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이럴 때 크렘시아 그년이라도 있었다면….’
전투광이면서도 답지 않게 생명을 돌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그 악마가 있었다면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탯줄을 엉키게 하는 손’이란 이명에 걸맞게, 크렘시아는 산모와 태아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손쉽게 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에 쓰려면 없다고, 평소 눈엣가시이던 그 마공작도 벌써 오래전부터 뒤싱겐의 혈박에 묶여 있는 처지였다.
‘그래 봤자 이 굴욕도 이 아이만 낳으면 끝이 난다.’
마왕 글러토니아는 자신이 인간계의 황태자를 낳음으로써 그 어머니의 권한을 가질 속셈이었다.
‘껍데기와 영혼을 모두 헌납한 셀레네 디 샹그리아에겐 안된 일이지만.’
바보 같으니. 글러토니아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태어날 아기는 마계의 왕자가 됨과 동시에 지상의 황권을 약속받는다. 아이가 성년이 되면 마족으로 각성시키고 마계에 예속시키리라.
그렇게 되면 유스티온의 언령도 수명이 다한다.
“뒤싱겐의 이름이 지상의 왕좌에 좌정하는 한, 마의 종족은 마계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뒤싱겐의 주인이 곧 복마전의 주인이니. 마계에 속한 존재는 그의 명령을 따를지어다.“
뒤싱겐의 후계자가 지상을 버리고 지하의 왕좌에 앉으면, 마의 종족은 건국 이후 삼백여 년 만에 마계를 벗어나 활개를 치게 될 터.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맞춘 듯한 기회가 굴러들어올 줄이야.’
이게 바로 참고 기다리면 복이 온다는 걸까?
글러토니아는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며 숨을 참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님이 나오셨습니다!”
“건강한 황자님이세요!”
“그, 그런데…….”
감격하여 부르짖던 여인들이 머뭇거렸다.
아이는 건강했고, 보송한 은빛 머리카락은 황후를 똑 닮았다. 다만 작은 목과 어깨를 잇는 부분이 붉은색의 기이한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문양의 출처를 아는 이는 글러토니아 뿐이었다.
아이가 타고난 마성을 증명하는, 자신과 닮은 부분이기에 오히려 더욱 사랑스러웠다.
“내 아이를 이리 줘.”
“무, 물론이죠. 황후 마마!”
산모인 황후가 개의치 않는 기색이자, 산파는 반색하며 그녀의 품에 아기를 안겼다.
그 순간, 계약은 끝났다.
황후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의 섬뜩함을 읽은 사람은 그 자리에 단 하나. 시녀장 로메오 글로리나 뿐이었다.
로메오는 치맛자락 속에 숨겨둔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이게 대체 무슨…!”
첫 아이의 출생을 기대하며 문 안으로 들어선 황제가 본 건, 참혹한 풍경이었다.
황후의 출산을 도우러 방 안에 들어가 있던 여인들만 어림 잡아 열 명은 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건을 들이고 내가며 황제와 마주쳤던 이들은 곳곳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흘러넘친 피의 비린내가 포도주 향을 덮었다.
누가?
대체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코넬리우스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범인을 찾아 헤매던 두 눈은 방 한가운데서 웃음을 터뜨리는 여인을 향했다.
“아하하!!”
“아악! 살려, 살려 주세, 꺄아아악!!”
그녀의 손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로 셀레네, 그의 아내의 손에.
어린 메이드는 머리칼을 움켜잡힌 채 울고 있었다. 옷과 손발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아니, ‘저것’이 과연 그의 아내이긴 한가?
의지를 지닌 듯 이리저리 너울대는 머리칼.
새하얗던 피부 가득 생겨난 붉은 문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의 혀처럼, 흉성(凶星)처럼 번뜩이는 주홍색 눈이 그를 응시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머저리 같은 뒤싱겐이 왔구나.”
자신을 향한 모욕에도, 황제는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저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어떻게 인간의 것이란 말인가.
“인간 놈들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복수 축에도 못 끼지.”
그저 평소에 거슬리던 날파리들을 몇 마리 잡았다는 듯한 어조였다.
머리채를 휘어잡은 메이드도 마저 해치우려는 듯 손을 들었을 때, 낯선 금속성의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 칼은.”
글러토니아는 로메오가 뻗은 칼에서 기분 나쁜 예기를 느꼈다.
“그 멍청한 여자가 술수를 부려 둔 모양이구나.”
“…….”
“그럼 내가 누구인지도 알려줬을 텐데. 그깟 알량한 단검 따위로 날 막을 생각인 건가? 미쳤어?”
로메오는 손잡이를 거듭 움켜쥐고 갈색 눈을 부릅떴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왕을 막으라고, 셀레네 님이 축성해 주고 떠난 단검이었다.
주인이 남긴 것을 가지고, 그녀의 껍데기를 둘러쓴 것과 싸워야 했다.
한편, 황제는 가까스로 용기를 되찾았다. 아무리 사악한 것 앞이라지만 황제의 위엄이 일개 시녀장보다 못할 순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뒤싱겐의 주인으로서 명령하니,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
기세 좋은 호통이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휘돌았다.
