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앞면 벽 상단, 눈송이 모양의 창살이 쳐진 둥그런 창밖은 벌써 어두웠다.
중앙엔 긴 의자가 줄을 맞춰 몇 개 놓여 있고, 양옆엔 한 사람씩 들어가면 딱 맞을 것 같은 상자 모양의 또 다른 기도실이 있었다.
샹들리에도, 조그만 성화(聖畵)조차 없는 공간은 수도 중앙의 큰 교회라는 걸 깜빡 잊어버릴 듯 소박했다. 왼쪽의 기도실로부터 간간이 중얼거리는 기도 소리가 흘러나왔다.
맨 앞의 의자에 조용히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 작은 기도실에서 나왔다.
“이런. 모르는 새 시미크의 품을 찾아온 교인이 하나 더 있었나 했더니, 그대였군.”
성녀는 나를 알아보았다.
“빛과 사랑과 진리가 하나이니.”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러하노라. 그만 일어나시게, 레오라 영애.”
다행히도, 자기가 있는 곳을 알아내 따라왔다고 화가 나진 않은 눈치였다. 큰 결심을 마친 내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전부터 생각했다만, 역시 그대는 시미크의 자식 같진 않아.”
“……!”
성녀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교회에 성실하게 다니지 않은 걸 저격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합체 마녀 말대로 ‘세계의 손님’이라는 걸 그 또한 느끼는 걸까?
“보통 사람과는 약간 다르다. 이질적이라고나 할까.”
후자였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의 대리자라는 성녀라면 무언가를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뿐 아니라 그녀처럼 영험하다면 나에게 뭔가 실마리를 줄지도 몰랐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라든가.
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힐다가드 성녀처럼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면 날 마녀로 지목하긴 쉬웠다. 그럼 클레멘츠의 입장은 더욱더 난처해진다.
“걱정하지 말게. 특이할지언정 영양의 본성은 악하지 않다네. 그 정돈 알 수 있지.”
그래서 부정한 건데, 다행스럽게도 날 악하게 보진 않은 모양이었다. 힐다가드 성녀의 눈은 이른 봄 햇살에 빛나는 겨울 눈 같았다.
“내게 무슨 볼일인가?”
심문회까진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전에 그들이 심판자로 내세운 성녀의 마음을 되돌려야 했다.
“성녀님께선 시파에 연연하지 않으시는 청렴하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외람되옵니다만, 그렇다 해서 파견된 제국 황실의 대립 구도조차 파악하지 않으신 건 아니겠지요?”
“흐음?”
성녀는 비공식적으로 교황과도 동격인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 앞에서 별로 듣기 좋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자니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레오라 영양?”
“클라우디아 황비는 친자인 2황자를 차기 황위에 올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공격하려는 의도가 빤하지 않습니까?”
“…….”
부드러운 듯 엄숙하던 성녀가 조금 멈칫하는 게 보였다.
역시, 성녀도 이 부분을 조금은 석연찮아하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좀 더 파고들려는 순간, 성녀는 철벽을 치고 들었다.
“그대는 황태자의 연인이라지. 그래서 지금 그를 편드는 건가?”
“…….”
“악마 숭배자를 두둔하는 건 악마를 옹호하는 것과 같다. 영양은 그를 위하여 스스로의 영혼까지 타락시킬 셈인가?”
일단 가차 없이 나오자, 성녀는 정말 매서웠다. 바늘땀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라고 주워섬긴 다음 뒷걸음질 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클레멘츠를 생각하면 물러설 곳이 없었다. 물러서지 않으려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이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녀께서는 이미 전하께서 악마 숭배자로 확정된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전에 보고를 받았느니. 증거가 충분하다.”
성녀의 목소리는 이제 차갑기까지 했다. 더는 듣지 않겠단 의지가 느껴졌다. 나도 더는 덤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떠든 것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녀를 잡아 놓을 말이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사이, 힐다가드 성녀는 나를 지나쳐 작은 기도실의 출구를 향해 발을 옮기고 있었다.
안 돼!
이 자리를 벗어난 그녀가 대예배실로 들어서면, 황비의 준비된 이빨들이 클레멘츠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때부턴 돌이킬 수 없다.
“기다려 주세요, 성녀님!”
다행히도 힐다가드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무작정 쫓아갔지만 말문이 막혔다.
사실 증거가 있고, 대세가 기울었고, 국교가 클레멘츠의 편이 아닌데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족끼리 서로 반목하고 해치는 이따위 꼴을 신께서 반기시긴 하냐는 막말이 목구멍 아래로 치솟았다.
힐다가드가 다시 고개를 돌리기 전, 나는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악마를 부르신 건 저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악마를 숭배하는 게 아닙니다. 출생에 얽힌 얘기라면 더욱, 전하께선 아무 상관없으십니다. 스스로 어떻게 태어날지 사람이 어떻게 정하나요?”
그랬다. 클레멘츠는 나를 구하려다가 진창에 빠졌다. 혼우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다.
