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런데, 그 둘째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셀레네 디 샹그리아. 일과 외의 시간엔 주로 무얼 하지?”
석류 한 알 같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황제는 그 모습에 집중하다가 하마터면 대답을 놓칠 뻔했다.
“적마법과 가문의 술법을 연구합니다.”
“아.”
그녀를 눈에 담으면, 기이하게도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저항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아마 누구든 그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넬리우스는 가볍게 웃었다.
“연구라. 제국 최고의 미색이 먼지 날리는 책 사이에 묻힐 뻔했구나.”
당연히 칭찬이었다. 아울러 내 눈에 그대가 제일 예뻐 보인다는 뜻을 비치려는 흑심이었다.
그러나 셀레네는 수줍은 듯 웃거나 흰 뺨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는 대신,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다.
“황공하오나 제가 미욱하여 성심을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음?”
“책은 지식의 보고이자 마음의 양식이 아니던가요. 그사이에 묻히는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대는 참 재미있어.”
아무래도 저 여자는 겉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책에 파묻히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색다르군.’
분첩과 의상실 카탈로그만 종일 뒤적여 대는 부인네들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의 여자가 친정의 특색대로 마법 연구를 하며 소일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코넬리우스는 셀레네의 얼굴 앞에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한편 셀레네는 여전히 황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 폐하께선 위대하신 분이니까.’
성심을 이해하려 애쓰지 말 것. 가문의 부흥을 위해 몸 바칠 것. 셀레네가 일찍부터 배워 온 것들이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대뜸 청이라. 무엇이지?”
“저의 집안과 관련한 건입니다.”
아버지는 저를 통해 가문을 복권하길 원하니, 여기서 그 이야길 해야겠지. 황제와 독대할 기회는 흔하지 않으니까.
물론 칼론이 셀레네에게 원한 행동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요령을 부리는 방법도, 교묘히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 원하는 결론으로 이끄는 방법도 몰랐다. 배운 게 없었다.
“샹그리아 가문은 초대 때부터 황가를 충실히 섬겼으나, 지금만큼 저희가 힘을 쓰지 못하는 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코넬리우스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놀란 눈으로 입을 다물고 붉은 눈동자를 데구룩 굴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대의 눈앞에 있는 자가 곧 제국법의 공정한 집행자가 아니냐. 샹그리아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면, 자연히 헤아려 알맞게 처리할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허면, 이만 장소를 옮겨 볼까? 친히 황궁을 구경시켜 주도록 하지. 그 뒤엔 오찬을 들고 가도록 하게.”
여인은 순순히 그에게 손을 내맡겼다. 코넬리우스는 그 조그만 손을 이끌었다. 고분고분한 젊은 사슴의 목덜미를 문 맹수라면 이러한 기분일까. 임박한 포만감.
이 흡족함은 사랑인가?
“어떠냐. 셀레네. 수확은 있었겠지?”
“죄송해요, 아버지.”
“뭐? 너 설마 황제 폐하 앞에서 실수라도 한 게냐? 널 싫어하는 티를 내시던?”
“그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문제냐?”
칼론은 찌푸린 얼굴로 딸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도 많이 혼란스러웠겠지. 하지만 황제 폐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사내가 아니냐. 그분과 잘 지내도록 하거라. 내 말을 알겠지?”
셀레네는 샹그리아의 위상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칼론은 벌써 데뷔 무도회 때의 굴욕 정돈 씻어 버린 것처럼 콧대가 높아져 있었다.
* * *
황제는 자주 그녀를 불렀다. 한 달이 지나자 셀레네 디 샹그리아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영락한 가문의 딸이라며 조롱하는 시선은 사라졌다. 하지만 차라리 그 조롱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조롱하던 바로 그 귀족들이 앞다퉈 대문을 두드렸다. 선물 보따리를 싸 와서는, 곧 샹그리아에서 8대 만에 황후가 나오지 않겠냐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리고 저택을 나와서는 안면을 바꿔 혐오와 질투를 쏟아냈다.
“가주 칼론이라는 자는 어찌나 천박하던지. 온갖 아부를 그대로 믿고 광대뼈를 끌어올리는 꼴 보았나? 아부도 들어 본 사람이 안다고, 그 몰품위를 보면 왜 3대 세력가에서 밀려났는지도 알만하더군.”
“장녀는 왜 그 꼴이람? 걸어 다니는 시체인 줄 알았지 뭐예요. 여자애가 그래서 멀쩡히 시집이나 가겠어요?”
“쓰는 물건들도 낡았고, 유행에 뒤떨어져 촌스럽기 그지없어요. 정원을 뒤덮은 그 안쓰러운 리코리스는 또 어떻고요? 요즘 누가 리코리스를 심는다고.”
“그 공녀의 취향이라지.”
“웃겨. 음산한 꼴이 저를 닮긴 하였군.”
“솔직히 그리 예쁜지도 모르겠던걸. 머리색과 눈 색이 특이할 따름이지. 그런 색이 나오는 것도 혈육끼리 더러운 짓을 해서라던데?”
“샹그리아가 힘을 되찾아보겠답시고 한 것 중에 떳떳한 게 있던가? 근친혼으로 혈통을 보존해, 금서를 복원해, 빚내고 저당 잡혀서 흑마법 물품까지 있는 대로 사들였다더군…….”
