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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62)화 (162/218)

162화 

이제 그만하죠, 하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시종이 다가왔다.

“황비 마마께서 레오라 영애를 찾으십니다.”

“오필리어 양을? 내가 아니고?”

“예.”

시종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가 볼게요.”

체스판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흑막 황비가 무슨 일로 나를 부를까?

예전 같으면 두려웠겠지만, 지금은 메디프와 함께하는 어색한 자리를 피할 수 있어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쪽입니다, 레오라 영애.”

시종의 안내를 따라 걸어갔다. 매일이 휴가 같고, 소풍 같던 황궁은 한순간에 황량하고 살벌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어이, 저기 봐.”

“어디?”

“저쪽에 지나가잖아.”

정원으로 개방된 회랑을 걷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사용인들이 두셋씩 모여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날 안내하던 시종은 앞만 보고 걷느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니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황태자께서 승승장구하실 때는 옆에 꼭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더니만, 그분이 불리해지니까 이젠 2황자님 옆자리를 홀랑 꿰차는군.”

“하! 누가 아니래? 황태자께서 얼마나 극진히 대해 주셨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솔직히 변방 남작가면 그리 높은 신분도 아니잖아?”

…….

정말 내 얘기가 맞았다. 주어는 없었지만. 맞는 소리는 하나도 없지만.

이렇게 원색적인 적의를 접하는 건 처음이었다. 손바닥엔 식은땀이 나고 목 줄기는 뻣뻣하게 굳었다.

“처음엔 코리오트 별궁으로 따라가더니, 중간에 마음이 바뀐 모양이지?”

“2황자 전하도 그렇고, 저런 여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다들 어화둥둥인지. 나 참.”

더는 듣고 있기 힘들었다. 

“레오라 영애……?”

안내하던 시종이 나를 되돌아보았다. 우뚝 서서 노려보자 그들도 찔렸는지 흠칫대며 입을 다물었다.

막상 눈을 마주치니 바로 입을 다무는 모습이 같잖았다.

“레오라 영애, 송구합니다. 아랫것들 단속을 더 잘하라 이르겠습니다.” 

노려보는 나와 사용인들을 번갈아 보던 시종은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숙였다.

“……됐어요. 갈까요? 황비께서 기다리신다고 하셨잖아요.”

“……예.”

굳이 지금 저 사람들의 생각을 고쳐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 봤자 저들의 악의가 사라지지도 않을 테니.

“오, 오필리어!”

당연히 황비궁에서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클라우디아 황비가 날 부른 곳은 이도 저도 아닌 구석진 데 위치한 가제보였다.

그녀는 활짝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마치 내가 몹시 반갑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황비 마마를 뵙습니다.”

“어서 오렴. 요즘 잘 지내고 있니? 메디프가 챙겨 준다곤 하던데, 그 아이가 뭘 알겠니!”

메디프가 날 감싸고 도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부 그저 감시에 불과했다. 협박에 못 이겨 갇혀 있는 처지에 허울 좋은 대접이 진심으로 기쁠 리도 없고.

황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잘 지내냐느니, 메디프가 챙겨 주냐느니, 웃기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녀가 손짓하자, 곁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넓고 야트막한 상자를 가져와 열었다.

안에는 세트로 맞춘 듯한 드레스와 모자, 구두가 들어 있었다.

“어떠니?”

“아주 예쁘네요.”

수수하되 초라하지 않고, 기품이 흘렀다. 황비 자신의 성격처럼, 그리고 그녀가 자주 입는 옷들이 그렇듯이.

내 정체를 생각하여 만든 듯 빛깔은 황금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스럽게 만들었다고 해도 유렌과 카렌의 톡톡 튀는 감각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클레멘츠와 해돋이를 구경하라고 경치 좋은 곳까지 찾아 줬건만, 나는 클레멘츠를 기절시키고 나 혼자 해 구경을 했다. 기껏 염려하며 보살펴 주었더니 제 발로 사지에 굴러 들어간 내가 밉지 않을까.

“그렇지?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로구나. 네게 주려고 특별히 마련한 거란다.”

“제게 주시는 건가요?”

“물론이지. 부디 이 선물을 입고 국혼식에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국혼식 참석.

내가 궁 안에서 겉으로나마 멀쩡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건, 메디프와의 약속도 있지만 나의 상징성 때문이었다.

국가의 번영을 상징하는 아다만티스가 모습을 비친다는 것만으로 황실의 위상은 높아졌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황제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놈의 금빛 새로 모습 좀 변한다고.

내가 저 옷을 입고 국혼식에 참석하면, 사람들은 황제 부부가 신의 축복과 선조의 축복을 동시에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면 저야 영광이겠지요.”

정말 가기 싫다.

“어머나! 그런 말은 마렴. 당연히 와야지!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오필리어, 네가 마음에 들었단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

황비는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웃으며, 열린 상자 안의 드레스를 들어 내 몸에 대어 보였다. 친근한 손짓이었다.

“나는 슬하에 아들뿐이잖니. 언제나 딸이 있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꼭 너 같은 아이가 있었다면 참 귀여웠겠어.”

