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셀레네는 털썩 주저앉았다.
마왕이 봉인진에 묶이며 외친 절규의 내용은 샹그리아 가문의 고대 기록에 남아 있었다.
“이 세계가 남아 있는 한 결코 내 왕국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내 영토인 마계는 물론이고 간악한 마법사가 앗아간 마족 형제들을 되찾으리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간악한 뒤싱겐 놈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야 말리라!”
마족은 영원히 원수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셀레네는 방금, 복수로 이를 가는 마왕의 손에 아이의 탄생을 맡겼다.
“내가 무슨 짓을….”
단지 허무하게 사라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제 몸에서 난 자식에다 태어난 세계까지 통째로 악마에게 넘겨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끔찍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지켜야 했다.
이제야 꼬물거리며 발길질을 시작한 이 작은 아이는 황후 소생의 적장자였다.
뒤싱겐의 피에 매인 마족들과, 지상의 제국에 대한 소유권.
마왕 글러토니아는 이 아이를 통해 한 번에 가지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의 아이를 지키고, 선조들이 지키고 자신이 자라 온 세계를 지켜야 했다.
그동안 우울함 속에 허우적대느라 깨닫지 못했었는데,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지킬 것들이 그렇게나 많고도 중했다.
사슴뿔 관을 벗어두고 제단을 벗어나는 동안, 셀레네의 머릿속에선 그동안 배웠던 지식들이 봇물 터지듯 터지고 흘러나왔다. 수천 쪽의 책장이 넘어갔다.
마왕이 그녀를 속였듯이 그녀 역시 마왕을 속일 수 있으리라.
잘 해봐야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이를 낳고 죽은 여인으로만 역사에 기록되겠지만.
마왕을 속여 세상을 지켜내는 일. 그것이 바로 적마도사 셀레네 디 샹그리아의 마지막 주술이 될 터였다.
“샹그리아의 마지막 포도주야. 계약의 내용은 잊지 않았지?”
“네.”
셀레네는 현신한 마왕 앞에 공손히 절했다. 몸을 감싼 포도주색 달마티카는 몽페라 출신 샤먼의 상징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 제 수명이 다하면, 마왕 글러토니아 님께서 대신 육체를 차지하고 생명을 연장하여 무사히 출산합니다. 그 대가로 수명을 다한 제 영혼은 곧바로 마왕님의 소유가 되어, 영혼을 잡아 두는 육각의 화롯불 ‘아타누르’에 수거됩니다.”
술자와 소환체, 양자가 동의한 계약 내용이었다.
“아이를 낳고 계약이 종료되면, 제 영혼이 떠난 육체를 떠나실 수 있습니다.”
‘아타누르’는 세계가 창조될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아주 오래된 마계의 장소였다.
시공의 열점이며, 가장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는 화로였다. 마왕은 그곳에 자신이 거둬들인 영혼들을 가두어 두었다.
“아타누르 안은 차갑지만 수정처럼 맑고 풍요로워. 네 마음에 쏙 들 거란다.”
마왕은 흡족히 웃었다. 흠향하는 왕 글러토니아는 만찬의 맛을 감별하듯 영혼의 향미를 감지했다. 진한 포도주 향이 나는 샹그리아 주술사의 영혼은 만족스러운 수확물이었다.
“허면 너의 명이 다한 뒤 네 자식이 태어나는 그 날, 마계에서 보자꾸나.”
소환진의 불꽃과 함께 글러토니아가 사라졌다. 셀레네는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안식 없는 죽음이 그녀를 기다렸다.
“로메오.”
시녀는 침상에 기대어 누운 주인에게 다가갔다.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주인은 미소를 지었다. 붉고 아름다운 저 두 눈은 언제나 맑고 다정했다.
“부탁이 있단다. 들어 주겠니?”
“부탁이라뇨…? 그저 명을 내리시면 되잖아요. 셀레네 님.”
“그러기엔 너무 무리한 일이니까.”
하지만 달리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로메오는 작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어지는 셀레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다 들은 뒤엔, 울음을 터뜨렸다.
함께 목숨을 걸어줄 수 있겠느냐. 앞으로 몇십 년이 될지 모를 세월 동안, 내가 남기고 간 사람을 돌봐 주겠느냐.
진심으로 존경하는 셀레네 님의 그런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나면 이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
제국력 309년 12월. 샹그리아 황후가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다.
“셀레네!”
그녀가 놀라울 만큼 회복했다는 소식에 황제가 찾아왔다.
그는 그동안 황후궁에 발길을 끊은 상태였다.
한번 그녀에게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니 애정은 물론 고통받는 아내를 위로할 마음마저 사라져 있었다. 후계를 낳지 못하고 죽을 셀레네 대신 어떤 여자를 새로 맞아들일지 검토까지 하던 찰나.
“몸이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이게 다 무슨 냄새지?”
코넬리우스는 방으로 들어오기도 전 미간을 찌푸렸다.
셀레네의 방은 물론 황후궁 전체를 뒤덮은 향의 정체는 포도주였다. 꿀과 약재와 향신료를 넣고 푹 달인 포도주.
뱅쇼라고도 부르는 그 음료를 셀레네는 공녀 시절부터 가장 좋아했다.
“어휴. 머리가 지끈댈 지경이군. 당장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라!”
