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74)화 (174/218)

174화

“듀프레 후작이 괜찮겠군. 붉은 머리를 가졌으니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게야. 가문 대대로 속이 꽉 막혀서 융통성이라곤 없는 검사다만, 남편 삼기엔 어느 정도 듬직하겠지.”

“…….”

급히 부른 의상실 사람들이 옷과 보석이 포장된 상자를 들고 그들 사이를 바삐 오갔다. 귀족 명부를 뒤적이던 칼론이 또다시 소리를 높였다.

“아님, 그보단 못하지만 베일리스 후작 영식은 어떠냐? 차남이지만 작위를 물려받게 될 게 거의 확실해.”

“그 남자는 스타테일 영애 록사나를 좋아한다고 몽페라까지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딴지가 걸렸다. 피곤한 듯 늘어지지만 확실하게 뾰족한 비아냥이 담긴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중서부의 샹그리아 나부랭이가 난데없이 수도에 튀어나왔는데. 그걸로 모자라 저 어린애에게 남의 남자를 빼앗았다는 불명예까지 안기시려고요?”

“뭐?”

“대단하네요. 아버지. 아예 조슈아 페리윙클에게도 교태를 부려 보라고 하시지 그래요?”

조슈아 페리윙클은 당시 페리윙클 공이 된 지 10년이 넘었고, 나이는 셀레네의 두 배가 넘어갔다.

이왕 딸을 비싸게 팔아넘길 물건 취급하시는 거, 아예 지불할 능력이 충분한 유부남에게도 들이밀어 보는 게 어떠냐는 비아냥이었다.

“티르케!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도무지 도움이 되는 소리라곤 하는 법이 없군.”

칼론은 어김없이 역정을 냈다. 불만 가득한 눈가에 그늘이 진 티르케는 깡마른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아, 진짜 피곤해.”

“게다가 그자는 페리윙클이 아니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페리윙클은 안 돼. 설령 샹그리아가 기둥뿌리까지 다 털려서 누구에게든 개처럼 기며 빌어야 할 상황이 온다고 쳐도, 페리윙클은 안 된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말지!”

샹그리아는 특히 페리윙클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정작 자신들의 가세를 흡수하고 중부 및 서부의 가문들과 3대 세력 가문의 자리를 받아 간 건 베일리스였지만.

‘마법’이란 분야의 대세를 채어가 자신들의 번영을 차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원념 탓이었다.

티르케는 고개를 저으며 슬리퍼를 꿴 발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셀레네는 언니의 말에 공감했다. 피곤했다.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이럴 시간에 책을 읽었으면 벌써 고서 세 권쯤은 속독했을 것이다. 가문에 비치된 적마법 책은 이미 전부 읽었지만, 그래도 지식이란 꾸준히 계속 공부해야만 제 것이 되어 머릿속에 남는 것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새로 고안한 의식의 결과를 확인하러 어서 가 봐야 할 터. 드레스니 남자니 하는 이런 것들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마침내 시작 시간이 되었으나, 데뷔탕트 무도회에 당도한 손님은 없다시피 했다.

손님 대신 도착한 건 이런 식의 거절 편지들이었다.

[초대해 주신 건 감사하오나 귀댁의 후광에 비해 한없이 약소한 주제라 감히 참석할 수 없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샹그리아 백작가에서의 만남을 고대하겠습니다.]

[빛나는 자리에 초대해 주신 걸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저희 일가의 몸이 좋지 않아 불참하게 되었습니다. 후일에라도 샹그리아 남작영애를 소개받을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칼론 샹그리아는 엄연한 공작. 그것도 절대로 헷갈릴 수 없는 개국 공신 가문이었다. 한두 명도 아닌 단체로 작위명을 틀린 저의는 이러했다.

‘아직도 공작가라고 불러 줘야 하나? 남은 건 옛 이름과 조그마한 영지뿐인 저들을. 샹그리아 자작, 샹그리아 남작 정도면 적당하지 않나?’

실제로 세가 충분한 남작이나 자작이라면 당시의 샹그리아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런 미친 자들!”

칼론은 입에 거품이라도 물 기세로 화를 냈다.

셀레네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텅 빈 댄스홀에 서서 기다렸다. 시간이 지루하고 더디게 흘러갔다.

언제나 기력 소모를 호소하는 티르케는 진작 들어가 버린 후였다.

성을 내던 칼론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른 뒤. 셀레네는 미적지근해진 홀을 빠져나갔다.

하늘은 차가웠다. 어느덧 새벽녘이었다. 오늘 하려던 연구는 아무 진척 없이 내일로 미뤄야만 하겠다.

초자연적인 힘과 지혜를 통해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샤먼’이라고도 불리는 적마법사들의 목표였다.

셀레네는 그 임무에 자부심을 느꼈다. 시미크 교가 아무리 그 마성을 비판하더라도, 선한 마음가짐이 바탕이 된다면 추호도 부끄러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칼론 가주는 인맥을 통해 권력을 되찾는 데 급급할 뿐. 샹그리아의 근본은 잊은 것 같았다.

가문 내의 다른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대했던 과거의 힘에 집착해 무리한 일들을 저질렀다.

그들은 흑마법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고대의 흑마법은 위력이 파괴적이었으나 그만큼 떳떳하지 않은 재료와 위험한 방법이 필요했다.