날 곱게 볼 리 없으면서 딸이니 뭐니 하는 소리. 어떻게 저렇게까지 연기를 잘하는 걸까? 역겹다 못해 감탄스럽다. 저쯤은 해야 흑막 해먹는구나.

“황비 마마처럼 고귀하신 분께 어떻게 저 같은 딸이 있겠습니까.”

“후후후! 메디프도 마찬가지일 거야. 평소 아쉬울 거 하나 없단 듯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하나 있는 형제와도 살갑게 지내질 못했잖니? 정이 많이 고플 거야.”

“…….”

그 형제가 형제처럼 지내지 못하는 게 다 누구 때문일까.

“그러니 오필리어! 네가 메디프와 오누이처럼 지내 다오.”

처음으로 똑바로 뜨인 클라우디아의 눈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눈빛을 보고서야,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깨달았다.

‘오누이처럼.’

그러니까 저 말은 메디프를 ‘넘보지’ 말라는 경고였다. 아무리 친해도 오누이는 가족일 뿐이니까.

나 참.

오면서 만난 사용인들처럼, 클라우디아 황비 역시 내가 팔자를 고쳐 보려고 2황자비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클레멘츠를 끌어들일 미끼이자 여론을 끌어올릴 상징물로 날 이용할 거지만, 제 아들에게 내가 접근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황비는.

“제가 어떻게 감히 귀하신 황자 전하와 오누이처럼 지내겠어요. 과분한 말씀으로 절 부끄럽게 하지 말아 주세요.”

여기서 그녀의 황당한 오해를 상대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독사 같은 황비의 얼굴을 안 봐도 나는 죄수 같은 황궁 생활이 이미 힘에 부쳤다.

“초대와 선물 감사드려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예상은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나는 메디프를 꼬실 생각이 없다. 국혼식에도 할 수만 있다면 가지 않을 것이다. 클레멘츠가 없는 황가를 내가 뭐 하러 축복하겠는가.

그리고, 클레멘츠는 나를 구하기 위해 위험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 서렴, 오필리어.”

의외로 황비가 나를 따라나섰다.

“기껏 불렀는데 서운하게 벌써 가 버리면 어쩌니? 그래, 답답하다면 나와 함께 산보라도 할까?”

“……황공하옵니다만.”

불편해서 거절하려는데 오히려 그녀는 내 팔을 덥석 잡아챘다. 이대로 함께 걸으면 마치 다정한 고모와 조카라도 된 양 보일 것이다.

“너희는 들어가 보거라. 내 오필리어와 느긋하게 가 볼 곳이 있으니.”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은 황비가 선물한 옷상자를 챙겨서 후다닥 흩어졌다.

곧 나와 황비, 둘만 남았다.

“걷자.”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여 봤지만, 황비는 강한 힘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망할. 왜 이리 끈질기게 군담?

“절 어디로 데려가고 계신가요?”

“너도 참, 산책이잖아. 주변을 봐. 이맘때면 전나무의 이파리가 더 푸르러진단다. 가슴속까지 상쾌해지지 않니?”

아이 씨…….

피차 이 상황에 피톤치드나 흡입할 기운이 잘도 나겠다. 그녀의 얼굴에 씌워진 온화하고 무해한 가면은 좀체 벗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를 부른 가제보 주변은 황궁에서도 인기척이 드물었다. 거기서 마른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더 들어가니 음침하기까지 했다.

흑막과 단둘이 고립돼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 급한 마음에 말이 많아졌다.

“2황자 전하께는 관심 없습니다.”

“……!”

그제야 클라우디아는 내 말에 반응을 보였다.

“만약, 사람들 말대로 제가 그분께 의탁하려고 했다면 황궁으로 날아오자마자 2황자님의 품으로 뛰어들었겠죠. 집사장님을 구하려다가 바보같이 잡히는 게 아니라요.”

“그럼? 여전히 클레멘츠를 사랑한다고 말할 셈이니? 그 애를 믿으니까, 구하러 오길 기다린다고?”

천사처럼 웃던 황비의 얼굴엔 비웃음이 넘실거렸다.

“아니요. 기대하시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그분은 오시지 않을 거예요. 저를 미끼로 그분을 넘어뜨리려 하셔도 소용없어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허어.”

조금은 의외라는 듯, 황비는 푸른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더 볼 것도 없는 비웃음이었다.

“하하! 너는 딱 보이는 그대로 순진하구나. 네 말대로 네겐 이게 사랑 놀음이겠어. 사랑…… 아하하하!”

알 만하다는 듯 날 훑어보는 눈빛. 진정 즐겁다는 듯, 그녀의 웃음은 오래도 이어졌다.

“계속 비웃으실 거라면, 가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니?”

그녀는 창백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작은 건물로 들어섰다. 말은 안 했지만 따라 들어오라는 종용이었다.

주변은 잡초나 낙엽의 흔적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기묘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난 반사적으로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샹그리아 공녀, 델윈의 백작, 오르후안의 남작, 포네스와 리이트의 공비, 토브델카이 후작 부인, 으제니아와 라스티냑과 뤼시낭의 백작 부인이자 대 클라티아 제국의 황후 셀레네 디 샹그리아 뒤싱겐.

288-310

눈비가 내리듯 안식이 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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