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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78)화 (178/218)

178화

어리석게도 외모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황제로서 모욕을 당하지도, 기껏 얻은 후계자를 도로 잃을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름답던 셀레네가 이제는 역겨워 보였다.

“너 같이 부정한 태생의 마녀를 황후로 들이는 게 아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도 셀레네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흐리터분하게 웃었다.

그들의 결혼은 황제가 그녀의 방 창문 아래 매달려 한 말에서 시작되었다.

“그대가 마녀라도 상관없어. 그대를 택한 것은 나니까.”

그리고 이제는 온전히 끝나 버렸다.

슬프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요행히도 수면 위에 오래 떠 있던 나뭇잎이 결국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는 느낌과 같았다.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

‘폐하께선 저를 사랑한 적이 없으십니다.’

한 방울 남은 기력으로 혀를 놀리고 싶었다. 스스로마저 속인 착각에서 벗어난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제 와서 혼인을 무르기라도 하려나.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셀레네는 제 남편을 한동안 그대로 착각 속에 남겨 두기로 했다.

그러면 남는 건 단 하나, 그녀 자신이었다.

가문의 영광, 부부의 사랑, 이젠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불나방처럼 쫓았지만 존재조차 희미한 것들이었다.

‘그럼, 나는 누구지?’

샹그리아 공녀도 황후도 아닌 셀레네는.

‘샤먼. 적마법사 셀레네.’

기도하고 축복하며, 소원을 이루는 자.

가문의 비술을 연마하기 위해 이른 생 전부를 바쳤다. 혈통으로 이어진 자질도 누구보다 뛰어나, 그녀는 한때 집안을 일으킬 천재라고 불렸다.

하지만 황후가 되며 그 길은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뜨거운 숨을 힘겹게 내쉬며 돌아누웠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셀레네가 계승하고 일궈낸 마법도 땅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면 그녀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몰락해 가는 공신가에서 태어났다가 반반한 외모 덕택에 황제의 눈에 든 여자로 기록되려나?

아니다. 아기는 낳지 못할 테니 어쩌면 그마저 기록되지 못할지도.

그녀의 가문과 적마법은, 시대의 명령에 의해 이제 그만 지워지고 말 것이다. 결국, 그녀의 생에 대해 알려질 만한 건 황제의 눈에 들었고 그와 결혼했다는 것뿐.

아이를 낳지 못하고 요절한 황후 따위. 금세 흩어지고 사라질 존재.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위하지 않은 삶의 결산이 이렇게도 허무했다. 그 모든 노력과 희생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끝을 위해서였나?

‘고작 이런 식으로, 사라지고… 끝난다고? 내가?’

셀레네. 그저 차올랐다 이울어 사라지는 달일 뿐인가?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몇 가지 재료로 조제한 물약을 먹었다. 샹그리아의 수백 가지 비전 중 하나로, 정령의 도움을 받아 일시적으로 몸 상태를 호전시키는 약물이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셀레네의 목표는 확고했다.

‘아이를 낳아야 해.’

어미가 심하게 앓는데도 용케 끈질기게 뱃속에 붙어 있는 이 장한 아이를, 무사히 세상에 내보내야 한다.

그것만이, 주어진 힘도 시간도 적은 그녀가, 온전히 무의미한 상태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고.’

기껏해야 꽃즙 약간을 섞어 만든 물약으로는 출산까지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셀레네는 은빛 머리 위에 사슴뿔 관을 얹고선, 황후궁 깊은 곳에 꾸려 둔 제단으로 나아갔다.

가문을 진창에 처박은 눈송이 신의 안식은 믿지 않았다.

오랜 섬김의 대가로 공멸을 내린 샹그리아의 고대신 역시 믿지 않았다.

수명의 끝자락에서 셀레네가 믿을 것은 자신의 능력뿐이었다.

“το σκοτάδι κάτω από το λάκκο……”

어둠 속.

타오르는 검붉은 초가 하얀 손에 들린 채 기이한 궤적을 그렸다.

이어서 셀레네는 단검을 집어 들고 마저 주문을 외웠다.

심연 끝의 어둠, 타오를 심지의 밑바닥.

떨어져 썩을 열매의 첫 맺힘을 바칩니다.

뿔 관을 쓴 자의 소원을 들어 주소서.

제단 위에 놓였던 가지의 작은 열매들이 단검에 긁혀 마법진 위로 떨어졌다.

후두둑.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검붉게 타올랐다.

불꽃이 사그라들었을 때, 한 존재가 조용히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샹그리아. 실로 달콤하고, 향기롭고, 오랜만에 맛보는 피로구나.”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는 오래된 영 특유의 권태로움이 느껴졌다.

셀레네는 긴장한 채 물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존재’는 연기가 뭉쳐 이루어진 것처럼 흐릿했다. 격이 높은 이계의 존재가 본모습을 가리기 위해 곧잘 쓰곤 하는 ‘모호함의 베일’이라는 마법이었다.

생각보다 강한 영이 소환된 모양이었다.

