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70)화 (170/218)

170화

암만 적통 황장자라도, 지금껏 황태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해도, 엄연히 국교가 있는 클라티아에서 신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가 황위에 오를 수 없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미끌거렸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클레멘츠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질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보는 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일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는 걸 지켜볼 거라면, 대체 뭣 하러 ‘원작’까지 아는 상태로 빙의한 거지?

……아.

그때, 내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하지 마요.”

눈빛에 생각이 떠오르기라도 한 건지, 메디프가 심상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일어나서 중앙으로 통하는 경사로를 내려갔다. 뒤에서 메디프가 당황하면서 쫓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시야는 저 아래,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클레멘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도 나를 보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령 그가 바라더라도. 행복한 삶이든 불행한 삶이든. 나를 그에게서 외따로 떨어뜨려 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또한 내 독단으로써 그의 처우를 결정할 순 없네. 신성 왕국에 있는 본 교단에 금번 심문회의 서기 기록과 보고서를 올리도록 할 테니, 그동안 황태자는…….”

“잠시만요!”

덩그러니 내려온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긴장된 공기가 성녀에게로, 황태자에게로, 그리고 내게로 썰리며 뒤엉켰다.

“레오라가의 영양이로군. 할 말이 있는가?”

“눈비가 내리듯 은혜가 내리오소이다. 성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필리어!”

클레멘츠가 튀듯이 달려 나왔다. 그는 내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심문회장을 지키던 성기사들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결국 그는 지면에서 높여진 마룻바닥 위에서 날 향해 몸을 기울였다.

“왜. 무슨 말을 하려고? 내게 먼저 말해 봐. 응?”

그는 애타게 속삭였다. 심문회 내내 남에게 벌어지는 일인 듯, 한 발짝 떨어진 태도를 고수하던 태도와 비교도 안 되게 절박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이게 나의 뜻이었다.

“성녀님, 이 자리에서 밝히옵건대 황태자 전하께서 어떤 판결을 받으시건, 저도 같은 벌을 받아야 합당합니다.”

“오필리어……!”

“어째서지?”

“교단의 조사를 제가 방해했으니까요.”

“……어떤 식으로 방해했다는 거지?”

어느새 쫓아온 메디프가 나를 불렀지만, 성녀가 손짓하는 게 빨랐다. 그 손짓에 성기사들이 물러나고 나는 마룻바닥 위로 올라왔다.

“황태자 전하의 출생에 대해 소상히 아는 증인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네.”

셀레네 전 황후가 공녀일 시절부터 따르던 전담 시녀이며, 황태자의 유모. 황태자 탄생의 구체적인 사연에 대해 모를 리가 없는 사람. 로메오 글로리나.

그런 확실한 증인이 증언을 거부했단 것에 대해 성녀는 아쉽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보고를 받으셨다면 아시겠지요. 교단과 황실은 당연히 그 사람을 ‘조사’하려고 시도했습니다만…….”

여기에 서자, 심문회장의 다섯 면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잘 보였다. 내가 증인을 언급하자 황비 쪽 인사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좋게 말해 ‘조사’지, 저들은 집사장님을 납치하고 가두고 협박했다. 신체적인 고문을 가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확정된 혐의도 없는데 그러는 것은 시미크교의 정신은 물론 국법에도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걸 폭로할까 염려하는 걸까?

하지만 저들은 증거라도 있냐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불쾌하면서 한편으로 의기양양한 얼굴들을 보면,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 나도 그런 어설픈 수를 두어 수렁에 빠져들 생각은 없었다.

“제가 그 ‘조사’를 방해했습니다.”

“……?!”

“조사를 받고 계신 유모님께 접근하여, 황태자 전하에 대한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강요했습니다.”

“뭐……!”

내 옆의 클레멘츠가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으며 그를 외면했다.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신이 언제……!”

대신 아래쪽에서 파들거리고 있는 메디프에게로 돌아섰다.

“당시 글로리나 부인이 조사받고 있던 방으로 제가 은밀히 날아들어 접근했다는 것, 2황자 전하께서 제일 먼저 확인하시지 않았나요?”

“…….”

“그 뒤로 글로리나 부인은 황태자 전하에 대한 정보를 전혀 내놓지 않으셨고요.”

“2황자, 저 말이 사실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상과는 달랐다.

클레멘츠가 오면서 풀려나긴 했으나, 글로리나 부인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자신이 아는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도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고문을 당하든, 협박을 당하든, 당하지 않든. 설령 오늘 억지로 증언대에 섰다 해도 입을 열지 않았겠지.