방에는 졸인 포도주를 담은 작은 솥과 마시고 아직 치우지 못한 잔들이 가득했다. 황제의 명령대로 창문을 전부 열자, 아래쪽 정원에도 잔뜩 쌓인 오크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포도주를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거요?”
하지만 본디 아이를 밴 여인은 유독 한 가지 음식에 기묘히 탐닉하기도 하는 법. 영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역시 샹그리아 하면 포도주 아니겠나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여자가 도자기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포도주 향 때문에 투덜대던 코넬리우스는 눈을 번쩍 떴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은 갓 찍어낸 은화처럼 반짝였다.
푸석푸석하던 피부에 기묘한 생기가 돌았다. 산송장 같던 얼굴이 붉은 호선을 그렸다.
“드디어 와주셨군요, 내 사랑.”
‘내 사랑?’
셀레네가 그를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있었나?
생명의 고비를 넘던 셀레네가 이렇게 회복되다니. 그 역시 시미크의 가호가 없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코넬리우스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아마도 셀레네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다정한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모양이지.
“그대. 많이 아팠소?”
“아니에요. 제 한 몸 아픈 게 무슨 상관인가요? 그저 제가 부족하여 황손을 못 낳고 죽을까 저어하였을 뿐….”
“오, 황후.”
코넬리우스는 감동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싹싹하게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었고 몸도 호전되었으니, 새 여자를 들이는 것은 특별히 없는 일로 해줄 셈이었다.
“그 병마에서 회복한 건, 시미크의 보우하심이 분명해요. 이 귀한 아이를 무사히 낳으라는…….”
“물론 그렇겠지! 신께서 우릴 굽어살피신 거요. 셀레네. 당신은 아이를 무사히 낳을 테고, 뱃속의 우리 아이는 다음 대 클라티아의 황제가 되겠지.”
일어나 다가온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황제의 품에 안겼다. 다만 시미크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매에 가려져 있는 팔 부위의 여린 피부가 조금 문드러졌다.
사악한 존재가 신의 이름을 가증히 입에 담았기 때문이었다.
‘하, 신이라는 그자는 졸렬하기도 하지.’
마왕 글러토니아는 속으로 욕설을 읊조렸다.
몽페라에서 나고 자라 클라티아에서 황후가 된 적마도사, 셀레네 디 샹그리아는 죽었다.
그리고 셀레네의 육신을 뒤집어쓴 글러토니아는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대령되는 뱅쇼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 놈의 포도주는 대체 언제까지 끓일 테냐?”
아무리 흠향하는 왕이니 포식자니 해도, 같은 것만 줄기차게 삼켜 대니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 그만 마셔도 되겠다. 물리는구나.”
“예?”
그러자 공작가에서부터 따라온 시녀장이란 계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황후 마마. 이건 정말 좋은 음료이옵니다. 황후 마마의 체질에 맞도록 궁의 선생이 처방한 귀한 약재가 듬뿍 들어가 있지요. 조리장인 알티메 영감이 온갖 정성을 들여 푹 졸였답니다.”
“긴말할 필요 없다. 이제 됐대도?”
“이상하군요. 황후 마마. 그리도 잘 드시던 건데 갑자기….”
“…….”
아무리 마왕이라도 일이 복잡해지는 건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황후의 몸에 전혀 다른 사악한 알맹이가 들어앉았단 사실을 들키면 곤란했다.
로메오는 순간 조용해진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엔 평소 절대 보이지 않는 과장이 숨어 있었으나, 그녀를 잘 모르는 마왕은 알아채지 못했다.
“아. 혹여 술이라서 태아에게 해가 될까 염려되시는 겁니까? 걱정 마십시오. 아기씨에게 안 좋은 성분은 전부 뺐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또한,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조리장이 아주 약재의 영혼까지 달여 넣을 기세로 푹푹…”
“하, 그만 좀 하거라! 지긋지긋하군. 무슨 황후가 먹기 싫은 것까지 다 먹어야 하느냐?”
마왕이 짜증스레 언성을 높이자, 청소를 하느라 조금 떨어져 있던 메이드들까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끓인 포도주가 싫으시다고 한 거야?”
“쉬잇.”
감히 윗전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순 없으니 그들은 곧장 고개를 숙이고 할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순간 내비쳤던 어리둥절한 눈빛들은 기민한 마왕의 눈에 빠짐없이 포착되었다.
‘젠장.’
마왕 글러토니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대령 되어 오는 그 포도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예민한 코끝은 황후궁을 가득 채운 채 물러나지 않는 졸인 포도주의 눅진한 향기에 절여지고 마비되었다.
하여, 내내 자신에게 따라붙어 있는 포도주 향의 영혼을 감지하지 못하였다.
제국력 310년. 황장자, 클레멘츠 레스타 뒤싱겐이 태어나다.
“아아아악-!”
황후궁에 비명이 울렸다. 산실로 꾸며진 황후궁의 별실을 산파와 회복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샹그리아 가 출신의 메이드 하나가 연신 땀이 흐르는 황후의 이마를 닦아냈다.
‘이 빌어먹을 몸은 대체 왜 이렇게 약한 거야?’
마왕은 욕을 바가지로 삼키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도 몇몇 악마를 낳아 본 적이 있었지만, 인간이 출산할 때 겪는 고통은 고위 마족과 비교할 수 없이 극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