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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72)화 (172/218)

172화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밖에 경비가 삼엄한데.”

“경비가 삼엄해지기 전에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예? 그러면 안 되죠…! 여긴 황실의 소유지잖아요.”

“무슨 소리야? 여긴 원래 내 집이잖아.”

팔짱을 끼며 도도하게 콧대 올리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대화가 안 통할 듯싶었다.

“그건 옛날 얘기고요!”

안 되겠다. 글로리나 부인과 클레멘츠를 불러서 상의해야지. 그 둘에겐 아샤가 집안 사람이니까 나보단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

“나는 오필리어를 봐서 반가운데, 너는 그렇지 않은가 보네.”

소녀의 가녀린 손을 붙잡고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아샤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리고 난 이런 말에 약했다. 이러면 도저히 매정하게 나올 수가 없었다. 젠장….

“축복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새로운 축복을 걸어 줄게. 네가 원하는 걸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아샤는 금세 붉은 눈을 반짝거렸다.

“…아냐, 축복 문제가 아니에요!”

영애는 지금 당장 영지로 돌아가셔야 해요. 샹그리아 공작님께 연락을 취할 거예요! 라고 단호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너의 영혼을 묶어 줄까?”

그러나 아샤의 다음 말은 내가 멈칫하기에 충분했다.

“…에? 네?”

“연인끼리 영혼을 묶으면 이번 생은 물론 다음 세상에서까지도 헤어지지 않는다고 했어. 어때?”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짐짝과 일련의 행동들을 살펴보면, 아샤는 다른 샹그리아 가문 사람들처럼 적마법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영혼을 묶는다니. 그런 미신적인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안 속는다.

“어떻게 묶는데요?”

“역시 네가 관심 있어 할 줄 알았어.”

아샤가 은근하게 웃었다. 흰 피부와 머리카락, 붉은 눈 색 때문인지 샹그리아 가문 사람에겐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있는 듯했다.

“영혼을 묶는 비술. 샹그리아 가에 내려오는 수천 가지 비전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강하며, 귀한 것이지.”

소녀는 나보다 서너 살 어려 보였지만, 낮춘 목소리로 조곤조곤 주술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나이가 조금은 많게 느껴졌다.

아샤에 따르면 샹그리아의 비전인 ‘영혼 묶기’는 사람의 영혼을 어떤 물건이나 장소에 귀속시키거나, 혹은 다른 이의 영혼과 묶을 수도 있는 술법이라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적마법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도, 개국 공신 가문인 샹그리아의 전승이라고 하니 관심이 생겼다. 나도 모르게 아샤 쪽으로 허리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요?”

“누구랑 뭘 묶는다고?”

“……?”

너무 집중했던 걸까?

고개를 돌려 보니 급히 달려온 듯 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클레멘츠가 있었다. 그가 자수정빛 눈길을 내게 던졌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달려왔더니.”

“…!”

그러고 보니 내가 아샤를 처음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었지. 그걸 듣고 부랴부랴 뛰어온 모양이었다. 어쩐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나스타시아 디 샹그리아.”

매섭고 엄한 눈초리가 아샤를 향했다. 그러고 보면 둘은 이종사촌 관계가 된다. 그리고 아샤, 그러니까 아나스타시아는 해맑게 대답했다.

“전하와 오필리어를 만나고 싶어서 온 거죠, 당연히!”

만만치 않았다.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 포인트가 서로 닮았다. 혈연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 뭔가 개운치 않은 익숙함이 느껴지는데.

아샤는 클레멘츠에게 매섭게 추궁 당했다.

둘이 사촌 사이라는 점은 전혀 완충재가 되어 주지 못했다. 똑바로 서서 던지는 질문들에 아샤는 시시각각 쭈그러들어만 갔다.

“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느냐. 경계가 강화되기 전이었다 해도 여전히 경비 인원이 있었을 텐데.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제가 샹그리아 사람 아니겠어요? 가문의 자랑스러운 술법을 조금 사용했지요.”

“얼버무리지 마.”

클레멘츠는 사촌 동생을 완전히 침입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맞긴 하지, 침입자…….

“그러니까… 약간의… 세뇌 주술?”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어쩌다 보니 아샤에 대한 것들을 듣게 되었다.

나이는 올해 열여덟.

샹그리아가 흔히 그렇듯 어려서부터 적마법을 습득했다.

아샤가 태어난 건 샹그리아가 몰락하여 영지로 물러난 이후였다. 몽페라에서 나고 자란 아샤는 수도가 궁금했고, 수도에서는 적마법이 얼마나 주목을 받고 있는지 늘 궁금했고, 황궁에 있다는 사촌오빠 클레멘츠의 소식이 궁금했다.

마침 어머니인 샹그리아 공작이 황태자를 만나러 수도에 행차한다고 했다. ‘후계자로서의 본분’ 운운하며 동행했고, 공작이 몽페라로 돌아가고도 은근슬쩍 수도에 남았다.

마침 샹그리아 공작의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딸에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시아 아가씨!”

곧, 건물 쪽에서 글로리나 부인 역시 뛰어나왔다.

“아. 당신이 로메오 글로리나 남작부인인가요? 어머니께서 셀레네 님의 충직한 하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잘 들었지요.”

조그만 얼굴 가득 반갑다는 표정을 짓던 아샤는, 들고 있던 솔을 포도주에 찍어 글로리나 부인을 향해 뿌렸다.