자리에 앉은 글로리나 부인의 안색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그녀에게도, 카시스에게도, 클레멘츠에게도 미안할 뿐이었다.

나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내 한 몸만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없이 소시민이던 모나한 백작가 시녀 시절처럼.

이 한 몸 안전하고 풍족한 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걱정할 일도, 걱정을 끼칠 일도 없었으리라.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오로지 당신을 원하기 때문에.

성녀가 재차 물었다.

“조사를 받던 중에 레오라 영양이 황태자의 유모에게 접근했는가?”

메디프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한참 뒤, 그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사실입니다.”

* * *

“들어가십시오. 레오라 영애.”

성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었다. 철컹, 쇠붙이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오필리어 님….”

저택 앞까지 따라온 유렌과 카렌이 훌쩍거렸지만, 남자는 내가 들어가자 검은 철문을 가차 없이 닫아버렸다.

“본 교단의 판정 결과가 나올 때까지 황태자의 근신을 요구한다.”

심문회 보고서가 올라가고, 이제 신성 왕국 본 교단의 최종 결정만 남은 상태.

클레멘츠는 외부인을 만날 수 없는 곳에 근신 조치가 내려졌다.

그리고 심문에 도움이 될 증언을 은폐했다는 죄목으로, 나와 글로리나 부인 역시 이 저택에 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은 수도에 있는 샹그리아 가문의 옛 저택이었다.

황후가 죽고 집안이 몰락하자 샹그리아 가문은 더는 수도에 남아 있을 여력도, 염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수도 살림은 팔렸고, 황실이 그 저택을 사들였다. 샹그리아 공작은 간신히 작위를 유지한 채 영지인 몽페라에 몸을 웅크렸다.

교회는 흑마법 혐의를 쓴 황태자를 흑마법의 본산이던 곳에 가두는 데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미 저택 안에 남은 주술의 흔적들은 심문회를 위해 샅샅이 뒤져진 다음이었다.

이제 이곳은 그저 음침한 폐허에 불과했다.

철문은 녹슬었고, 포석엔 이끼가 잔뜩 피었다.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그마저도 태반이 시든 풀들이었다. 음침한 회색 벽은 관리되지 않아 눈과 비 녹은 물 흘러내린 자국이 역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글로리나 부인이 집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필리어 님.”

간단한 청소를 했음에도 먼지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벽의 램프는 아직 켜지는지 의심스러운 데다 일부는 깨져 있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실내는 추웠다.

“부끄럽군요. 샹그리아 공작가는 원래 이런 모양새가 아니었습니다.”

저택의 모든 것이 거죽과 뼈대만 남아, 한때는 찬란했을 공작가의 영광을 짐작만 하게 만들 뿐이었다.

“글로리나 부인은 이 저택의 사용인이셨죠.”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요. 시대를 놓친 샹그리아가 몰락하는 건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부인.”

폐허가 되어 버린 옛집을 바라보는 건 속 쓰린 경험일 것이다. 내가 일을 엉망진창으로 벌이지 않았다면, 글로리나 부인이 이런 몰골이 된 집을 확인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우물거리던 내가 사과의 말을 떼는 것보다, 부인이 더 빨랐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따지고 보면 일의 시작은 제가 아닙니까.”

“…….”

“하지만 오필리어 님께서는 전하의 곁에 있어 달라, 저에게 그리 말씀하여 주셨지요.”

글로리나 부인은 잔잔히 웃으며 덧붙였다.

“전하께서는 2층에 계십니다.”

유폐 처분을 받은 뒤 그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복도 주변은 온통 더럽고 습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한 황태자였던 그가 이런 곳에 머물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더라면.

차라리 사라져 버리고 싶다. 방문을 앞에 두자 심장이 쿵, 쿵하고 뛰었다.

질끈 눈을 감으며 어렵게 문을 열었을 때, 클레멘츠는 방 한쪽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깨끗한 은빛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하얀 이마 위로 쏟아졌다.

대충 걸친 털가운 아래의 셔츠는 벌어져 목과 어깨의 붉은 문신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왜 그랬느냐?”

그가 저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내게 화 비슷한 걸 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곁에 있고 싶었으니까요.”

“…….”

그가 날 비난하는 이유는 내 죄책감의 이유와 달랐다. 심문회 마지막에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카시스를 따라가서 미리 마련해 준 피신처에 있지 않고, 이 살풍경한 유폐지로 그를 따라왔기 때문에.

눈에 띄게 퀭해진 보랏빛 눈이 조금은 원망하듯 나를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