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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76)화 (176/218)

176화

“그 여자는 마녀입니다.”

“불온하도다, 이단자 샹그리아여! 연구밖에 모른다지만 틀림없이 흑마법도 구사할 터. 가까이 두면 폐하께 화근이 될 것입니다.”

황제인 제 귀에까지 험한 말이 도는데, 본인에게는 오죽할까. 그는 셀레네의 눈가에 있는 그늘을 발견했다.

‘가엾게도.’

적어도 그의 열정은, 쓸데없는 말들에 흔들리는 대신 셀레네를 연민할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그대가 마녀라도 상관없어. 그대를 택한 것은 나니까.”

“……폐하.”

셀레네의 눈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그 붉은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담기는 순간이었다.

코넬리우스는 자신이 있었다.

이 작은 사람 하나 지키는 일이 뭐가 어렵겠는가.

감히 제가 선택한 여자를 받들지 않는다는 건, 황제인 자신의 선택에 반발하는 것.

그런 괘씸한 자들은 당장에라도 쓸어내 버리고 말리라. 그는 위험하게 미소 지었다.

제국력 308년. 황제 코넬리우스 로도스 뒤싱겐이 샹그리아 공작의 차녀 셀레네를 황후로 맞이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황제는 원하는 혼인 상대를 고를 권리가 있네.”

몰락한 이단 가문의 딸을 황후로 맞이함에 리나트 후작을 비롯한 몇몇 인사가 반발하다. 황후를 비방하여 끌어내리기 위해 은밀히 유언비어를 퍼뜨리다.

“샹그리아는 교단이 규탄한 이단 가문이 아닙니까. 국혼은 신실한 상대와 이루어야 하는 법입니다. 다시 생각하소서.”

“다 경들 가문 여자를 셀레네의 자리에 세우려는 수작들인 걸 모를 줄 아나? 발칙한 자들 같으니.”

이에 대응해 황실은 리나트 후작 등의 근황을 면밀히 조사하다.

당사자는 물론 인척 관계에 있는 이들까지 범위를 넓히니 굵직한 허물 하나 없는 자가 드물었으나, 모두 엄중히 처벌하다.

“폐하…! 폐하. 제발. 자식 없는 제겐 저 녀석이 유일한 후계자입니다. 철없고 경우 없긴 하여도 다 그렇게 가르친 제 탓입니다. 제, 제발…! 제발 선처를!”

날벼락처럼 죄상이 드러나자, 요직에 있던 이들은 줄줄이 파직을 당하다. 세력 있는 친족을 믿고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자들도 족쇄에 묶여 끌려 나오다.

“제아무리 대귀족이 세력을 자랑하고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감히 황실에 반기를 들어선 안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황후께 불손한 자들을 폐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높은 관을 쓴 황후는 옥좌 위에 핏기없는 인형처럼 창백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걱정 없소. 셀레네.”

달콤하게 속삭이며 그녀를 끌어안는 손에는, 제 아내를 비방하던 자들을 숙청한 피가 묻어 있었다.

이 과보호가, 이 맹렬한 배타가 사랑인가?

귀족들이 잠잠해지자 이젠 평민들의 차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시미크교. 평민 계층에서 훨씬 널리, 강하게 믿어지다.

“별일이로군. 황후를 골라도 어쩌면….”

“시미크시여. 마녀의 손에서 클라티아를 구원하소서!”

샹그리아 출신의 적마법사 황후, 금지된 주술로 황제를 미혹했다는 소문이 돌다.

시정의 잡지에 황후를 비난하는 풍자화가 실리다.

이에 황실모독죄가 적용되어, 황제가 직접 화가를 처형하도록 명하다.

“…뭐라고?”

“황후 마마. 괜찮으십니까? ……마마, 황후 마마! 어딜 가시려는 건가요?”

처형은 즉결 압송과 재판으로 신속히 이루어지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광장으로 나오던 황후 셀레네, 잘려 내걸린 화가의 목을 보고 정신을 잃다.

“셀레네.”

깜빡.

눈꺼풀이 열리고 붉은 눈이 드러나면, 정신을 잃기 직전 보였던 것이 아른거렸다.

목이 잘린 화가의 부릅뜬 푸른 눈.

셀레네는 그것이 환상임을 안다. 하지만 눈을 감아 가라앉히려 해봐도, 다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그 선뜩한 원망과 분노가.

“셀레네.”

그녀는 샹그리아였다.

샹그리아를 위하여 황후 자리에 앉은 걸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껏 이 자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는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을 내리는 것이 샤먼일진대. 진정한 샹그리아라면, 샤먼의 임무를 다해야 하는 법인데.

“셀레네. 왜 대답하지 않소?”

멍하니 천장을 보던 셀레네가 중얼거렸다.

“화가를 왜 죽이셨나요?”

“그야 황후를 모욕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

“그자의 목이 아직 광장에 걸려 있어. 눈이 있는 자라면 이제 그대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거요.”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 있지?’

하지만 셀레네는 참담함을 억눌렀다. 생각하고, 말하려고 애썼다.

“폐하. 황공하오나 그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던 듯합니다.”