“뿔 관을 쓴 자여, 너는 감히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느냐?”

“있습니다. 강대한 영이여.”

“터무니없이 자신하는군.”

새로운 환경이 흥미로운 듯 주위를 두리번대던 영은 금세 시들시들해져선 허공에 주저앉았다.

“감히 나를 불러낸 걸 보면 재능은 있어 보이는구나. 명이 짧은 아이야. 하지만 적당히 욕심을 부리는 게 좋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내고 싶지 않다면.”

‘마계에 속한 영인가.’

수없는 세월을 견뎌 온 마계의 영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선, 그들의 흥미를 끌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악마를 소환하기에 이른 마법사들은 보통 어떤 모습일까?

절박한 사정 탓에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겁을 집어먹거나.

혹은 채 숨길 수 없는 광기에 물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셀레네는 천천히 또박또박, 영이 소환된 마법진 중앙을 향해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감당할 겁니다.”

그리고 웃었다. 고요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소환된 영은 바로 흥미를 보였다.

“…흐음?”

“제 이름은 셀레네 델핀 디 샹그리아, 뒤싱겐.”

이름이란 한 존재의 무게를 담는 주문. 많은 정보가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공개되곤 했다.

‘뒤싱겐’.

황가의 성을 듣는 것과 동시에, 영에겐 그녀의 뱃속에 든 핏줄이 유독 선명히 보였다. 황가의 피. 뒤싱겐의 피였다. 심연 같은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제가 원하는 건 이겁니다. 저를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

“무사히 살아남아 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이 육신에 숨을 붙여놓아 주세요.”

“…….”

그녀의 생명은 가물거리는 촛불이었다. 샹그리아의 비약이 아니었다면 고작 서 있는 것조차 어려울 터였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 소환령 역시 훤히 알아보았다.

“대가는 저의 영혼입니다.”

당장 바람에라도 날아갈 듯 연약한 몸이었지만, 그 말에 담긴 각오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다음 순간, 회오리바람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영의 형상이 선명히 드러났다.

풍성하게 물결치는 머리카락은 농염하게 익은 과실 같고, 또한 노릇하게 구워진 빵 껍질 같았다.

비칠 듯 얇은 옷감으로 지은 옷과 온몸에 주렁주렁 두른 금속 장신구는 남국의 고대 왕조를 연상시켰다.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여성으로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썩은 고깃덩이 같기도 했다.

이글대는 눈동자와 마주치면 마치 풍미가 과한 음식을 접한 것처럼 구역질이 올라왔다.

더하여 한눈에 이질감을 주는 요소는 목부터 시작하여 전신을 두른 붉은 문신이었다.

“제안에 응하마. 샹그리아의 마지막 포도주야.”

그리고, 무저갱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목소리.

“나는 흠향하는 왕, 포식자, 예리한 코끝의 미식가.”

초자연적 존재의 별칭은 누적되어 온 힘과 시간의 크기였다.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 벌써 몇 개나 쌓였다.

셀레네는 무언가 잘못되었단 걸 깨달았다. 거기다 그동안 공부해온 게 맞다면 분명 저 별칭들의 주인은…….

“영혼을 끓이는 화덕불 ‘아타누르’의 주인. 마왕 글러토니아란다.”

셀레네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마왕이 왜? 어떻게 하필이면 마왕이 소환될 수 있지?’

상황은 절박했고 악마의 힘이라도 빌어 아이를 낳아야 했으나, 결단코 마왕씩이나 부르려던 건 아니었다.

사용한 주문과 마법진은 마왕은커녕 고위 악마를 부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설마!’

그 이유가 짐작되는 순간, 심장이 목구멍을 뚫고 나올 듯 뛰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마족과 마찬가지로 마왕 역시 현왕 유스티온 때에 봉인되었었다.

하지만 마족의 왕은, 그 드높은 자존심에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패했다는 것을.

한 인간 마법사의 술책에 자신의 종족 전체가 묶여 버렸다는 것을.

나아가 그의 후손에게 대대로 종처럼 봉사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그래서 마왕은 스스로 소멸을 택하고, 흠향하는 왕 글러토니아로 다시 태어났다.

‘그 지독한 마왕.’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걸 참지 못해 영겁의 목숨까지 버릴 만큼 독한 존재였다. 언제고 마계의 지배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벼르고 별러 왔을 것이다.

그런데 뒤싱겐의 유일한 후계자를 품은 마법사가 황궁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소환했다. 마왕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안 돼!’

흡족한 듯 웃는 마왕 앞에서 셀레네는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모호함의 베일을 쓰고 나타난 것부터가 술수였다. 모습을 보였다면 숙련된 적마법사인 셀레네는 바로 정체를 알아보았을 테니까.

권태로운 척, 흥미 없는 척 군 것 역시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보기 좋게 걸려들었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이미 술자는 소원을 말했고, 소환령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제 와 무르기란 불가능했다.

“이렇게 격이 높은 분과 계약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셀레네는 간신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척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뇌쇄적인 마왕은 오만한 미소를 짓고선 사라졌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촛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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