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비밀과 추문 속에 잠든 황후의 무덤은 고요하기만 했다.
비문 아래엔 샹그리아가의 상징인 달과 포도주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 요철을 쓰다듬다가 돌아섰다.
클레멘츠의 어머니라 생각하니 애달픈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황궁에서 금지 구역이었다. 원작에서 바로 이 클라우디아가 벨라를 함정에 몰아넣었던 음모의 현장.
자연스럽게 긴장이 됐다. 그녀는 결코 좋은 생각으로 날 여기에 데려오지 않았으리라.
“이걸 보여 주시려고 절 아까 그곳으로 부르신 건가요? 남의 무덤을 보여 주고 겁주려고?
“이게 누구의 무덤인지 아니?”
“황후의 무덤이잖아요.”
“아니, 살인자의 무덤이야.”
살인자라고?
셀레네 황후가 악마와 관련됐다는 건 알았어도, 살인 얘긴 처음이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라도 했나? 혼란스러웠다.
“무슨…….”
클라우디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순진한 오필리어야, 내가 어떻게 황가에 시집왔게?”
클라우디아가 황비가 된 것은, 클레멘츠가 태어나고 셀레네 황후가 죽은 거의 직후였다.
그러나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베일에 싸여 있는 그 진실이 두려웠다.
“열여덟.”
돌로 지어진 무덤에선 소리가 잘 울려서인지, 언제나 온화하던 황비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느껴졌다.
“그때 황후가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 궁으로 차출되었던 페리윙클 가문 마법사들의 숫자란다. 그리고 그들은…….”
“…….”
“한 사람도 남김없이, 시체가 되어 돌아왔어.”
그녀와 내 거리는 이제 지척이었다. 뒷걸음질 쳤지만 등에 닿는 건 차가운 비석의 감촉이었다.
“왜, 왜 죽었는데요?”
“그들이 본 것을 세상 밖으로 퍼뜨리면 안 되었으니까.”
그렇다면 황실이 페리윙클의 마법사들을 이용해 놓고, 입막음을 위해 다 죽였다는 얘기였다.
“우리 가문이 입은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황제 폐하께선 페리윙클에서 황비를 들이셨단다. 나 하나의 인생으로 열여덟 명의 삶을 갈음한 셈이지.”
충격적이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고개 들어.”
차가운 손가락이 내 턱을 감싸 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건데요?”
내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렸다. 클라우디아가 픽 웃었다.
“셀레네 디 샹그리아가 아이를 낳으며 무슨 난장을 피웠는지는 나도 모른다. 실제로 악마를 소환했든, 악마와 접붙었든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
“그런데, 들키지는 말았어야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황실과 가문에 치욕을 남기고, 제 자식의 인생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진 않았어야 해. 안 그런가요, 황후 마마?”
그녀는 조소를 띠며 내 뒤편의 비석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저 괴로웠다.
클라우디아는 페리윙클가와 황제의 거래로 시집왔다고 했다. 거래품으로 전락한 그 처지가 싫어서 죽은 황후를 원망하는 걸까?
“하지만……. 마법사들을 죽인 건 황제 폐하잖아요. 황비 마마를 통해 손해를 메꾸려고 한 건 페리윙클 공작가의 결정권자들이고요.”
순간, 황비의 푸른 눈에 날것 그대로의 분노가 일었다.
나는 그 매서운 섬광에 흠칫거렸다.
“그 입 다물어! 너 같은 게 뭘 안다고 정말 잘도 떠드는구나.”
“윽……!”
강하게 떠밀린 등이 차가운 돌벽과 부딪쳤다. 황비는 이어 노도처럼 나를 몰아붙였다.
“셀레네는 마녀야! 제가 그리 되길 선택했다고. 자식의 인생까지 진창으로 처박았잖아!”
“마마, 놔주세요…….”
클라우디아는 즉시 나를 사납게 뿌리쳤다.
“악!”
그 서슬에 난 묘비 앞에 팽개쳐지다시피 주저앉았다. 바닥에 박은 무릎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났다.
이쯤 되니 나도 설설 기는 건 지쳐 버렸다.
“우리가 무슨 술수를 부리건 네가 사랑하는 황태자 전하가 당당히 이길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럴 리 없지. 그놈은 존재 자체가 추문이야!”
“그분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이상하게도, 그녀가 클레멘츠에 대한 막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머리엔 열이 뻗치고 손이 벌벌 떨렸다.
그렇게 분노하지 않았다면 사람 목숨쯤은 파리처럼 여기는 황비 앞에서 바락바락 소리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클라우디아는 되레 코웃음을 쳤다.
“출생부터 달라붙은 불결한 과거를 헤집으면, 친아비인 황제 폐하는 물론 귀족들까지 등을 돌릴 거란다. 클레멘츠는 황제가 되지 못해. 분하니?”
그녀는 비웃으며 날 내려다봤다. 나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상관없어요.”
“응?”
황비는 순간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상관없다. 클레멘츠가 황족이든 아니든, 황제가 되든 말든. 설령 정말 악마라고 쳐도 똑같이 좋았다.
내 말을 곱씹던 클라우디아는 이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후훗…….”
내 대답과 마음을, 앞에 엎드려 있는 내 존재 자체를 유희거리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어리석은 계집애야. 네가 신경 안 쓴다 쳐도, 그 애도 그럴 것 같니?”
“……그게 무슨 소리죠?”