“교회의 판단이 오히려 자비로웠지. 망할 일만 남은 가문이었는데. 폐하는 대체 왜 저런 여자를 고집하시는가?”
[언어는 의미를 구축하는 주문이며, 주문은 이름으로 이루는 약속이다. 이처럼 이름이란 주문의 토대가 되는 것인데, 모든 언령의 주술에서 이름이 특정하는 대상물은 술자와의 거리가 가까운 것에 우선한다.]
“…가까운 것에 우선한다.”
마법의 황금률이며 기본적인 지식이지만, 셀레네는 부러 소리 내어 읽으며 책에 밑줄을 쳤다. 손때 묻은 마도서엔 벌써 색색의 밑줄이 여러 번 그어져 있었다.
통째로 외우고도 남을 만큼 많이 본 책이지만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황제가 왜 자꾸만 부르는지. 그녀를 보는 눈빛과 태도가 어떤 의미인지.
나아가 자신이 이미 가문을 다 일으켜 세운 것처럼 기세등등해 하던 아버지의 태도는 무엇이었는지.
천천히 깨달았을 땐, 주변의 선뜩한 악의들이 흘러와 그녀의 귀에까지 넘실거리고 있었다.
방 청소를 하던 하녀가 산양의 두개골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려놓았다. 적마법의 의식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토템이었다.
램프 불빛 아래, 마른 천으로 닦인 먼지가 허공에 가볍게 피어올랐다. 셀레네의 붉은 눈이 그 궤적을 쫓았다. 문득, 이젠 익숙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국 최고의 미색이 먼지 날리는 책 사이에 묻힐 뻔했구나.”
저 먼지는 황제가 일컬은 책 먼지와 무엇이 다를까.
“황제가 셀레네 님을 행복하게 해줄까요?”
하녀, 로메오가 물었다.
‘폐하’를 붙여야 한다, 수도에선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일러도 별 소용은 없었다. 아직 어린 로메오의 진갈색 눈에 황제를 향한 경외심이라곤 쥐뿔만큼도 없었다. 그녀가 경외 비슷한 감정을 품는 유일한 대상은 다름 아닌 셀레네였다.
“여기서 내 행복은 중요하지 않아. 귀족은 행복을 찾기 위해 혼인하지 않거든. 우리 샹그리아 가문처럼 되찾을 게 많은 집안이라면 더더욱.”
“저에겐 셀레네 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데요.”
“고맙구나.”
그 부드러운 감사가 상냥한 어조의 묵살이라는 걸, 하녀는 잘 알아챘다. 귀족들은 참 골치 아프게도 살았다. 그놈의 가문, 그놈의 영광.
차라리 다 죽어 가는 샹그리아가 사라져 버린다면, 아가씨도 자신을 위해 살게 되지 않을까?
로메오가 방을 나서고 얼마 뒤, 창문 쪽에서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놀라서 창을 연 셀레네 앞에 풍성한 꽃다발이 들이밀어 졌다. 코를 찌르는 향내가 훅 끼쳤다.
“안녕, 셀레네.”
“…폐하?”
대제국의 황제가 규방 별채의 외벽에 매달려 있었다.
밤바람이 그의 금발을 헤집었다. 땀에 살짝 젖은 얼굴은 쾌활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대가 보고 싶어서 왔다.”
“…….”
고귀하신 손으로 직접 꺾어 엮은 것인지, 꽃대의 길이는 제각각이고 묶은 솜씨도 엉망이었다.
“황제 폐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최고의 사내가 아니냐.”
객관적으로도 코넬리우스 로도스 뒤싱겐은 근사한 남자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는 샹그리아에게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줄 만한 모든 것을 가졌다.
그럼 된 걸까?
‘다만, 그것을 위해…….’
숨을 쉬고 걸어 다닌다는 이유 하나로 미움받는 경험. 존경받는 몽페라의 공녀였던 시절엔 상상도 못 할 것들이었다.
황후가 된다면 더욱 심해지리라. 기반을 얻지 못한 샹그리아로부터 보호받을 생각은 접어야 했다.
로메오 앞에선 잘난 듯 말했지만, 과연 그 모든 것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셀레네.”
오로지 샹그리아를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가?
“셀레네. 어찌 눈물을 보이지?”
“……! 아, 이건.”
그녀는 눈밑에 흘러내린 더운 것을 급히 닦아냈다.
“내 선물이 울 만큼 감동적인가? 아니면 들고 온 사람 쪽이 반가운 건가?”
황제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기뻐서 운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착각이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셀레네가 고개를 끄덕이자, 코넬리우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영웅담을 보면 이런 상황에선 레이디가 키스를 건네던데.”
꽃다발을 들었던 한 손이 뻗어져 왔다.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그 손길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맑게 빛나는 은발이 쏟아져 황제의 뺨을 간질였다.
뜨거운 숨결이 은밀히 오갔다. 여린 점막을 충분히 맛본 황제는 열락에 젖어 속삭였다.
“그대를 봐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달려왔다. 눈앞에 이 얼굴이 아른거리더군.”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셀레네가 미소 비슷한 걸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눈부시도록 찬란했다.
그러니 황제가 그 너머의 근심을 발견한 건 놀라운 일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
귀족들 사이에서 셀레네에 대해 어떤 말이 도는지, 그 역시 익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