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클레멘츠가, 그의 아름다운 새가 사라졌다는 걸 안 건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의식이 돌아올 즈음 단단한 몸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는 이불의 촉감부터 뭔가 이상했다.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없었다.
‘답지 않게 일찍 일어났나 보군.’
그리 생각하며 부러 불안한 예감을 억눌렀다. 화덕엔 아직 군불이 남아 있었지만, 오필리어가 없는 천막을 나서는 길은 묘하게 싸늘했다.
바깥에도 그녀는 없었다. 유렌과 카렌조차 행방을 모른다는 데서 이미 결판은 난 거였다. 허나 클레멘츠는 혹여 모를 단서를 찾아 아직 선잠에 빠져 있는 캠프를 전부 들쑤셨다.
‘새벽녘에 서쪽으로 날아가는 금빛 새를 보았다.’란 불침번의 증언을 듣고서야 그는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
“전, 전하.”
그는 단지 침묵했을 뿐이나 주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써늘해졌다. 입을 뻥긋거리는 사람도, 감히 함부로 숨을 쉬는 이도 없었다.
여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황태자가 외유를 가장한 망명길에 가장 먼저 챙긴 사람이었다. 그리도 지극하던 연인이 사라졌다.
당시 불침번을 섰던 수행원 역시 빠르게 공기를 읽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그때 바로 전하께 보고 올렸어야 했는데.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를…….”
“네놈은 대체 왜……!”
끓어오르는 분노는 단정하던 목소리도 엉망진창으로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클레멘츠는 겁에 질린 수행원을 두고 멈추었다. 피가 나도록 말아 쥔 주먹이 새하얗게 질렸다.
“……됐다.”
저 수행원이 즉각 그를 깨웠더라면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든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오필리어는 떠난 지 오래였다.
꼭두새벽에 진작 달아났으니 이미 궁에 도착했을 터였다.
아무리 잠들었었다지만, 자신의 둔감함에 혐오감이 치밀었다.
“저, 전하……?”
그는 질끈 눈을 감은 수행원을 뒤로했다. 천막에 도착하자마자 벽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통째로 동맥이 된 듯 뛰었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필리어.’
어떻게 그 아이를 이런 식으로 놓칠 수 있지? 스스로의 무능함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것인지,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인지 모를 악의와 살의가 피를 타고 흐르며 뼛속을 뒤흔들었다. 죽어. 죽어. 죽어. 감히 그 애를 내게서 빼앗다니. 그 애를 유인하다니. 보고도 지나치다니. 제대로 보살피지 않다니. 위험에 빠뜨리다니. 지키지 못하다니.
어둠 속에서 검붉은 색이 짙어진 보라색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특히 황궁 안에 똬리를 튼 더러운 것들을 다 도륙하고 싶었다. 황족이든 귀족이든, 성직이든.
사실은 몹시 간단한 일이었다. 한 꺼풀의 의식을 벗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전부 해결하고도 남을 힘이 나왔다. 이미 한 번,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사용한 적 있지 않던가.
클레멘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로 지척에 있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목과 어깨에 걸친 부분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이 악마.”
그 순간 문득 그런 목소리가 생각났다. 사랑스런 이의, 그를 두려워하던 모습도.
평민 아이 하나 죽는다고 울상을 짓던 여자였다. 피바다가 된 황궁을, 혹은 수도를, 제국을 목도하고도 예전처럼 그를 봐줄 리 없었다.
하여 그는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의식을 사로잡는 살의도, 목덜미를 태울 기세로 치닫는 마력도 없어졌다. 대신에 느슨한 탈력감이 자리했다.
‘그녀를 되찾아.’
생각나는 건 기이하게도 그것 하나였다.
황비의 속셈에 맞서거나, 황태자로서 권위를 되찾거나, 코리오트 별궁을 향해 지지 세력을 통솔하는 따위의 것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과업이었다.
클레멘츠는 새삼 깨달았다. 그에게 중요한 이는 오로지 오필리어였다.
“전하…….”
“전,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시스를 비롯한 몇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천막 안에서 책상에 기대어 있는 황태자의 얼굴은 척 보기에도 창백했다.
“저……. 레오라 영애께서는.”
그녀는 황태자의 역린이었다. 한 명이 우물대며 입을 열기까지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클레멘츠의 죽은 시선이 열의 없이 그를 향했다.
어떻게 한다?
냉정히 따지자면 집사장을 버렸듯이 그녀 역시 버리고 가야 한다.
그러나 저 얼굴을 앞에 두고 감히 그의 연인을 버리자고 할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무사하실 겁니다.”
우선은 그를 달래야 한다.
“황실의 상징인 국조(國鳥)로 변하시지 않습니까. 황궁에서도 그분께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
필사적인 시도에도 클레멘츠의 반응은 미미했다.
“구해야 합니다.”
불편한 침묵을 깬 건 카시스 후작의 목소리였다.