“아하하, 모르겠니? 어쩌다 이런 게 황궁에 와서는.”
“…….”
사실, 알 것 같았다.
클레멘츠는 황제의 완벽한 후계자로서 살아온 사람. 내가 그의 패배에 연연하지 않고 그와의 사랑이면 족하다 해도, 클레멘츠도 똑같이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정쟁에서 패할 경우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두려워졌고, 슬펐고, 화가 났다.
애당초 클라우디아는 나에게 왜 이럴까? 우리를 절벽에 떠밀어 놓고 더 절망하라고 종용하고 있지 않나.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다리가 풀렸지만, 내려다보는 시선이 고까워서라도 억지로 딛고 일어났다.
“혹시, 2황자 전하를 위해서인가요? 진흙탕 같은 황위 다툼에 밀어 넣고 이렇게 지독하게 구시는 게. 전부 그분을 위해서라고 하진 않으시겠죠?”
“부모가 자식을 위하지 않으면 뭘 위한단 말이니?”
황비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우스운 소리도 없을 거다. 이 짓이 전부 자식을 위해서라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도요?”
“……뭐?”
“2황자님께선 그다지 황제가 되실 생각이 없어요. 차라리 탑에서 마법 연구하고, 주변의 여성들과 즐겁게 잡담이나 나누실 때가 훨씬 좋아 보이셨어요.”
이 상황에서 메디프 걱정까지 해 줄 생각은 없지만.
습관적으로 그놈의 반질거리는 미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렇지. 표정이 걷히면 그 맨얼굴이 얼마나 공허해 보이는지 모른다.
클라우디아의 눈이 흔들렸다. 이젠 내가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황비와 나는 둘 다 몸집이 작았고, 눈높이는 얼추 비슷했다.
“황비 전하께선 아드님을 위하는 게 아니세요. 자신을 위하시죠.”
“……내가 메디프를 위하지 않는다고?”
“그분은 지금 눈을 거꾸로 뜨고 봐도 불행하던걸요. 원하는 걸 포기하게 하고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게 위하는 건가요?”
“……하!”
황비의 낯빛이 붉어졌다가, 이내 새하얘졌다. 푸른 눈에 지독한 살의가 담겼다.
“너 같은 게, 너 따위가……. 네가 뭘 안다고 내 자식에 대해, 내 선택에 대해 말을 얹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금세라도 내 멱살을 잡아챌 듯 손가락을 꿈틀대다가,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마법 같은 걸 잘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데? 죽은 열여덟 명의 친척들은 전부 다 출중한 마법사였어! 영특하다 칭송받고, 앞길이 창창했었지! 그래 봤자 황제의 한마디면 쓰고 버려지는 게 마법사야!”
그리곤 쏟아 내듯 소리쳤다. 가냘픈 음색의 목소리가 돌무덤의 벽에 부딪히며 기묘한 울림을 남겼다.
“여기서 사람 목숨은 걸레짝이나 다름 없어. 잘 해봐야 크로나 한두 장짜리지. 그런 이곳에서, 내가 살아남아야, 내가 잘 있어야… 그래야 그게 내 자식을 위하는 거야. 그렇잖아?”
클라우디아는 홱 돌아서며 내게 다가왔다. 희번덕이는 눈은 꼭 내게서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정작 자신이 남의 목숨을 쓰고 버리는, 자신과 제 자식의 목숨만 귀한 줄 아는 그녀가 하는 말엔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황비께선 2황자 전하를 사랑하긴 하시는 모양이에요. 그걸 아니 황자님께서도 묵묵히 따르시는 거고.”
적어도, 철저히 자신을 위해 행동하면서 메디프를 위한다고 우기는 저 오만한 착각을 깨고 싶었다.
“하지만 2황자 전하는 당신의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불행하겠네요.”
“그 입 다물어!”
황비는 급기야 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사랑! 너 혼자 진정한 사랑을 하는 척, 가증스러운 것! 내가 하는 게 사랑이야. 이 세상에 어미의 사랑보다 진실한 게 어딨어?”
답답한지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기도 했다.
부모도 부모 나름인 것을.
굳이 더 입 밖에 내 그녀를 자극하진 않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저 여성에게 뺨까지 얻어맞긴 싫으니까.
모르긴 해도 클라우디아 황비가 외부인 앞에서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건 굉장히 오래간만의 일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평온하고 우미한 낯을 하고 살아왔으니.
지금은 날 보는 시선에 맹렬한 증오의 파도가 치고 있었다.
저 요동이 바로 자신의 양심을 묵살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본인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겠지.
잠시 뒤, 클라우디아는 서서히 평정을 되찾아 갔다. 분노로 바르르 떨리던 어깨가 잦아들고, 노도와 같던 눈동자도 조금 잔잔해졌을 때.
문득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사랑……. 너는 그가 영원히 너를 사랑할 것 같니?”
“……네?”
“황태자 말이야.”
“그야 당연하죠.”
“정말?”
클라우디아의 끈질긴 눈빛이 따라붙었다. 마치 깊은 곳에 있는 내 의심을 알고 있노라 말하듯이.
가장 영원할 듯하던 사랑이 실은 한순간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사랑은 꽉 닫혀 불변하는 낙원이다. 클레멘츠 역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라고 믿었지만, 사실 이곳은 소설 속이 아니기도 했다.
이 감정마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끝없는 허공에 발을 빠뜨려 버린 기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