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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64)화 (164/218)

164화

“자, 이걸 보렴.”

때맞춰 클라우디아가 평소의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손끝은 황후의 묘비를 가리켰다.

“셀레네도 처음엔 사랑을 믿었을 거야. 하지만 그 여자의 최후가 어찌 되었는지…….”

대리석 관 과 몇 줄의 작위명으로 남은 여자.

다들 현 황제가 셀레네 황후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암암리에 그녀에 대한 악소문이 돎에도, 황제는 24년간 그녀를 위해 한마디의 해명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녀가 남긴 유일한 친혈육을 부당하게 대했으며, 황후의 무덤은 궁 구석에서 꺼림칙하고 음산한 곳이 되었다. 이렇게 침묵할 뿐인 황제가, 한때는 정말 그 여자를 사랑했을까?

조금 전 나를 밀쳤던 손이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감정에 취해서, 온몸을 던지고, 하물며 교단과 황제 폐하의 뜻까지 거스르겠다고?”

갑자기 내가 벌인 모든 일이 터무니없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황비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귓가로 살살 스며들었다.

“네가 다 옳은 것 같고, 선한 것 같고, 세상이 네가 믿는 대로 굴러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야.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단다.”

무덤에 들이치는 바람이 차서인가. 어깨와 손이 오슬오슬 떨려 왔다. 황비는 그런 내 몸을 도닥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큰 힘 앞엔 머리를 굽히고, 상황을 읽어 내 유리한 쪽으로 몸을 숨겨. 너처럼 작고, 미약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단다.”

“……황비 마마, 저도 몰라서 그러지 않는 게 아닙니다.”

신분으로 따지면 내가 황비와 비교도 되지 않는 약자인데.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원칙을 어떻게 모를까.

그녀는 맥 빠진 날 보고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분노가 상당히 옅어진 듯했다. 미세하게 주름진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졌다.

“그렇게 못 하겠다면, 돌아가야지.”

“…….”

“너의 허름한 남작가로 돌아가렴. 마구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집과 숲지기보다 나을 게 없는 남편감이 있겠지만, 적어도 거기서라면 이곳 같은 피바람은 불지 않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황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오연한 걸음으로 걸어 나간 무덤 안엔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가 바쳤던 장미가 마르고 바스러진 검붉은 꽃잎이 되어 바닥에 쓸렸다.

클레멘츠를 포기하는 것도, 혼우드로 돌아가는 것도 전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엔 명료한 죽음의 흔적이 있었다. 어쩌면 저 무덤이 내가 걸을 길의 미래를 대신 알려 주는지도 몰랐다.

묘비명을 한참 바라보다가 부릅떴던 눈을 감았다.

이곳은 하염없이 추웠다.

* * *

글로리나 남작 부인 로메오는 원래 귀족이 아니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귀족님네들 대신 피를 흘리던 심부름꾼이, 마법 재료를 찾아다니던 제국 유일 흑마법 가문의 영애와 만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공녀 셀레네는 로메오를 시녀로 거두었다.

다룰 줄 아는 거라곤 흉기뿐인 암살자에게 다구를 손질하고 옷을 다리는 법을 가르쳤다.

최적 효율로 적의 숨통을 끊는 움직임 대신, 궁정식 예의범절을 몸에 익히게 했다.

이후 황후가 되어 출가하면서 자기 몫으로 상속된 글로리나 남작령을 로메오에게 주었다. 그 이전부터 셀레네의 죽음 이후까지 로메오는 그녀의 충복이었다.

지금, 로메오는 셀레네가 남겼던 약병을 돌려 보고 있었다. 주인이 만들었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검은 약병 역시 우아하고 섬세했다.

“셀레네 님, 그건 뭔가요?”

“이거? 마법약이야.”

셀레네는 마법에 천재적이었지만, 일자무식인 로메오에게도 대충 쏘아붙이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걸 먹으면 꿈 없는 잠을 자게 되는데, 그럼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도 된대. 신기하지?”

“셀레네 님, 세상은 그런 걸 독약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맞네. 독약이야.”

셀레네는 멋쩍어하며 약병을 내려놓았다. 손수 약초를 다듬고 섞으며 나온 풀물과 가루가 흰 손가락에 붙어 있었다. 수수한 차림으로 물약과 책장들 속에 파묻혀 있을 때조차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건 네게 주려고 만든 거야.”

처음에야 곱게 자란 아가씨가 뭔데 저를 휘두르려 하냐며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이때쯤의 로메오는 셀레네가 죽으라고 명하면 기꺼이 죽을 생각이었다.

투박한 손이 약병을 달라는 듯 자연스레 뻗어져 왔지만, 셀레네는 주춤대며 손을 물렸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거든. 혹시라도 모를 상황이 생기면, 치욕을 당하느니 목숨을 끊는 것이 귀족의 긍지라고. 그래서…… 내 것도 있어.”

그녀는 옆의 비슷하게 생긴 약병을 흔들었다.

“저는 귀족이 아닌데요, 아가씨.”

셀레네는 웃었다. 오후 햇살을 받는 아가씨의 미소는 찬란했다. 대낮에도 그 머리카락은 가장 맑은 보름밤의 달을 똑 떼어 온 듯 절묘했고, 붉은 눈은 잘 익은 포도주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맞아요. 저희 같은 자들에게도 그런 긍지가 있지요. 임무에 실패한 경우 소속지와 의뢰인을 위험에 노출시키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긍지요.”