“물론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오필리어 님을 해하지는 않겠으나, 황실의 호의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분을 언제까지고 맡겨 둘 순 없습니다.”
“허면…….”
황태자를 포함한 본 행렬은 별궁행을 계속하되, 오필리어 양을 구출할 수 있도록 별도의 일행을 꾸려야 했다.
상심에 빠져 있는 듯한 황태자를 놔두고 부관들끼리 대책을 속닥거렸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클레멘츠는 전부 듣고 있었다.
동시에 계산과 예측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반짝였다.
이미 황궁에서 황태자의 핵심적인 인력을 추려 나왔다. 여기서 인원을 더 나누면 별궁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다음 계획을 실행하는 데 차질이 빚어졌다.
정보의 총책임자인 로메오 글로리나가 잡힌 마당에 구출에는 얼마나 걸리고, 연락책은 제대로 작동할지 의문이었다. 모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클레멘츠 자신은 초조함에 떨고 있을 터였다.
또한 로메오 글로리나.
그녀가 이따금 수상하게 주무르며 한숨을 쉬곤 하는 약병의 내용물이 독약이란 것쯤은 그도 진작 알고 있었다.
모후를 향한 충성에서 이어지는 맹목성. 옛 출신으로부터 비롯된 극단적인 효율성.
머지않아 유모는 정말로 그 약을 마셔 버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오필리어. 가장 소중한 오필리어.
측근들의 말대로였다. 황실은 그녀가 가진 상징성과 인기를 겁내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무너뜨릴 수작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녀가 황궁에 고립되어 있는 지금이라면 더 손쉬웠다.
그뿐이면 다행일까. 책임을 은폐할 수만 있다면, 적들은 얼마든 그녀에게 더러운 손아귀를 벌릴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하.”
그간 어느 정도 합의를 마친 보좌들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클레멘츠는 그들이 다음 말문을 떼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내가 가겠다.”
“……예?”
비장하던 표정들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그는 막사 입구를 걷으며 덧붙였다.
“가장 빠른 말을 달려 전해라, 내가 가겠다고.”
“아, 안 됩니다! 전하. 전하……?”
“전하!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만은……!”
때 아닌 날벼락을 맞은 측근들이 허둥대며 따라나섰다. 하지만 클레멘츠는 오필리어가 조금이라도 다칠 수 있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다른 것을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설령 무너지는 것이 자신의 인생과 다른 이들의 신뢰라 해도.
“미안하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돌이키지 않을 선택에 대해 미리 하는 사과였다.
그녀를 잃고 얻는 것이 대체 무슨 승리란 말인가. 상상하는 것조차도 견딜 수 없는 지옥이었다.
* * *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단다. 큰 힘 앞엔 머리를 굽히고, 상황을 읽어 내 유리한 쪽으로 몸을 숨겨. 그렇게 못 하겠다면, 돌아가야지.”
헛소리야.
“그가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 같니?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감정에 취해서…….”
아니다. 저런 일그러진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를 물리치려고 귀를 막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클레멘츠.
글로리나 부인에겐 클레멘츠의 곁에 오래 살아남아 달라고 말씀드렸지만, 정작 나는 내 몸을 돌볼 만한 염치가 없었다.
부인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코리오트 별궁으로 떠난다고 했지만, 어쩌면 좀 더 신중히 사람을 보내 부인을 구할 방책을 세웠을지도 몰랐다. 나는 확실히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다.
지금쯤 다들 별궁에 있겠지. 뭔가 상황을 타개할 만한 좋은 수단을 마련했을 거야. 예를 들면 2황자파가 고의로 소문을 퍼뜨렸다는 증거를 찾았다든가…….
그러니 클레멘츠는 잘 있을 거고 앞으로도 잘해 나갈 거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달래도, 한 가지 공포가 줄곧 날 괴롭혔다. 나를 찾으러 그가 황궁으로 와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함정이고 덫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또, 그렇게 떠나와 버린 나를 클레멘츠가 용서할까?
잠자리에 누워 날 지키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일어나요.”
무시하고 베개에 좀 더 안정적으로 파묻혔다. 레이디의 방에 쳐들어와서 명령까지 하다니.
“……휴우, 오필리어 레오라.”
“왜요? 분명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하셨던 거 아닌가요……? 으! 뭐 하는 짓이에요!”
메디프 놈이 대뜸 내 이불을 빼앗아 가 버렸다. 나는 즉시 발딱 일어나 대들었다.
“메디프 블레시드 뒤싱겐 황자 전하! 어떻게 이렇게 무도하실 수 있죠?”
“그쪽은? 어떻게 사람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방 안에만 있을 수 있죠? 내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아예 안 나오기로 결정했나?”
모자가 하나같이 사람을 가만 안 놔둔다. 대답 없이 노려보자 그는 손뼉을 쳤다.
방 밖으로 물러나 있던 메이드들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레오라 영애를 치장해 드려라.”
“예, 황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