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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69)화 (169/218)

169화

“……?”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 익는 냄새가 예배실 안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으커헉! 으어어억!”

증인은 타들어 가는 혓바닥을 내민 채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아, 저건…….”

참관석에 있던 오필리어는 입을 틀어막았다. 변색하고 쭈그러든 증인의 혀에는 신의 징벌임을 천명하듯 흰 눈송이 문장이 나타났다.

“저런 건 보지 말죠.”

옆에서 메디프의 손이 올라와 오필리어의 눈을 가렸다. 그녀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이미 다 봤는데요…….”

“아, 죄송해요. 저도 놀랐거든요.”

메디프는 무안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관계자가 나와서 허둥지둥 증인을 이끌어 가기 전까지, 올린 손을 내리진 않았다.

방금 전까지 함부로 혀를 놀려 대던 방자한 인간 하나가 신의 힘에 굴복했다.

패닉에 빠졌던 장내는 점차 경외 어린 분위기로 돌아섰다.

“하여, 악마의 씨앗이니 하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로군. 황태자.”

“그야 당연한 것을.”

클레멘츠가 가볍게 응수했다.

대주교를 비롯한 세 성직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황태자가 설마 성녀를 역이용할 줄은.’

‘허, 권능이라니…….’

신의 충실한 대리자라기보단 부패한 사기꾼에 가까웠던 그들로선 생각도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 흘러가니 저 증인을 믿을 수는 있겠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혀가 하얗게 익어 버렸으니 애당초 더는 증언할 수도 없었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돈할 겸, 대예배실 안에 들어찬 찝찝한 고기 냄새도 뺄 겸 잠깐의 휴회가 선언되었다.

웅성대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더러는 자리에 남았다. 나는 중앙의 성직자들과 클레멘츠가 뒷문으로 나서는 걸 보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게요?”

붙잡으려 드는 메디프를 그대로 무시하고 나갔다.

교회당 건물은 육각형 구조로 되어 있었다.

대기실이 자리한 중앙 무대 뒤편 공간을 제외하면, 좌석이 줄지어 놓인 다섯 경사면이 붙어 있었다. 경사를 올라가면, 각 면의 꼭짓점엔 로비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역시나 육각 모양인 로비의 통로를 통해, 중앙 무대 뒤편 대기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120도로 꺾인 모퉁이를 지나며 거의 뛰듯이 달려온 내 앞엔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백색 창을 쥔 성기사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노려보다가 베일을 걷었다.

“안에 계신 분을 꼭 만나 뵈어야 해서요.”

성기사들은 내 얼굴을 보고도 고개를 저을 뿐 꼼짝하지 않았다.

젠장. 무력까지 사용해서 대기실을 차단해 두다니.

이러면 클레멘츠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할 셈인지, 그리고 성녀는 그를 어쩔 것인지도 알아볼 수 없어졌다.

“오필리어 님.”

발만 동동 구르던 나를 찾고 있었단 듯 누가 다가왔다. 카시스였다.

“여기 계셨군요.”

“듀프레 후작님…….”

그래, 나에겐 아무 지위가 없어도 그는 이 나라의 후작이고 명망 높은 귀족이니까. 이 경비를 물리고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카시스는 나를 이끌고 한 발짝 물러났다. 이어서 하는 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곳은 2황자파가 만든 무대입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걸어 들어오신 이상, 그들의 입맛에 맞게 짜인 결과를 바꿀 순 없을 겁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야. 클레멘츠를 도와야 하지 않나. 교단과 협의하든지, 다음 심문 내용에 대비하든지 해서 가능한 타격을 줄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카시스가 말하는 건 나에 대한 내용뿐이었다.

“심문회가 끝나면, 오필리어 님께선 저와 함께 이동하십시오.”

“……?”

“마침 황궁 밖이니, 자연스럽게 빠져나오실 수 있습니다. 우선 수도는 지금 너무 어수선합니다. 고향인 혼우드 근방에 머무르실 저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이어 그는 돌돌 만 양피지 조각을 건넸다.

“황태자 전하의 재산 목록 중 일부입니다. 황궁과 무관하게 처분할 수 있는 자산 위주로 골랐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이게 다 무슨 소리냔 말이에요.”

목록이고 뭐고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걸 나한테 주는데?

“후작님은 전하의 보좌관이시잖아요. 전하께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카시스의 서글서글한 붉은 눈은 피로와 안타까움에 젖어 있었다. 사실, 내가 이런 말을 할 권리는 없는지도 몰랐다.

황궁으로 날아왔다가 잡혀서 클레멘츠의 발목을 묶은 것도 나. 그런 상황에서도 클레멘츠는 날 책임질 궁리를 했고, 그를 도울 수도 있었던 유능한 보좌역은 이런 일을 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했다.

“나의 영예, 공로, 재보는 모두 너에게 속해.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나의 추락은 너와 무관해야지.”

결국은 클레멘츠의 뜻대로 되는 건가?

