한 끈이 될 것이다.
셀레네가 가리킨 도안은, 발동되면 칼날이 되어 그녀의 영혼을 찢어발길 터였다.
로메오는 울먹였다.
“셀레네 님. 영혼이 조각나면 안식이 없나요? 신의 곁에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까?”
신을 믿지 않았다. 빌어 본 적도, 감사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셀레네 님이 죽는다면, 영영 사라지거나 마왕과 함께 마계의 구렁텅이를 떠도느니 시미크의 곁에 있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파리한 안색에도 지는 달처럼 아름다운 주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너의 기억에 남을 것 아니니.”
“δεν μας χέζεις!”
마른 몸이 바르르 떨렸다. 가느다란 팔을 채운 문신이 사라졌다가, 깜빡이듯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주홍색으로 불타던 눈은 다시 셀레네가 가졌던 적안으로 바뀌었다가 이내 되돌아갔다.
뒤늦게 들이닥친 근위병들이 본 건 피바다가 되어 있는 산실이었다. 그리고 광인인지 야인인지, 인간이긴 한 건지 알 수 없는 황후의 모습.
간신히 정신을 차린 황제는 황궁 마법사들을 불렀다. 청마법사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이 흔히 그렇듯, 그들 모두는 페리윙클 가문 출신이었다.
끔찍하게 변해 버린 황후는 묶였고, 그 주위를 마법사들이 둘러쌌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인간도 악마도 아닌 황후는 쓰러져 묶인 채로 썩어갔다.
조직이 푹 꺼지고 변색 되어 가면서도 그 입은 한결같이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부었다. 이윽고 소리를 낼 혀와 입술이 없어지고, 턱뼈가 빠져 더 이상은 닫히지 않을 때까지.
황명에 따라, 마법사들은 주변에 결계를 치고 곳곳에 퍼진 사악한 기운을 정화했다.
그동안 시체들이 치워졌다. 소문이 새어나갈 틈이 꽉 막혔다. 변고가 일어난 방에 들어왔던 근위병들은 산간벽지로 이직되거나,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황후의 최후를 가까이서 보았던 페리윙클 출신의 마법사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명을 따른 대가가 이것이냐 항변을 하건, 입을 다물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옵시라 구걸하건. 그들의 끝은 모두 같았다.
제국력 310년, 겨울의 막바지. 셀레네 황후가 죽다. 눈비가 내리듯 안식이 내리리라.
장례를 치른 후, 페리윙클 가의 클라우디아가 황비로 들어오다.
황후의 무덤엔 먼지가 쌓였고, 그녀의 아들은 자라났으며, 황비가 된 공녀는 페리윙클 가의 기대와는 달리 그저 조용히 방긋방긋 웃을 줄만 아는 여자인 것처럼 정원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흘러온 24년이었다.
* * *
방안을 비추던 달은 벌써 창틀 너머로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글로리나 부인은 모든 말을 쏟아내 버린 사람처럼 한동안 조용했다.
나 역시 숨 쉬는 법도 잊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랬구나.
클레멘츠를 둘러싸고 있던 신비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보다. 그의 탄생에는 마왕이 개입했고, 그의 존재 자체가 마계와 인간계의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의 씨앗이었다.
머릿속 한편에서 늘 의문이던 원작 2부의 내용도 조금은 짐작이 갔다.
클레멘츠의 죽음으로 인간계가 망했으니, 마계로 무대가 옮겨갔겠구나. 어쩌면 마족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 집요한 마왕이 클레멘츠를 포기할 리 없으니.
이 모든 상황이 클레멘츠에게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태어나자마자 영혼이 갈가리 찢어진 어머니.
본인 살자고 아들을 버릴 뻔한 아버지.
나는 또 어땠지?
“이 악마.”
걸핏하면 사악하다고, 악마라고 비난해 댔던 말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나를 아프게 찔렀다.
듣기 싫었을 텐데. 화가 났을 텐데. 왜 내색 하나 하지 않았을까.
두 발은 거의 저절로 움직여 클레멘츠의 방을 향했다.
“감히 제가 청할 수 있다면, 부디 그분의 곁에 남아 주십시오. 오필리어 님.”
내 뒷모습에 대고 글로리나 부인이 남긴 말은 어딘지 익숙했다.
마침내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
너무 무작정 쳐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클레멘츠.”
내가 이름을 부르면, 다정히 날 향하는 저 눈과 고갯짓이 좋았다.
비록 어쩔 땐 꼭 지금처럼 지치고 슬픈 감정을 담고 있더라도. 그래도…….
문득,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게 뭔지 깨달았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입 밖으로 내고 보니 더 확실해졌다.
“…….”
“당신이 잠드는 걸 지켜보고 당신이 보는 앞에서 눈을 뜰게요.”
그는 내가 감히 꿈꾸지 못할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지켜줄 필요 없을 만큼 강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에게 줄 것이 하나쯤은 있었다.
“저는 요리는 딱 하나만 할 줄 알아요. 신년마다 어머니께서 하시던 요리예요. 드셔 보실래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덧붙일 때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매년 드셔야 해요.”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위로받을 누군가가 필요했다. 주저앉고 부서지더라도 이게 끝이 아니라고 믿게 해 줄 목소리가. 가까울 땐 태양처럼 멀 때는 별처럼, 분명히 존재하는 행복을 온몸으로 증명해 줄 웃음이. 혹은 체온이, 어떤 약속이.
“몇 년에 한 번이나 겨우 올까 싶지만, 여유가 있으면 우리 집에선 여름 호수를 보러 갔어요. 지겹도록 보신 게 클랏샤의 바다겠지만요. 호수는 전혀 다르답니다.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달까요? 거기서 제가 붕어를 낚아 드릴게요.”
내가 낚시를 잘 한다고 하면 클레멘츠는 믿을까? 잡은 붕어를 요리하는 건 다른 누군가 해줘야겠지만. 어쩌면 붕어찜부터 서서히 배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겨울엔, 경치 구경도 물론 좋지만, 집안에서 안락하고 태평하게 창밖이나 좀 내다보는 게 제일이지 싶어요. 모나한 가의 시녀로 일할 때, 추운 새벽에 억지로 바깥 심부름 나가기가 그리도 싫었거든요. 아시다시피 거기도 경치는 더럽게 좋잖아요.”
“…….”
마음과는 다르게 멋이라곤 조금도 없는 말들이었다. 어째서 이야기할수록 울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한두 방울 차오른 눈물을 대충 훔쳐냈다.
“좋아하는 사람과 바깥의 찬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이불에 둘둘 말려 책이나 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어요. 사실.”
클레멘츠의 눈에 희미한 희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저랑….”
나는 질세라 더욱 생글거리며, 그의 큰 손을 꽉 쥐었다.
“이번 생은 저와 함께 살아 주세요. 저의 충실함에 대한 권리를 가지시고, 저의 보호자가 되어 주세요.”
혀를 조금만 잘못 놀리면 심장이 덩달아 뱉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