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하지만 난 조금도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렇게 같이 있게 됐잖아요?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
그러지 않았으면, 난 지금쯤 클레멘츠와 전혀 상관없는 공간에 있었을 테니까. 어딘가 안락하고 깨끗하며 포근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시중을 받는 대신,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가능성을 점치며 고통스럽게 속을 썩이고 있었을 것이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그러나 클레멘츠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 버리며 차갑게 내뱉었다.
“네 마음대로 하도록 놔두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나설 줄이야.”
“……클레멘츠.”
머리칼을 헤집던 손을 내려 잡은 클레멘츠의 손끝은 차가웠다.
“그 자리에서 외친 게 너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는 해?”
“미안해요.”
나와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태도가 생각보다 마음 아팠다.
“하지만 그런 건 당신과 헤어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교단과 황실에 밉보이면 어때? 평판이 떨어지면 좀 어때.
시골 가문 영애인 나에겐 원래부터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원래 없다가 쉽게 갖게 된 것에 큰 미련은 없었다. 클레멘츠의 옆자리를 제외하면.
그는 그의 옷자락에 손가락을 감아쥐며 품에 머리를 들이미는 나를 끝내 매몰차게 내치진 못했다.
“어디 한 번 절 떼어놔 보라고 했잖아요. 전하는 그러지 못하셨어요. 제가 이긴 거예요.”
“……이곳은 무덤 같은 곳이다. 너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지.”
크고 단단한 손바닥을 펴서 그 안에 내 뺨을 비볐다. 그는 조금 누그러진, 혹은 조금 지친 투로 말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회색 커튼이 쳐진 창밖은 폐허나 다름없는 처참한 정원이었다.
“여기서의 1분 1초가 너에게는 해만 될 거다. 할 수만 있다면 널 바로 내보내겠다.”
마음을 굳힌 모양인지, 클레멘츠는 더 이상 내 설득에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그의 방을 나섰지만, 나 역시 곧이곧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무슨 계속 내보낼 방법을 찾는대? 안 갈 거라고. 안 떨어질 거라고!
뭐, 무덤?
…….
그의 입장에선 옛 샹그리아 저택에서의 생활이 달갑지 않은 거야 당연했다.
유폐 생활은 굴욕적일 것이다. 다가올 것은 절망뿐이라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들리라. 무력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같이 지내는 건 조금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보란 듯이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경우 클레멘츠가 황족의 권리를 박탈당한다 해도 삶은 이어져야 한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오늘의 태양을 확인한다.
식사를 하고 몸을 움직인다. 검을 휘두르거나 활을 쏴도 좋고 간단한 산책이라도 좋다.
곁에 있는 사람과 담소를 나눈다. 웬만하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산책하다 만난 작은 들풀 이야기나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라도 좋고. 깊은 마음에 대한 속삭임이나 미래와 관념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 넋두리라도 좋다.
스스로가 허락하는 만큼 움직이다가 잠이 든다. 사면의 벽과 문과 창문이 갖춰진 공간에서 포근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함께 안식할 수 있는 누군가의 온기가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
그 일상이 삶의 본질이다. 평범하고 시시하게 면면히 이어지는 시간.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누굴 소환했네, 어떻게 태어났네, 누구의 권위네 하는 것은 그저 그다음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저택의 꼴을 좀 보라. 어디 소중한 일상을 영위하고 싶게 생겼는지.
둘러보며 생각하니, 무엇보다 문제인 건 역시 저 정원이었다.
관리되지 않은 풀이 무성히 자라고 죽은 나무 덤불이 커다란 가시 무더기마냥 한가득 뒤엉켜 있다. 마치 진짜 관리 안 된 무덤 같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살면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드는 게 당연했다. 일부러 살풍경한 곳에 몰아넣어 버린 게 못된 2황자파의 계략이라면 아주 악당답고 악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정원이라도 좀 깔끔하게 정리한다면 여기가 무덤 같다는 소리도 쏙 들어가겠지. 클레멘츠가 조금이라도 산뜻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게 될지도.
간단히 챙겨 온 짐에서 시녀 시절 쓰던 리넨 앞치마를 꺼냈다. 허리 위에 둘러메고 실외용 겨울 망토를 걸쳤다.
정원 일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데, 어딘가에 쓸만한 도구가 있긴 하려나?
건물 안쪽 청소로 바쁜 글로리나 부인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고. 바깥에 나와 어슬렁거리던 나는 뜰 한구석에서 녹슨 문이 달린 창고를 발견했다.
“음. 좋아.”
여기라면 정원을 가꾸는 데 필요한 각종 물품과 장비를 놓아두었을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부식되었겠지만 그래도 쓸만한 게 조금은 있겠지.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시간은 아직 낮이었지만, 나무로 짜인 창고 안은 습하고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가 무덤이라는 클레멘츠의 말이 스쳐 지나가고. 귀신, 묘지에 나타나는 유령, 폐가에 방치되어 썩어간 수상쩍은 유기체…….
“아, 아니야.”
여긴 원래 로판이니까 그런 거 없어.