그럴 수 없다고. 무엇이든 함께하자고 덤벼 놓곤 이렇게 끌려가게 된다고?

카시스와 손안에서 구겨지는 양피지 조각, 성기사들이 철벽처럼 서 있는 문을 바라보다가 터벅터벅 뒷걸음질 쳤다.

“오필리어 님.”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나에게 카시스는 무언가 말을 걸려고 했다.

표정을 보니, 그의 성정대로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여기 있었군요.”

흰 돌로 지어진 로비에 메디프의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주변을 돌아다니던 이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카시스는 황자 앞에 한 발짝 물러섰지만, 두 사람 사이에선 불편한 기류가 느껴졌다. 이윽고 메디프가 생긋거리며 말했다.

“시간이 다 됐어요. 돌아가죠.”

심문회장은 다시 정돈되어 있었다.

“충실하지 못한 증인이 신성한 공간을 더럽혔습니다. 그 거짓된 혀를 심판하신 시미크께 영광을.”

거짓된 혀를 놀리게 만든 주체는 높은 확률로 본인들일 텐데.

위엄 있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추기경이 손짓하자, 견습 사제들 몇 명이 덮개로 덮인 쟁반 서너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하지만 전 황후가 출산을 앞두고 악마 소환을 시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물증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들이지요.”

사제들이 차례로 덮개를 걷었다.

케케묵은 책들과 고대어가 새겨진 나무판, 말라비틀어진 약초 다발, 뭔지 모를 짐승의 두개골과 뼈,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거무죽죽한 물약 병 등이 보였다.

누가 봐도 석연찮은 존재를 부르기 위한 도구들이었다.

또한 특이한 것은 속이 비어 있는 넓은 육각기둥 모양의 모형이었다. 무언가 복잡한 것을 본뜬 것 같은데,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증거 확보를 위해 사전에 샹그리아가를 수색했습니다. 교단과 황실의 이름을 내미니, 그들로선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없지요.”

다음으로, 마지막 쟁반의 덮개가 벗겨졌다.

“이것은 당시 황궁의 진료 기록입니다.”

리베르틴 추기경은 노란빛으로 바랜 종이 뭉치를 흔들었다.

“황실 진료 기록……? 저런 걸 저렇게 공개할 수 있나요?”

“…….”

옆의 메디프에게 속삭여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황족의 신상과 관련된 진료 기록은 특급 기밀로 간주되어 절대로 외부에 유출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몰락했지만 여전히 공작가인 샹그리아의 저택을 기어이 뒤진 것도 놀라웠다. 황비 휘하 세력이 이 일에 어지간히도 이를 갈았단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교단 세력에다 황제까지 힘을 보태니, 클레멘츠는 더없이 불리했다.

“309년 가을. 당시 황후께서는 중병을 진단받으셨습니다. 급성 발작을 일으켰고, 날로 증상이 심해지며 쇠약해지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추기경은 해당 내용이 기록된 페이지를 사방에 보란 듯이 펼쳐 내밀었다.

“당시 회임 중이셨지만, 황손을 무사히 낳으실 가능성은 없다. 주치의의 진본 서명까지 갖춘 진료 소견입니다.”

“…….”

당시 황제가 제국 안팎을 뒤져 희귀한 약재와 의사들을 수소문했단 얘긴 유명했다. 하지만 끝내 황후의 병을 낫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선 태어나셨고, 황후께선 돌아가셨으나 그분의 시신을 본 사람도, 장례를 치른 사람도, 심지어는 아이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대주교는 의기양양하게 장내를 둘러보았다.

‘24년 전의 일’. 제대로 아는 이 하나 없이 이십여 년을 묵어 온 의문.

“정황이 이럴진대. 황태자 전하께선 대체 어떻게 태어나신 겁니까?”

클레멘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팽팽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다면 본디 황태자께선 태어날 수 없는 이였고, 그러나 태어나셨으며,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분명코 사악한 힘으로 보이오.”

이윽고 성녀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 그대는 이 혐의에 대해 할 말이 있소?”

“없소. 내가 태어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 스스로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추기경이 말했다시피 그 당시 관련자들은 전부 죽었고.”

“……그 부분은 도움을 줄 만한 유력한 증인이 하나 있다 들었는데.”

성녀는 참관석 쪽을 잠시 힐끗거렸다.

“……발언을 거부했다고 하더군. 안타까운 일이오. 시미크 앞에서 성실한 증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영광을 거부하다니. 뭐, 스스로의 양심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테요.”

들어 보니 글로리나 부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쪽 집사장은 시미크교도가 아니에요. 샹그리아 출신들이 다 그렇죠. 성녀님께서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메디프가 킬킬대는 어조로 속삭였다. 난 그를 노려보곤 글로리나 부인 쪽을 힐끔거렸다. 황비 근처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어쨌든 제국 황태자의 출생에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단 건 교단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

“……!”

좌중은 긴장했다. 주교인지 대주교인지, 판을 굴린 사제들이 눈을 반짝이는 꼴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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