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그리고 나는 첫날에 마음먹었던 대로, 정원을 치우는 데 다시 몰두했다.
정원이라는 곳이 온통 마른 풀과 죽은 가지밖에 없으니, 집 안에 있든 바깥을 내다보든 우중충한 거 아닌가.
땅을 뒤덮은 죽은 잎과 줄기들을 치워내고, 죽은 가지를 베어내느라 한껏 고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뭔가가 자꾸 발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글로리나 부인에게 물으니 그건 포도나무 덩굴이라고 했다.
“휴…, 역시 노력해도 신혼집처럼 보이는 건 무리였나.”
그래도 종일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중앙 정원은 절반 이상이 깨끗해져 있었다. 나머지 절반도 힘내자!
“이얍!”
낫을 들고 걸음을 옮기자, 뒤쪽에서 하찮은 기합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내 뒤에 뿌려졌다.
“……차가워요, 아샤.”
“별의 힘이 내려진 축성수야. 미래에 희망이 가득하게 될 거야.”
또 그놈의 사슴뿔 관을 쓰고 있었다. 이번엔 달마티카 위에 뭔가 주렁주렁 엮은 목걸이까지 한 채였다.
꼭 그러고 다녀야만 하냐고 물었지만, 샤먼의 상징이라서 양보할 수 없다나.
그래도 성장기 소녀에겐 바깥 공기를 쐬는 게 좋을 것 같아 내버려 두었다. 왜 하필이면 날 따라다니며 저러는지….
연신 뒤쪽에 뿌려지는 차가운 물방울 세례를 무시해 가며, 장갑 낀 손으로 낫을 휘둘러 서쪽의 낡은 덤불을 제거했다.
“어…?”
메마른 회색 덩어리를 치워내자, 시야에 순간 선명한 빨강색이 들어왔다.
거의 아샤의 눈동자만큼 붉은 그것은 꽃이었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정원에서 살아남은 건 생명력이 강한 일부 들꽃뿐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 꽃은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독특하게 휘어진 꽃잎, 바늘 같은 술의 형태가 특이했다.
“리코리스네.”
내 옆으로 아샤가 다가와 말했다.
“리코리스?”
“석산. 13대 크루델시아 황제 때 제국으로 수입된 꽃인데, 셀레네 황후가 공녀일 때 이 꽃을 좋아해서 저택에 많이 심었다고 해.”
“셀레네 황후가요?”
아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도 살아있을 줄은 몰랐어.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슬픈 추억.”
“…….”
황량한 정원 가운데 홀로 붉게 피어난 리코리스는 더욱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쪼르르 내 옆으로 다가온 아샤와 함께 앞쪽을 보았다. 한때 리코리스를 많이 심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방향엔, 그동안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별채가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말똥말똥 뜬 눈엔, 달빛으로 환해 보이는 창문이 들어왔다.
이렇게 강한 달빛이라면 오늘은 보름달이 떴겠다.
보름달.
아샤가 걸핏하면 들고나오는 포도주는, 샹그리아 가문의 두 상징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달을 닮은 이름을 가진 여자. 방치된 정원에 홀로 남아 있던 붉은 리코리스.
“……셀레네 디 샹그리아.”
속삭이듯 조그맣게 불렀다. 잘못하면 그녀의 이름이 유령이 되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자 샹그리아 저택에 들어와서 들었던 이야기와, 내 발로 곳곳을 누비며 알음알음 습득한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추어지며-
정말 뭔가가 되살아났다.
이 저택이 품고 있던, 바스러져 가던 그녀의 기억과 존재가, 생생한 모습을 띠고 어딘가에서 다시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마른 이끼에 물을 뿌린 듯이.
셀레네 황후의 기억이 기다리고 있을 만한 곳은 명확했다.
글로리나 부인을 도와 홀이며 식당 같은 곳도 많이 정리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들어서지 못한 공간.
서쪽에 있는 작은 별채는 그렇게 크지 않았고, 짧은 복도를 통해 본채와 연결되어 있었다. 리코리스가 발견된 곳도 중앙 정원의 서쪽 모서리. 별채와 아주 가까웠다.
상념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별채로 통하는 복도였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들어서자, 내 눈은 크게 뜨였다.
달빛에 흔흔히 내리쬐는 복도는 그 자체로 작은 온실이었다. 남빛 희뿌연 어둠 속. 뚜벅거리는 내 발소리가 아득히 울렸다. 정원 구석에서 만났던 리코리스가 복도 양편을 따라 붉은 점묘화처럼 피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로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촛대를 들고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글로리나 부인의 눈빛은 애정과 우수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날 보며 놀랐다.
“오필리어 님?”
가끔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시간에 글로리나 부인은 여기 와 계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방 하나가 별채의 한 층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곳은 제 주인인 셀레네 님의 방입니다.”
“셀레네 님…인가요.”
공녀님, 아가씨, 황후 마마 등 다양한 호칭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글로리나 부인에게 가장 익숙한 건 ‘셀레네 님’쪽이었나 보다.
