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황후가 궁 안에 수상한 물건들을 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좋을 게 없으니, 가져올 수 있는 분량은 상자 하나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정도면 충분했다. 웬만한 마법 연구는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약초와 부적을 어루만지는 셀레네의 눈빛엔 애정과 설렘이 가득했다.
“셀레네. 뭐 하고 있소?”
마침 아내의 방에 들어온 코넬리우스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요즘 셀레네는 눈에 띄게 생기가 없어졌다. 말을 걸어도 들은 체도 안하는 일은 흔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핏하면 곯아떨어졌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물 뿌린 이끼처럼 살아나 있었다.
“아, 폐하.”
그를 향해 제법 밝은 미소를 띠기도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만족감에 코넬리우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작가에서 제가 쓰던 적마법 도구들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렇군.”
셀레네는 설렘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로 약초를 빻는 손절구를 조심스레 꺼냈다. 코넬리우스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상자 안쪽을 구경했다.
셀레네의 손에 익은 도구들은 소박하고 실용적이었으며, 그녀의 손 크기에 맞춰 하나같이 작았다.
‘그냥 소꿉장난 같은 것들이로군.’
기껏해야 해골바가지나 눈알 모양으로 장식된 부적 따위. 보기엔 껄끄러우나 무슨 대단한 힘이 있겠는가.
적마법은 클라티아의 건국을 도운 강력한 힘이었지만, 그의 대에 와서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 만큼 명맥이 끊겨 있었다. 그래서 셀레네의 도구를 보곤, 샹그리아와 흑마법의 악명이 적마법에 대한 편견으로 부풀려져 있다 여겼다.
‘이런 장난감 같은 거라도 가지고 놀면서 밝게 지내면 좋지. 웃으며 말하기만 해도 벌써 훨씬 예쁘지 않아.’
그러니 허락해 주어도 무방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일단 꺼릴 텐데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자신은 정말이지 완벽한 남편이 틀림없었다.
셀레네 역시 마음에 걸린 것인지 조심스레 물었다.
“저… 폐하. 황후궁에 작게나마 제단을 차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황후궁이야 황후 마음대로 써도 좋지.”
흔쾌히 허락하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 얼굴은 저를 맞이할 때보다도 기쁨에 겨워 보여, 순간 황제는 속이 뒤틀렸다.
“다만 다른 일을 하느라 황후가 가정에 소홀해지면 안 되겠지 않겠나?”
“아……!”
코넬리우스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약해진 몸은 쉽게 중심을 잃고 그의 품으로 넘어졌다.
“적마법도 좋지만, 너무 매몰되진 않도록 하게. 어차피 곧 황자를 출산하고 양육해야 할 테니 그럴 시간도 없겠지만.”
“…….”
“그리고… 물약을 만드느라 그대의 남편을 홀로 내버려 두지도 않아야 할 거야.”
“!”
등줄기를 쓸어내리는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만큼, 셀레네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
‘아, 역시.’
그의 눈과 귀는 다시 닫혀 있었다. 셀레네의 인생을 담은 주술 도구들도, 그것을 보는 그녀의 감정에 대해서도. 짧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린 뒤 인식의 밖으로 밀어놓아 버린다.
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품 안에 안긴 몸의 감각. 키스를 받아들여 주는 입술. 뱃속에 든 아기.
‘그는 황자라고 믿지.’
셀레네는 냉소를 삼켰다. 어떻게 이 남자의 감정이 사랑일 거라고, 단 한 순간이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걸까?
만약 사랑이라면. 그리도 내가 좋다면.
어째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 한 번도 묻지 않는가.
“폐하께선 잘 해주시니?”
티르케가 돌아가기 전 던졌던 질문이 생각났다. 당시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심해. 뒤싱겐은 단 한 번도 우리 가문에 의리를 지킨 적이 없잖니.”
의리조차 없는 이에게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가.
코넬리우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극진했다. 황후궁에 들이는 물품이 끝이 없고, 그녀를 살뜰히 보살피라 엄명을 내렸다.
관심과 보살핌은 사랑인가?
‘사랑은 무슨.’
그는 셀레네 디 샹그리아라는 예쁜 인형을 사랑하는 놀이에 취해 있다.
그 ‘사랑’이란 자신이 정한 대로. 스스로 그래야 한다 여기는 내용과 형식대로.
거기에 살아있는 셀레네의 생각은 반영되지 않는다. 그가 중하게 여긴 건 오로지 자신의 생각이었다.
지고의 권력자이자 최고의 남편인 그.
손아귀에 넣은 모든 것을 단 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바칠 순수함까지 갖춘 지배자.
셀레네를 사랑하는 코넬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그러한 모습과 사랑에 빠졌다.
어디에 봄의 폭풍이 불고, 어디에 아름드리나무가 자란단 말인가. 아무것도 없었다.
‘이 결혼에 무슨 의미가 있지?’
서로 사랑한 적이 없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황후가 되었으나, 그녀가 자리에 있는 동안 그 한 줌어치 남아 있던 영광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니 더 이상은 이 모든 걸 견디고 싶지 않다.