로메오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셀레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너는 쓰지 않는 게 좋겠어.”

혹여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 죽어야 할 날이 오진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로메오는 셀레네의 명예가 아닌 누군가의 목숨을 위해 싸웠고, 죽는 대신 살아남았다.

야속하게도 먼저 떠난 셀레네의 유품 중엔 그 오후의 검은 약병이 있었다. 로메오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셀레네 님, 죄송합니다.”

아가씨가 새로 열어 주신 인생이니, 그 아들을 위하여 온전히 바쳐 왔다. 그간의 세월 동안 황태자를 돌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은 있었어도, 지하에 있을 셀레네에게 부끄러운 일은 없었다.

지금은 달랐다. 로메오는 지금이야말로 간직해 온 약을 마실 때라고 생각했다.

주인을 위해 분골쇄신해도 모자랄 판에, 급기야 이 낡은 몸이 주인의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

황비의 비열한 무리가 남의 약점을 잡는 건 밥 먹듯 흔한 일이었다.

고문도 그러했다. 어리석은 클라우디아는 그녀를 고문해 황태자에 대한 온갖 자백을 받아 내려 했지만, 로메오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인질이 되는 한심한 꼴까지도 견딜 수 있었다. 영민하신 주군은 로메오와 마음이 통했으며, 이성적으로 해로운 판단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오필리어 님이 황궁으로 날아왔다.

머리는 큰일이 났다며 비명을 질렀으나, 로메오의 심장은 그 옛날 셀레네에게 구원받을 때처럼 뜨거운 환희를 느꼈다.

모진 고문을 받고 뜬눈으로 지새운 새벽. 황금빛 여명을 머리에 지고 그녀를 찾아내 들여다보는던 신조의 모습을, 로메오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처음엔 허둥거렸고, 그다음엔 멍해졌다. 오필리어 님의 자유를 대가로 속박에서 풀려나 요양하게 되자 자괴감은 더욱 심해졌다.

오필리어 님. 다정하신 분. 사랑하는 셀레네 님의 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종에 불과한 이 몸을 구하러 올 만큼 상냥한, 로메오가 인정한 유일한 황태자비였다. 이미 그녀의 주인이나 다름없건만.

궁에 자리 잡은 망할 놈들이, 저를 무기로 휘둘러 그런 오필리어 님을 협박하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황궁에 잡혀 버린 오필리어 님은 황태자 전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황태자 전하에게 중요한 때였다. 이런 때에 두 분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좋지 못한 결과를 볼 게 뻔했다. 그리고 로메오 글로리나는, 그런 꼴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돌고 돌아 자신이 주인의 발목을 잡는 그런 상황 따위는.

그녀는 검은 약병을 주머니에 잘 넣어 두고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주인을 잘 보필해 왔다고 자신했다. 체계를 만들고 사람들을 키워 내 배치했으니, 저 한 사람이 없어진대도 곧 기강이 잡힐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제 목에 매인 주인들과의 사슬을 잘라 내 충성을 다하고 싶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셀레네 님의 무덤이었다.

황후 셀레네의 무덤은 황궁에서도 으슥한 곳에 위치하며, 금지 구역에 속했다. 평소라면 인적이 드문 그곳에 가는 동안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글로리나 부인…….”

그러니까 꼭 이런 곳에서 이런 때에, 오필리어 님이 울상을 지으며 제게 달려오는 건 우연의 짓궂은 장난이거나 운명일 터였다.

“오필리어 님? 무슨 일이십니까?”

로메오는 품 안에 폭 안기는 작은 몸을 감쌌다. 걱정스러울 만큼 차가웠다.

“저쪽에서 어떻게……. 황후 마마의 묘에 가셨던 겁니까?”

“네. 클라우디아 황비가 절 그곳에 데려갔어요.”

‘클라우디아…….’

감히 뻔뻔한 몸을 거기에 들여놓다니. 셀레네 님을 앞에 두고 오필리어 님께 무슨 헛소리를 해 댔을지 눈에 선했다.

“글로리나 부인.”

황금빛 눈이 간절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로메오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부디 오래 사셔서, 황태자 전하의 곁에 남아 주세요.”

“……오필리어 님.”

“클라우디아 황비는 다 떼어 내려고 해요. 전하에게서. 세력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그렇게 혼자 남기면 더 상대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

전하께서 혼자 남다니. 그런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 과연 저 하나의 빈자리가 그렇게 클까?

의문을 품는 로메오에게 오필리어는 눈빛으로 긍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남아 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절실했다. 지금 같은 때엔, 가족이라면 특히나 더.

글로리나 부인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유령 같은 눈을 하고 있는 건 무서웠다.

“……알겠습니다.”

제가 아니면 그 누가 그분의 곁에 묵묵히 남을까.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면, 감히 자신이 빠질 수는 없었다.

오필리어 아가씨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한 얼굴로 기쁘게 웃었다. 그 낯을 보니 더욱 떠날 수가 없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드는 게, 꼭 셀레네 님처럼.

로메오는 주머니 속의 약병을 꼭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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