먼지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벽면을 가득 채우는 수납장이었다.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약병. 가공된 짐승의 사체. 도구와 토템. 빛깔이 서로 다른 양초들. 직접 만들고 엮은 티가 나는 수첩과 공책들. 깃펜과 잉크가 한데 담겨 있는 나무상자.
교단 측에서 심문회를 대비해 털어간 듯 상당수가 빠져 있었음에도 오래된 수집품들이 많았다.
큰 책상은 먼지가 좀 쌓이긴 했지만, 매일 긴 시간 동안 앉아서 사용한 것처럼 자주 닿는 부분이 반질반질 닳아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의자가 빠져나와 있어, 원래 주인이 금세라도 다시 찾아와 앉을 것만 같았다.
“셀레네 님께선 열여섯, 처음 사교계 데뷔를 하실 무렵부터 황후 자리에 오르실 때까지 이 저택에 사셨습니다. 저는 몽페라로부터 셀레네 님을 따라왔지요.”
그 뒤부터는 아는 이야기였다. 글로리나 부인은 혼례를 치른 셀레네 황후를 따라갔고, 주인보다 더 오랫동안 황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녀의 아이를 돌보면서.
“이곳은 셀레네 님과 저에게 익숙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들어올 엄두를 못 내고 있었지요.”
“아…….”
이미 떠난, 소중한 사람의 방에 들어오는 것이 과연 어떤 일일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을까? 사람은 가고 물건만 남아서,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감각만 슬프도록 확연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오필리어 님께서 정원을 새집처럼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자, 이 집의 하인이었던 제가 마냥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막상 여기에 오니, 꼭 그분을 다시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글로리나 부인은 비어 있는 책상 쪽을 응시했다. 그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다. 부인은 다시 이 방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게 내 덕분인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만일 내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편이 더 나았을 텐데. 몰락한 집을 마주하는 일도, 그 집에 클레멘츠가 갇히는 꼴을 보는 일도 없었을지도.
나는 셀레네 공녀의 방에 들어올 자격이 있긴 한 걸까?
“오필리어 님.”
글로리나 부인은 내 죄책감을 안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엄격한 집사장님이 가끔 보여주시곤 하는 그 미소였다.
“오필리어 님께선 저를 구해 주시고, 황태자 전하의 곁에 계셔 주시기 위해 이 지독한 폐허까지 오셨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전하께 닥쳐야만 하는 일들의 근원이 뭔지는 모르고 계십니다.”
글로리나 부인은 천천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희끗희끗한 금발이 촛대의 불빛에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이 방의 주인과 전하의 탄생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무조건 좋은 남편감의 눈에 들어야 한다.”
칼론 샹그리아가 성마른 어조로 을러댔다. 셀레네는 벌써 몇 번째 그 말을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했다.
‘스물세 번째.’
“셀레네. 너야말로 이 가문의 희망이다. 지금의 세도가들은 역사로 보나 전통으로 보나 모두 샹그리아에는 못 미치는 가문들이지만, 그래도 그들 중 하나와 사돈을 맺어 두지 않으면 우리의 재기가 요원해진다.”
초대 유스티온이 건국할 때에 손을 잡은 세 가문이 있었다.
당시에 ‘마법’이라 하면 당연히 적마법이었다. 최고의 적마법 가문 샹그리아는 여러 마물과 악마에 대한 귀한 정보와 봉인법을 제공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진 청마법의 창시자, 페리윙클.
유스티온의 검, 무가인 듀프레.
제국이 건국된 뒤 세 가문은 똑같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지만, 샹그리아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기울었다.
결정적인 원인은 시미크 교였다.
신은 정해진 신령한 신격 하나뿐이며, 오로지 섬기는 마음에만 깃든다고 주장하는 시미크 교단. ‘신들림’에 의한 마력 사용을 익히는 샹그리아와는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뿔과 뱀을 휘감았으며 달의 주인이고, 인간에게 축복으로써 포도주를 선사한 샹그리아의 토속신은 교단이 보기에 역겹고 끔찍한 악마였다.
교단의 배척을 당하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마법에서마저 페리윙클이 주도하는 청마법에 밀리기 시작했다.
몰락한 가문과 술법. 몰락한 신.
급기야는 저 가문에 더 이상 공작가로서의 위세도, 공신 가문으로서 황제와의 유대도 없다며 사방에서 비아냥이 들려온지 오래일 때.
셀레네 디 샹그리아가 수도로 온 건 그 무렵이었다.
웬만큼 규모 있는 귀족가라면 여식의 데뷔 무도회를 수도에서 치르는 게 유행이었다.
그러나 칼론 가주 대의 샹그리아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미 셀레네의 언니인 티르케는 본 영지인 몽페라에서 조촐한 사교계 데뷔를 마친 채였다.
그럼에도 칼론이 무리하는 이유는 단 하나. 딸의 외모였다.
셀레네는 오싹할 만큼 아름다웠다. 같은 은발과 적안을 가진 샹그리아 가문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한 생김새였다. 수도에서도 견줄 이가 없는 미모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가주인 칼론도 있는 자금 없는 자금 다 끌어모아 수도에서 무도회를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