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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66)화 (166/218)

166화

“제가 왜요? 실컷 머리 말고 겹겹이 속치마 올려 입어 봤자 황자 전하와 억지로 불편한 식사밖에 더 하나요?”

말대답은 했지만 낯선 메이드들에게 끌려가 드레스룸 앞에 섰다. 늘 살뜰히 챙겨 주던 유렌과 카렌에 비하면 손길이 거칠었고 날 불편해하는 티가 났지만, 그래도 이들에겐 죄가 없었다.

“말 잘했네요. 식사, 혼자 있을 땐 잘 안 먹는다면서요? 그런 얘기가 귀에 들리니까 일단 불러내서라도 먹이는 거 아니에요.”

그는 한숨을 폭 쉬었다.

내가 연금된 곳은 2황자궁 근처의, 주인 없이 비워져 있던 작은 별채였다.

간혹 나를 걱정한 글로리나 부인이 들러 죽이나 샐러드 따위를 권했다. 그 경우가 아니면 굳이 억지로 먹지 않았다.

나라고 단식 투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극도의 스트레스로 입맛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뿐.

“아가씨, 팔을 들어 주세요.”

침실과 드레스룸을 가르는 파티션 뒤에서, 메이드가 허리에 달린 리본을 묶어 주었다.

“다 끝나면 황제궁으로 와요.”

“거긴 또 무슨 볼일인데…….”

“당신의 연인이 왔으니까.”

무슨 볼일인데 나를 괴롭히느냐, 투정하려던 입술이 멈춰 버렸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메디프가 나갔다. 이어 치장을 마쳐 준 메이드들이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후다닥 나가 버린 뒤에도, 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니 서 있었다.

* * *

“오필리어는 어디 있습니까?”

“네놈…… 지금 이 상황에 와서까지 그 애가 중요하냐? 이 쓸개 빠진……!”

정말이었다. 클레멘츠가 왔다.

눈물 나도록 익숙한 목소리. 그만 보면 흥분해서 막말하는 황제까지.

“성녀님께 네가 도착했다는 말은 전해 두었단다. 심문회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너는 방으로 격리되어 있다가 심문회장으로 들어가게 될 거다, 황태자.”

황비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클레멘츠가 겪게 될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클레멘츠가 돌아왔다. 돌아온 대가로 교회의 추궁을 받을 것이다.

2황자파가 벼르고 벼르던 심문이니, 봐주는 일은 없겠지. 한 번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려 할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요. 우선은 식사를 하도록 놔둬 주시겠습니까?”

클레멘츠는 태연히 밥이나 먹자고 대답할 뿐이었다.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메디프가 내 손을 잡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비어 있는 자리에 날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맞은편에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드니 클레멘츠의 보라색 눈이 보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수척해져 있었다. 시선을 받기 버겁다고 느낄 무렵, 수려한 은빛 눈썹이 찌푸려지며 그의 시선은 메디프를 향했다. 나는 그대로 눈을 피해 버렸다.

단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버거워서 앞에 차려진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닭고기 조각인지 자른 순무인지 모를 것들을 연신 찍어 먹고, 물을 벌컥벌컥 삼켰다.

“……오필리어.”

“오필리어, 갑자기 너무 빨리 먹는 거 아닌가요?”

맞은편과 옆자리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니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요 며칠 통 못 먹었으면서.”

통 못 먹었다, 란 말에 클레멘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석 쪽에선 황제와 황비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음식보다도 이 분위기에 체할 것 같았다.

뭐라고 반응해야 하는 걸까? 나는 물 잔을 내려놓으며 일단 웃어 보였다.

“우욱, 우웨엑!”

아까운 음식들이 변기를 통해 하수구로 흘러갔다. 숨을 몰아쉬다가 입을 헹구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클레멘츠는 어디 있지?

식사가 끝날 무렵 기어이 체하고 말아서, 주위에 양해를 구하고 방을 뛰쳐나왔다.

벌써 심문회장으로 끌려갔나? 같은 테이블에 황제며 황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 아무런 얘기도 못했는데.

초조해하던 눈에, 조금 떨어진 방에서 복도로 나오는 인영이 보였다. 절대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실루엣이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뛰지 마……!”

당황한 듯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팔목을 잡았다. 단단한 손의 감촉이 비현실적이었다.

“전하.”

문득 두어 발짝 옆을 보니 방에서 나온 사용인이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척 봐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좀 더 떨어져 주세요.”

사용인은 두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더요.”

그자는 성에 안 찰 만큼 조금 물러나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이 이상은 멀어질 수 없습니다, 레오라 영애.”

여전히 클레멘츠는 제국의 황태자인데. 이제는 맘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사람을 물리는 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분해서 바들거리는 주먹을, 클레멘츠의 큰 손이 감싸 왔다.

“괜찮으냐?”

“…….”

사실 그동안 확신할 수가 없었다.

클레멘츠가 황궁에 갇혀 있는 나를 걱정하고 있을지.

아니면 기어이 독단으로 함정에 빠져, 그의 발목까지 잡는 나에게 화가 나 있을지.