아무리 피가 옅어졌다곤 하나, 뒤싱겐은 엄연히 마족을 지배하는 혈통이었다.
‘저것’의 정체가 아무리 흉하다고 해도 그에게 복종해야 마땅했다. 그리 알고 있었다.
“푸훗.”
그러나 아내의 껍질을 쓴 존재에게 돌아온 건 복종이 아닌 비웃음이었다.
“틀렸어. 나는 유스티온 놈의 수작에 걸려들어 그 피에 존재를 저당 잡힌, 그런 어리석고 썩어빠진 악마가 아니니까!”
“뭐, 뭣…! 밖에 누구 없느냐? 근위병! 황궁 마법사들!”
평생 자부심을 가졌던 뒤싱겐의 혈박이 통하지 않자, 다음은 황제의 권위였다.
“모든 마족의 수장. 간사한 유스티온의 술수에 걸렸으나, 모든 권능을 버리고 자유와 주권을 위해 새 존재를 얻은 자 글러토니아가 이르노니-”
“폐하. 황제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 오지 마라! 누구든 이 방에 들어오면 사지가 분리되어 다시는 합쳐지지 못할 테니!”
황제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두드리던 근위병들은 멈칫했다.
일갈하는 음성은 황후의 목소리 같았지만, 훨씬 끔찍했다.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분명 황명이 있었으나, 그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 것만이 고작이었다.
코넬리우스는 절규했다.
“이 무슨!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믿어 왔던 핏줄의 힘도, 황제의 권력도 쓸모가 없다. 눈앞에 있는 건 피 웅덩이에 쓰러진 시체들과, 사람을 벌레만도 못하게 눌러 죽이는 살인마였다.
혈박에 묶이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 마왕 이야기는 그도 들은 바 있었다. 제 종족을 통째로 빼앗겨 유스티온의 노예로 준 마왕이, 그 후손인 황가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는 알만했다.
저 여자가 과연 자신도 죽이고야 말까?
순간 그의 뇌리에 한 줄기 빛이 스쳤다.
‘황자는……?’
문 안에서 분명 황자가 태어났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저 미치광이 마왕이 갓난아이마저 도륙한 게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 강보에 싸인 작은 녀석은 침대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수상한 붉은 장미색 기운이 아이를 감싸고 있었지만, 분명 아직 살아있었다.
“마왕이여!”
그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손을 뻗어 갓 태어난 아들을 가리켰다.
“저 아이도 뒤싱겐이오!”
“……?”
마왕의 주홍빛 눈과, 그와 대치하던 로메오의 갈색 눈이 동시에 코넬리우스를 향했다. 어리둥절해 하던 눈들은 곧 한쪽은 비웃음으로, 한쪽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저 애는 아직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 마땅히 내 대신……”
“폐하!”
로메오는 기가 막혔다. 셀레네 님은 모든 것을 바쳐 아이를 지키는데, 아비라는 자가….
“채 한 세기를 못 사는 인간이라도 부모의 마음은 지극하다던데. 꼭 그렇진 않은 모양이야.”
글러토니아는 머리채를 잡았던 메이드를 휙 놓아주었다. 기절한 소녀가 픽 쓰러졌다. 참담한 장소에서 마왕은 홀로 유쾌했다.
“누굴 죽이고 대신하고, 그럴 필요는 없어. 어차피 저 아이가 두 세상의 다음 왕이 될 거니까.”
“……!”
“기뻐해야죠, 여보? 우리가 같이 낳은 자식이잖아!”
마왕은 음전한 부인인 양 교태 부리는 시늉을 하더니 깔깔 웃어댔다. 순간 황제는 그냥 죽고 싶었다. 잠시라도 저것과 부부 행세를 했다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대체 언제부터였나?
생각해 보면 셀레네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날이 있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원래 셀레네는?
진작 죽어 버렸나? 글러토니아는 왜 그녀의 몸으로 들어온 거지?
“셀레네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
“……!”
사람의 영혼이 마족에게 넘어갔다는 건 오로지 한 가지 경우였다. 자발적인 계약.
‘셀레네의 짓인가? 그녀가 저 끔찍한 것을 부르고 제 영혼을 넘겼다고?’
그랬다면 저 시녀장이 모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메오 글로리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럼 재미는 다 본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가볼까. 마왕은 후련하게 웃었다.
“안녕, 뒤싱겐. 내 아들이 다 크면 데리러 올게.”
당장에라도 마계로 사라져 버릴 것처럼.
하지만, 사라지지 못했다.
“…뭐야?”
계약이 종료되었으니 마왕은 이 몸을 떠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마왕의 영을 붙잡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계약이 종료되면, 제 영혼이 떠난 육체를 떠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셀레네의 영혼이 아직 육신을 떠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그건 불가능해. 어떻게?’
상황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자 마왕은 극히 초조해졌다.
마족의 계약은 반드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지켜져야 했다. 그렇다는 건 셀레네 역시 마왕이 그러했듯 계약을 역이용해 상대를 속였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방을 채운 피비린내 틈에서 익숙한 영혼의 향이 비로소 느껴졌다.
“무슨…….”
번개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마왕은 걸치고 있던 슈미즈를 찢듯이 벗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