“…!”

“축복의 포도주예요! 부인도 샹그리아 가문을 모셨으니까 아시겠죠?”

해맑은 표정으로 말한 아샤는 클레멘츠를 향해서도 마수를 뻗었다. 재빨리 저만치 물러난 그에게는 포도주 방울이 닿지 못했다.

“이게 참 좋은 건데. 직접 채취한 약초를 섞고 아주 특별한 시간에 축성한 거라고요.”

“필요 없다.”

아샤는 서운해 보였다.

자연령을 소환하는 건 물론이요, 경비 병력을 세뇌하고 들어와 있었다는 걸 보면 적마법도 대단한 기술인 건 분명해 보였다.

대뜸 아무한테나 포도주를 뿌려 대니까 문제지….

“아가씨. 대체 여긴 어떻게 오셨지요?”

늘 온화하던 글로리나 부인의 얼굴에는 기가 막힌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쯤 해서 나도, 아샤를 보며 느껴지는 기묘한 익숙함이 어디서 왔는지 기억해 냈다.

‘아나스타시아 디 샹그리아’라는 이름. 클레멘츠를 닮아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 부분.

“적마법과 흑마법의 소환술!”

“……!”

역시나. 바로 알아듣고 움찔대는군.

적마법과 흑마법의 소환술.

혼우드에 있을 적, 내게 걸린 저주를 풀고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몽 씨에게 부탁해 얻었던 소환술 저서.

제대로 발음하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소환 주문을 엉터리로 써놔서, 내가 얼토당토않은 마수를 소환해 버리게 한 원흉.

“그 괴상한 책을 쓴 사람! 그놈의 책 때문에 내가 얼마나…!”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샤 역시 들어 아는 모양인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 진정해. 오필리어. 그 일이 있고 나서 내 책은 절판 처리됐잖아?”

……클레멘츠, 정말로 절판시켰구나. 그냥 해본 말인 줄 알았는데.

“몽페라에서 완성해 두근대는 기분으로 수도로 보낸 내 자식 같은 원고가 그리돼서 나도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데.”

“그게 문제인가요? 전 그때 전하께서 구하러 오시지 않았으면 죽을 뻔했다고요!”

아나스타시아는 일단 클레멘츠의 뒤에 몸을 숨기려 해 봤지만, 어림없는 수였다. 클레멘츠는 즉시 사촌 동생을 등 뒤에서 꺼내 내게 내밀었다.

아샤는 몸집이 워낙 작은지라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분통을 터뜨렸다.

“너무해! 혈육의 정이란 사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구나!”

아샤의 얼굴은 처음 보는 순간 왠지 낯익은 느낌이었는데, 돌이켜 보니 클레멘츠를 닮아 그랬던 거 아닌가 싶다. 머리카락과 피부의 색, 그리고 특히 미려하고 어딘가 요염한 얼굴선이 닮았다.

유폐지에 끼어들어 버린 황당한 등장 이후, 아샤는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마침 식사 시간이 되어 글로리나 부인은 배급받은 식재료로 식사를 준비했고, 잠입한 뒤로 쫄쫄 굶었다는 아샤까지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샹그리아 영애께선 그럼 언제 돌아가실 건가요?”

“안 돌아갈 건데? 그리고 아샤라고 불러!”

식사 자리에서까지 강짜를 부리는 통에, 곤란함을 느낀 클레멘츠가 즉시 바깥에 대기 중인 성기사들에게 넘겨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식사 시간 도중 아샤가 내 옆에 앉아 조잘거리는 걸 유심히 보던 눈치이더니, 이곳에 조금 더 머물도록 허락했다.

웬일이람?

하기야 아샤가 들어온 건 우리가 뜻한 바도 아니었고. 경비를 세뇌해 들어왔다면 나갈 때도 세뇌술을 이용해 아무 탈 없이 나갈 수도 있겠지. 실력 있는 적마법사 같아 보이는데 그 정도 대책은 세워 놨을 것이다.

그래서, 폐저택에서의 시간은 늘어난 식구와 함께 조금은 정신 사납게 흘러갔다.

새벽별이 뜨기도 전 누가 몸을 흔들어 눈을 뜨면, 아샤였다.

“금화궁과 물고기별 사이에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어. 빨리 일어나! 같이 보러 가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공작 영애고 뭐고 얼굴째로 밀어 버리고 싶었으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붉은 눈이 너무 또랑또랑하게 빛나고 있었다. 결국 하품하며 비척비척 따라나서선 아샤가 늘어놓는 점성학 지식들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가 많았다.

직접 깨우는 경우가 아니라면, 정원에서 아샤가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거나 북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민원 넣고 싶다…….”

아쉽게도 저 신분 높은 무허가 무당을 합법적으로 처리해 줄 곳은 없었다.

다만 아샤의 주변을 제외하면 이 집의 풍경은 적막했다.

클레멘츠는 여전히 황태자궁에서 지낼 때보다 조금 흐트러지고 피곤한 모습이었다. 대부분 방에 있었고, 나를 봐도 여전히 묘하게 차가운 태도였다.

글로리나 부인은 클레멘츠의 집사를 자처하며 부지런히 일하셨지만, 그만큼 조용히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아졌다. 저택 어디에 계신지 찾기 힘들 때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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