황제의 위엄으로 당장 표면에 드러난 잡음을 잠재울 수는 있다. 하지만 억눌린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에 대한 불만은 샹그리아 가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 만약, 화가를 잡아 죽이는 대신 자비를 보이며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면. 그녀가 황후로서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자리 잡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가 설명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우리 황후는 마음이 여리기도 하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은, 읍…!”

그저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아 어르고 달래기 바빴다. 입맞춤은 부드럽고 열정적이었지만, 그녀의 언어를 앗아가 버렸다.

“폐하. 그러니까 저는.”

“쉬이. 이제 걱정하지 마시오.”

“…!”

숨결이 얽히고 난 뒤. 지척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은 고압적이었다.

마치 들어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은 듯했다.

형형한 눈 안에 존재하는 이는 오로지 코넬리우스 뒤싱겐, 그 자신뿐이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셀레네의 피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목구멍에 잔뜩 맺혀 있던 말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걱정 마. 귀족이건 평민이건, 수도민이든 지방민이든. 감히 그대에게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할 테니.”

녹아들 듯 감미로운 목소리에도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듯 얼굴을 가까이해 키스했다.

축축한 점막끼리 치대고 떨어져도, 셀레네는 정신이 어딘지 딴 곳에 가 있는 듯해 보였다. 코넬리우스는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그녀의 몸에 올라탔다.

“셀레네.”

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잡아당기자 그제야 붉은 눈이 그를 보았다. 황제는 씩 웃었다.

“내가 그대를 많이 사랑하는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라면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입맞춤에도 응하지 않는 여자가 눈길 한 번 주었다고, 짜증이 눈 녹듯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사랑인가요?”

“그렇다 하지 않나.”

침상 위에 뉘어진 여자는 공허하게 웃었다.

귀가 먹어 버린 이 정열은 사랑인가?

제국력 309년 봄, 황후 셀레네가 회임하다.

황후궁은 연약한 임부를 위해 세심하게 꾸며져 있었다.

셀레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까 봐, 혹여 손에 닿은 기물에 다치기라도 할까. 모난 것은 갈아내고 날카로운 것은 치웠다.

푹신한 쿠션을 잔뜩 놓은 의자 주변엔 진귀한 과일과 공들여 빚어낸 디저트들이 가득했다.

“잘 먹어야 건강한 황자를 낳지.”

황제는 한쪽 팔로 셀레네를 안은 채, 과자 속에 든 따뜻한 달걀 크림을 숟가락으로 떠서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세상에. 어찌나 다정하신지…….”

“황후 마마가 부러워요. 저는 언제 저렇게 사랑받아 볼까요?”

시녀들의 속삭임이 공기 중에 둥실 떠다녔다. 셀레네는 그저 무력한 아기 새처럼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공포로 잡음을 잠재운 황제의 조치는 효과가 있었다. 황후에 대한 비난 여론은 적어도 겉으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코넬리우스는 스스로 사랑에 빠진 노예인 것처럼 행동했다. 달콤한 말을 했으며 수시로 선물을 보냈다.

골을 지끈대게 하는 모든 생각을 관두고 나면, 안온하고 달콤한 순간의 한복판이었다. 여인이라면 한 번쯤 꿈꿔 볼 만한 시간들.

‘나를 사랑한다고?’

품 안에 가만히 기대어 남편의 눈을 들여다보노라면 이따금씩. 견고한 암석 같던 눈빛에 실금 같은 균열이 엿보였다. 그것은 무언가의 전조였다.

명확하고 선명한 세계에 생겨난 지독하도록 낯선 것.

흉곽 안쪽을 간지럽히는 미풍.

아주 강하게 자랄 수도 있는 아름드리나무의 씨앗. 가냘프고 고우며 섬뜩한 것.

‘나를 사랑해서 이러는 거라고?’

날로 힘이 빠지는 몸처럼 약해지는 정신을 따라, 그냥 그렇게 믿어 버릴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도,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보려 하지 않는단 것도, 이만 외면하고 잊을까.

저것을 사랑이라 믿어 버릴까. 그의 폐를 기어 다니는 실바람이 기어이 와글와글한 봄을 몰아 오고야 말 거라고.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고들 하니까. 어쩌면…….’

약한 손힘이 절박하게 자신을 붙들자, 코넬리우스는 낮게 웃음 지었다. 그의 눈 속에 떠다니는 가느다란 균열이 몸집을 불렸다. 셀레네는 그것을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만약.

씨앗이라 믿었던 것이 그저 쭉정이라면?

보잘것없는 바람은 그저 잦아들 뿐이고, 온다고 믿었던 봄은 소식도 없이 요원해, 그저 언 땅을 멀뚱히 바라보게만 된다면.

그 얼마나 절망스럽고 막막할까. 자신의 믿음은 얼마나 바보 같아질까.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그다음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셀레네는 노곤한 몸을 다시 얕은 잠 속에 놓아 버렸다.

셀레네의 앞에는 주술 도구가 가득 담긴 상자가 있었다.

“매양 주술만 파고들던 애가 종일 손 놓고 누워만 있으니. 병이 날 만도 하지. 안 그래?”

임신한 황후가 무기력해졌다는 게 알려지자, 친언니인 티르케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가주인 칼론이라면 딸이 궁정에 맞는 교태를 부리며 사랑받길 원할 뿐, 음산한 적마법 장비들을 만지는 황후 따위 환영받을 리 없지 않냐며 반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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