‘돌아가려면.’
제 안색이 안 좋을 때마다 로메오가 강력히 주장하던 대로, 황후 위를 내려놓고 몽페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사슴뿔 관을 머리에 얹고 산기슭의 초가집에 살며 사람들의 소원을 위해 춤추고 빌자. 다시, 날 때부터 제 본분이라고 여겼던 적마법사의 삶으로.
하지만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어.’
시시각각 몸을 불려 가는 새 생명의 존재가, 불현듯 공포로 다가왔다.
샹그리아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비술조차도 없던 생명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셀레네는 모든 것을 처음 접하는 아이처럼 제 배를 낯설게 만져보았다.
‘어떻게?’
기억은 숱하게 반복되었던 잠자리로 거슬러 올라갔다.
제 몸의 감각과 움직임이 낯설어 혼란스러워하는 셀레네의 목소리는 황제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사납게 움직이며 내달렸다. 살갗이 마주 닿아 있었고, 셀레네를 누르고 붙잡았으나 그는 셀레네가 안 적도, 본 적도 없는 쾌락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아들을 낳게 될 거요.”
끝에 가서는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 혼자만의 여운에 깊이 젖은 목소리를 되살리자, 갑자기 구역질이 몰려왔다.
“우욱.”
“셀레네?”
꺼림칙했다. 마치 그가 말한 대로 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오랜 기간 저주와 술책을 이어받아 온 샹그리아의 피에는 저주가 깃들었단 소문이 무성했다. 거기다 친족끼리 붙어먹은 업보를 피하지 못해, 낳는 자손마다 쉽게 병들고 약하다고.
‘제대로 된 아기가 태어나긴 할까?’
아이가 무사하지 않다면 온 나라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감히 황족의 씨를 지키지 못한 저 샹그리아 여자를 당장에 내쫓으라고 부르짖겠지.
무사히 낳는다면 더욱 난감했다.
황제는 그녀가 잉태한 아이가 제국을 소유하게 될 거라 장담했지만, 샹그리아의 적대자들이 과연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까? 그녀와 아이가 갖게 될 것이 많을수록, 적의의 무게는 산더미처럼 쌓여 감당할 수 없어졌다.
한 번 자각하자 공포의 무게는 점점 커졌다. 셀레네는 도망치고 싶었다. 스스로의 지위와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웅크리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뿐이었다.
구토와 무력감이 지속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줄어들었다. 나날이 부르는 배를 부여잡고 셀레네는 말라 갔다.
‘원래 이렇게 힘든가?’
워낙 작고 약한 황후였다. 거기에 초산이라 과연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는 임신 초기부터 있었다.
그러나 신체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하루하루가 예외 없이 힘들게 지나갔다.
아기를 낳는 것은 가장 힘든 일이라고들 하지만,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날로 흐릿해지던 정신이 어느 날은 깜빡이다가 온전히 어두워져 버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였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시야는 자꾸만 빙글빙글 돌았다. 곁에 있는 사람이 황제란 걸 깨달았을 땐, 그는 궁의를 향해 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폐하. 황후 마마의 병은…….”
코넬리우스는 몇 번 더 소리를 질렀고, 셀레네는 머릿속이 헤집어지는 느낌에 고역을 치렀다. 다행히도 얼마 후 다시, 감각이 휩쓸리며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잔인하고 아늑한 파도가 셀레네를 삼켰다가 다시 토해놓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혼몽한 현실과 날카로운 안식 사이를 떠돌다가 불현듯 일어났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국력 309년 여름, 황후가 중병에 걸리다. 출산이 가능할지도 불투명하다. 황실은 어떻게든 치료하기 위해 매달렸으나, 백약이 무효하다.
“왜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코넬리우스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은 그의 손아귀 안에서 장난감처럼 조잡하고 약해 보였다.
“……나에게는 또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셀레네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약한 숨소리는 꼭 기이한 바람소리 같았다.
벌써부터들 신나게 떠들어 댔다.
“샹그리아의 마녀를 황후로 들였으니 마땅한 불행이지요. 불신자에게 신벌이 내리는 건 당연한 일.”
“그녀를 버리지 않으면 저주가 황실로 옮겨 붙을 겁니다. 보십시오. 애써 얻은 황손이 벌써 어미 탓에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적의는 샹그리아를 벗어나, 그동안 그들을 적대하면서까지 셀레네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황제에게 미치고 있었다. 코넬리우스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도 처음엔 아픈 황후를 두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은 혀를 베어버리리라고 외쳤다.
하지만 소용없는 약과 치료법들을 무수히 시험하고 폐기하며, 그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는 신하들과 입씨름하며. 종국엔 그 역시 지쳐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럴 리 없다, 아닐 것이라 제쳐 두었던 생각이 의혹이 되어 기어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찌 그렇게 순식간에 빠져들 수가 있었지?’
아무리 생김새가 예쁘다고 해도, 처음 봤던 그 순간의 무시무시한 매력은 마법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가증한 샹그리아의 핏줄이, 권력을 되찾고자 사술을 쓴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