그러고도 전혀 나를 탓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 눈짓 하나로도.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겠어.’ 같은 소리나 하면서. 생채기 하나 나지도 않은 나를 더 지키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물론 악마를 소환한 게 잘했다는 얘긴 아닙니다. 하지만 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의 어려움 역시 헤아리시지 않았을까요?”
“…….”
“그리고, 헤아린 끝에 용서하시지 않았을까요?”
왜 난데없이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랐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한 평의 땅에 눕고 한 세상만을 살다 가는 한낱 인간도 사랑한다면 잘못을 덮는다. 그리도 위대하며 크다는 신의 사랑이라면 그보다 못할 리 없지 않나?
“……죄송합니다.”
결국 또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해 버린 걸까.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클레멘츠를 구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그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성녀는 감히 시미크를 의심하냐며 노호를 지르지도, 기가 차다는 듯 비웃고 떠나지도 않았다.
고개를 숙인 내 시야엔 여전히 북방에서 신는 비둘기 색 신발의 앞코가 보였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힐다가드는 조용히 기도실을 떠났다.
* * *
“황태자 전하께서는 앞으로 나오시오.”
그는 앞으로 나섰다. 발자국 소리가 넓은 대예배실을 울렸다.
환히 밝혀진 수천 개의 촛불이 그가 있는 공간을 비추었다. 그는 여행에 나섰던 그대로의 간편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층층이 단을 쌓으며 올라간 의자에 앉은 이들이 어둠 속에 반쯤 잠겨 그를 내려다보았다.
보랏빛 눈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밉상들 사이에 고운 사람이 하나 껴 있으니 찾기는 쉬웠다. 반투명한 베일을 쓰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저 천 아래로 크고 둥근 눈이 축 처져 있는 모습이 선했다.
그녀가 몸이 상할 때까지 저를 걱정하리란 건 전혀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클레멘츠는 가슴 한구석을 쿡쿡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 낯선 감각은 뜨겁게 울컥거리며 자꾸만 가슴 전체로 번져 나가려고 했다.
‘특별히 잘 보살피라고 당부해야겠군.’
상황이 급변할 경우 카시스가 그녀를 돌보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울상을 지어도, 근본적으로 오필리어는 씩씩했다. 그러니 잘 견뎌 낼 것이다. 그리 믿으며 클레멘츠는 고개를 돌렸다.
오늘을 위해 마련된 듯한 높다란 판관석엔 힐다가드 성녀가 앉아 있었다. 양옆에는 또한 리베르틴 대주교와 발렌틴 추기경이 앉은 채였다.
휘황한 조명을 받고 서 있는 이는 대주교였다. 육각 관과 정복을 입고 눈송이가 조각된 홀을 들었다. 은회색으로 늘어진 수염이 수많은 촛불 빛을 받아 위풍당당하게 빛났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황태자 전하, 지난 엔클레이오 투 바실리아에서 대악마를 소환한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
“그 소환술은 모친이신 전 황후 셀레네에게 물려받은 흑마력으로 가능케 했음을 인정하십니까?”
“부정한다. 그것은 뒤싱겐의 혈박이다.”
진실과 거짓을 한데 끌어 모아 진흙 공처럼 던져 댈 거라곤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터무니없는 걸 들고 올 줄이야.
이따위 막말을 누가 믿을까? 보랏빛 눈이 층층이 예배실을 메운 의자들을 훑었다. 그럴 줄은 몰랐다는, 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들.
믿는구나.
클레멘츠는 코웃음을 쳤다.
“뒤싱겐의 핏줄은 복마전의 모든 악마를 복종시킬 수 있다는 걸 알지 않나.”
“허튼 소리!”
중간에 끼어든 목소리는 발렌틴 주교의 것이었다.
그는 벌건 얼굴로 일어나 의자 앞 단상을 텅 쳤다. 기세는 좋았다.
“그것이 황족 핏줄의 능력이라면 어째서 다른 황가의 일원들에게선 보이지 않는 겁니까? 현 황제 폐하께선 물론이고 선황께서마저도……!”
“발렌틴 주교.”
클레멘츠의 조용한 목소리가 주교의 말을 막았다.
여전히 격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대는 주교에게, 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설마 황제와 선황께 혈박의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건가?”
“아……. 아, 아니!”
초대가 세상 모든 마족의 힘을 묶어, 황손에게 대대로 내려져 온 힘.
황제가 능동적으로 그 ‘혈박’을 쓴 일은 오래됐어도, 여전히 그 힘은 황실을 대표했다. 공식적으로 황제가 ‘쓸 수 없다’라고 선언한 일 따윈 없었다.
발렌틴 주교는 붉었던 얼굴이 새파래진 채 두리번거렸다.
싸늘한 시선들이 주교를 향해 여럿 내리꽂혔다. 가장 가까이에선, 리베르틴 추기경에게서.
“논점을 회피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전하.”
자연스럽게 발언권을 이어받은 추기경이 냉정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