마력을 다루는 샹그리아의 능력은 혈통에 크게 좌우되었으니, 가계도에서 멀리 있는 자손들부터 끼리끼리 맺어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강한 마법사를 키워내어 페리윙클에 지지 않으려던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샹그리아의 이름만 더 더럽혀지는 형국이었다.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있을까?’

겹겹이 조이고 두른 속옷은 몸을 축 늘어지게 했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원단의 드레스는 새벽공기로부터 체온을 지켜주지 못했다.

셀레네는 그저 몽페라로 돌아가고 싶었다. 공작이 아니면 어떻고, 세력 가문이 아니면 어떤가? 원래 샹그리아는 그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저 샤먼일 뿐이었다.

“샹그리아 공녀?”

아.

수도의 사교계에는, 연회가 파하기 직전 잠시 들러 얼굴을 비추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셀레네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 보셨다면 좋아하셨겠어.’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누가 봐도, 이 몰락해 가는 가문의 저택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화려했다.

어떤 조명도 딱히 필요 없을 정도의 금발이었다. 사내답고 잘생긴 눈매 깊숙한 곳에 강렬한 자색 눈동자가 자리했다. 셀레네는 그것이 현 황제 코넬리우스의 특징이라는 걸 너무 늦지 않게 알아챘다.

데뷔탕트인 샹그리아 공녀로서의 인사가 먼저일지, 클라티아의 태양을 향한 경배가 먼저일지 고민하는 동안.

자색 눈동자 안에 셀레네의 모습이 담겼다. 새벽녘을 한밤중같이도, 한밤을 한낮같이도 만드는 달이었다.

그렇게 여덟을 셀 정도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으난, 그 찰나는 많은 일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미래가 만들어지고 어떤 장래는 소멸했다.

사납게, 갈래갈래 퍼져나가는 어둠과 희미하게 가물거릴 빛이 있었다. 운명과 명운과 결국이 엉키고 잘려나가고 부서져 내렸다. 생사와 은원이 맺어졌다. 누군가의 살점과 영혼인 것들이 피가 고인 웅덩이 속으로 조각조각 잘려 나가떨어졌다.

그중에 어느 하나 돌이킬 수 없는, 폭발점과 같은 이것을 남자는 사랑이라고 여겼다.

“내가 너무 늦진 않았나 보군. 이렇게 오늘의 주인공을 만났으니.”

황제는 웃었다. 한창때 남성의,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 * *

황제가 셀레네 디 샹그리아를 황궁으로 초대했다.

그 공녀의 사교계 데뷔가 이렇다 할 손님도 없이 쓸쓸하게 치러졌으리라. 망신을 당한 샹그리아는 앞으로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하리라고, 그늘에서 키득대며 기대하던 이들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황제가 그날 샹그리아 가에 갔었다고? 게다가 공녀를 초대해?’

젊은 황제의 정실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그리고 여태껏 그가 각별히 관심을 보인 귀족 영애는 없다시피 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불쾌감과 질투심으로 날을 세운 채 그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잘했다, 셀레네!”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연하게도 칼론이었다.

“제가 뭔가 의도한 건 전혀 없었어요. 아버지.”

“그게 중요하냐?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 널 눈여겨보셨다는 게 중요한 거지. 더욱 예쁘게 꾸미고 가거라. 폐하의 마음에 너를 확신하게 각인시키고 오도록 해.”

무도회 날 저녁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하녀들이 그녀에게 달라붙어 반짝이는 가루와 하늘거리는 비단을 덧발랐다.

그리하여 황궁에 나타난 셀레네는 지상에 떨어진 별 같았다.

“저 여자인가?”

“확실히 얼굴은 반반하군그래.”

지나가던 사람들은 넋을 잃었고, 그녀를 적대하던 이들조차 할 말을 잊었다가 한참 뒤에야 쑥덕였다.

“무슨 짓을 했기에 하룻밤 사이 황제의 마음을 얻었을지?”

셀레네는 앞만 보고 걸었다.

“왔구나, 그대.”

마침내 셀레네를 다시 만난 황제는 몹시 흡족했다.

셀레네의 데뷔탕트 파티 날, 그가 조용히 나타났던 건 다분히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기울어 가는 샹그리아의 가세에 쐐기를 박은 사건은 선황제 때 시미크 교단으로부터 받은 이단 판정이었다.

제국 원시종교의 본산인 샹그리아는 끔찍하게도 보수적이었다. 교단은 개종을 거부한 그들에게 이단 판정이라는 철퇴를 휘둘렀다.

제국에 교리가 전해지지 못하게 막은 것이 악의 무리이자 우상 숭배자인 샹그리아라는 것이다.

“폐하. 샹그리아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가주가 간절히 요청했으나, 황실의 입장에선 교단 대신 샹그리아의 편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이제 막 제국에서 강성하여 큰 힘을 휘두르는 교단이었다. 국교로 승인까지 한 마당에 뭐 하러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치겠는가.

시간이 흐르며 교단과 황실 사이에도 대립 구도가 생겼으나, 황실에게 버림받은 샹그리아는 급속도로 고립되고 영세해졌다. 영애의 데뷔 파티에 오겠다는 고위 귀족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러나 명목상으론 여전히 공신 가문이었다. 황제로서 그들을 조금은 위로해 주는 게 어떨까?

직접 얼굴을 비추면 황실에 대해 알음알음 차 있었을 원망이 조금은 잦아들리라. 심지어는 두 공녀 중 하나를 황비로 맞을 생각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