하지만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목소리가 너무도 부드러워, 이제 조금의 의문도 남지 않았다. 대신 죄책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울면 안 된다. 걱정할 테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 보는 사람이 속상할 만큼 홀쭉해져 놓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웃어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메디프가 너를 박대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던 모양이구나.”

“아, 아니에요. 2황자님은…….”

기어이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슥슥 닦아 냈다.

메디프는 객관적으로 내게 잘 대해 주었다. 그러니까, 인질치고는.

아니,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가 대수가 아니잖아요. 대체…… 여기 왜 오신 거예요? 오시면 안 되잖아요.”

그의 손가락이 연신 내 눈가를 닦아 내었다. 슬퍼 보여선 안 된단 걸 알면서 울컥 눈물을 흘리고 마는 나의 나약함이 싫었다.

“네가 여기 있잖아.”

“그건 대답이 되지 않아요.”

살아 있기만 하면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설마 황궁에서 아다만티스인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황궁에 오면 심문을 받게 되리란 거 아시잖아요. 전하께 유리할 게 전혀 없다는 것도요. 아니, 그러니까…….”

듣지 않아도 그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는 모조리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의 눈에 담긴 건 나, 오로지 나였다. 식사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체하는 나. 울면서 그를 걱정하는 나.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다친 곳 없이 멀쩡한 몸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나. 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아연해졌다.

왜 자신을 걱정하지 않지?

왜 날 원망하거나, 조금이라도 질책하지 않지?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피해를 주었다. 나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이 위기를 좀 더 지혜롭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황비가 짠 계략에 희생양으로 자신을 넘기지도 않을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내 행동에 대한 일언반구의 추궁도 없었다. 그저 따사롭게 바라보기만 하는 눈을 견딜 수가 없어져서 내 모든 잘못을 그에게 고하기로 했다.

“죄송해요. 날아가지 않겠다고 해 놓고 날아와 버렸어요. 글로리나 부인이 너무 걱정됐어요. 전하도 걱정됐고요.”

“괜찮아. 나도 네가 걱정됐어.”

“……상황은 많이 심각한가요? 별궁은……? 듀프레 후작님은 뭐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응. 괜찮아.”

시녀가 자기 침실에 있었다고 칼을 들이밀며 위협하던 사람이, 괜찮다는 말을 쉽게도 내뱉었다.

뭘 해도 괜찮다고만 하는 그 앞에서 오히려 불안감이 치솟았다. 일이 이렇게 내게 편리하게 돌아갈 리 없었다.

“왜…… 왜 화를 안 내요? 제가 모든 걸 망치지 않았나요?”

훌쩍거리던 목소리가 조금 격해졌다. 클레멘츠는 살며시 내 등을 도닥였다.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겠어.”

“…….”

“사실은.”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너에게는 날개가 있지 않나. 길들여지지도 않고. 네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망토 자락을 꼭 쥐었다. 함께 궁을 나설 때도 입고 있던 검은 망토였다.

길들일 수 없는 존재. 자유로운 날개를 단 새. 그는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용서한 것 같았다.

이어 이마에 살짝 입맞춤이 닿고, 그는 돌아섰다.

“그만 가지.”

클레멘츠는 사용인과 함께 복도 너머로 멀어져 갔다.

클레멘츠가 돌아오자, 목표물이 없어 멈추어 있던 2황자파들의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갔다.

심문회 일정이 바로 그날 저녁으로 잡혔다. 어찌나 빠른지, 혹시라도 클레멘츠가 뒤이어 도착한 지지자들의 도움을 못 받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황태자는 따로 마련된 방에 격리되어 감시를 받았다. 흑마법사라는 게 알려진 마당에, ‘허튼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심문회가 열릴 곳은 수도의 시미크교회 내부에 있는 대예배실이었다. 황비와 메디프는 당연히, ‘황실의 정의를 바로 세울’ 이 자리에 황실의 상징을 몸에 띤 내가 참석하기를 바랐다.

물론 시미크의 대변자로 알려진 힐다가드 성녀 역시, 주관자로서 자리할 예정이었다.

머리에 쓴 베일의 느낌이 낯설었다.

레이스를 넣어 짠 얇은 직물은 옷과 맞추어 편안한 아이보리 색이었다. 예배를 하러 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예배실에 가는 거니까 이렇게 입어야 한다며, 날 조금 덜 겁내게 된 메이드가 건넨 옷이었다.

이곳은 대예배실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작은 기도실이었다.

힐다가드 성녀는 평소 거창하지 않은 조그만 기도실에 혼자 틀어박혀 기도하는 시간이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세계에 정말 신이 있을까? 수도에 와서 딱히 교회를 잘 다니진 않았기에 이 육각 건물의 구조는 깜깜했다.

하지만 다행히 일찍 도착한 교회 건물엔 때마침 청소를 하고 있던 푸근한 인상의 사제가 있었다. 그에게 헌금을 하며 평소 존경하던 성녀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니 이곳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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