애써 마음을 강하게 먹으며 눈을 부릅떴다.
어둠에 조금씩 적응이 된 눈에는 다행히 평범한 창고의 풍경이 들어왔다. 벽에 주르륵 걸린 삽과 쇠스랑. 다 쓰지 못한 비료 포대며 나무 서랍장 등이 흐릿한 윤곽선으로 보였다.
그리고…….
커다란 상자 위에 쌓인 멍석과 깔개들이…… 꿈틀거렸다.
“……!!”
꽥하고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그랬다간 클레멘츠와 글로리나 부인이 놀라서 달려나올 테니까.
어차피 잘못 본 것일 텐데.
…아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멍석 뭉치들이 이번엔 더 크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환장하겠네!
젠장. 뭐 하러 안 하던 짓을 하겠다고 갑자기 설쳤던 걸까? 그냥 얌전히 방 안에 웅크리고 있다가 뜨끈한 물이나 한잔 끓여 마실걸.
나는 눈물을 삼키며 다가갔다. 손에는 벽에서 하나 집어 든 갈퀴를 꼬나 든 채였다.
이제 멍석 더미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일단 갈퀴로 한 대 쳐볼까? 아니야. 위험해.
우선 밖으로 나가 문을 걸어 잠근 다음 사람들에게 알리자.
서서히 뒷걸음치려던 그때, 그 정체 모를 것 위에 덮여 있던 멍석이 툭 떨어졌다.
“꺄아아아-!!”
갈기갈기 찢어진 촉수 같은 것이 드러났다. 이젠 속수무책으로 비명이 나왔다.
“……뭐야? 시끄러워.”
“……!”
사람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내가 본 것이 은빛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란 걸 알아차린 건 거의 동시였다.
“으으으! 추워!”
멍석 밑에 웅크리고 있던 건 소녀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길게 흐트러졌고, 적포도주색과 검은색으로 된 달마티카 형태의 로브가 마른 몸을 낙낙하게 감쌌다. 잠에 취한 작은 얼굴은 창백했다.
대체 누구야?
얇은 눈꺼풀 아래, 깜짝 놀랄 만큼 붉은 눈동자가 반짝 드러났다. 이내 그것은 보기 좋게 휘어졌다.
“안녕, 오필리어.”
“네…? 저 아세요?”
“그럼 알지. 제국에 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소녀는 일어나 앉아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보다 누구세요?
곧 소녀는 재채기를 했다. 멍석 더미에서 풀썩이며 일어난 먼지 탓이었다.
“미안한데 너무 추우니까 문을 좀 닫아 주겠어?”
“추워서 재채기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일단 소녀를 창고 밖으로 꺼내 왔다.
이 저택은 샹그리아 가가 수도 살림을 정리하면서 황실에 팔린 지 24년이 지났고, 그 세월 동안 빈집이었다. 저택 안에 클레멘츠와 글로리나 부인,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아예 없어야만 한단 말이다.
이 녀석은 대체 누굴까? 촉수나 가시 같은 것도 없이 뽀얗고 말랑말랑한 살뿐이고. 햇볕 아래로 나와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니 귀신도 아니다.
“혼자 왔나요? 여기 계시면 안 돼요. 빨리 나가셔야겠네요.”
당장 그녀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기껏 외부인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황궁을 벗어나 여기에 감금시킨 건데, 이렇게 떡하니 외부인이 들어와 있으니 클레멘츠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이 여자아이가 있는 건 우리 쪽 의사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명할지 생각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러나 막 냉정하게 눈을 부릅뜨려는 내가 마주한 건, 이마에 뿌려지는 진득한 액체였다.
“무슨…?”
달고 새큼한 향이 퍼졌다.
“축복의 포도주야.”
초면인 사람 얼굴에 대뜸 포도주를 뿌리다니?
예상치 못한 행동에 지끈대던 머리가 멍해졌다. 혼우드 때의 클레멘츠 이후로 이런 정신나간 사람은 오랜만에 봐서일까.
어느 틈에 쓴 건지, 소녀의 머리엔 사슴뿔과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관이 씌워져 있었다. 사슴뿔 관은 달마티카와 어우러져 꽤 그럴싸했다.
왼손엔 작은 포도주 단지를, 오른손엔 말린 풀로 만든 솔을 든 소녀는 싱긋 웃었다.
“장수와 행복을 빌었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저런 도구는 어디서 났나 싶었는데, 소녀의 옆에 한 아름 정도 되는 보따리가 풀어져 있었다. 창고에서부터 갖고 나온 듯했다. 언뜻 보이는 안쪽에도 수상쩍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나는 아샤 샹그리아.”
샹그리아?
“샹그리아 공작 영애세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저 은발과 붉은 눈, 창백한 피부색까지 얼핏 본 적 있는 샹그리아 공작과 비슷했다. 그녀가 수도에 왔을 때 아샤 역시 따라온 모양이었다.
누군진 알았지만 더 머리 아프게 됐다. 클레멘츠는 아무도 만나면 안 되는데, 하필이면 외척인 데다 지금 쟁점이 된 샹그리아 가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