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돌이켜 보면, 내가 그녀를 찾아낸 건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역시 지하에 감옥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거기 가두면 될 일인데. 뾰족 솟은 탑 꼭대기, 그것도 창문가에 앉혀서 묶어 놓았다. 마치 날아가는 새더러 보라는 듯이.
그리고 큰 새 한 마리가 드나들 수 있는 창살.
“설마?”
“맞아요. 당신을 확보하기 위한 덫이었답니다.”
“…….”
“생물의 경우 저 창을 넘어올 수는 없어도 나갈 수는 없죠. 마법사인 내게 그 정도 처치야 간단한 거고. ……어이쿠. 괜찮아요?”
메디프는 비틀대는 나를 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사람이 어떻게 이래요?!”
“의심을 좀 더 키우는 게 좋겠어요. 사람은 그럴 수 있죠.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어. 예측대로 굴러가지 않았다면, 애당초 당신이 그를 잘못 파악한 것뿐이에요.”
뭐……?
‘난 원래 이런 놈인데 몰랐냐’란 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하고 있었다.
기가 막혀서 한동안 쳐다보자, 그는 꼭 예전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순진한 오필리어 양, 황궁이라는 곳은 이렇게 굴러가요.”
“……하하.”
“어디 당신이 모르는 걸 알려 줘 볼까요? 유모님을 납치하는 건 우리 자랑스러운 어마마마의 생각이에요. 물론 그 여잔 중요하죠. 최측근 심복. 정보 수집가. 구할 가치가 충분해요.”
“…….”
“그 덫을 개조해서 당신을 걸려들게 한 건, 나예요.”
“…….”
“유모 소식을 듣는 순간, 구하러 오고 싶었죠? 이제 날개도 자랐겠다, 혼자서라도.”
겁이 나고, 슬프고, 분했다. 클레멘츠를 위하고자 한 일이 도리어 그에게 부담을 지우다니.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내가 옳다고 믿은 행동과 내 선의는, 메디프에겐 손바닥 위에 펼쳐 놓고 이용할 미끼에 불과했다.
“다 제쳐 두고 급하게 떠난 형님이라도 이러면 돌아오지 않곤 못 배기지.”
계속 헛웃음이 나왔다.
저주를 풀기 위해 메디프를 만날 때는 물론, 벨라에게 그가 수상쩍다는 경고를 들을 때까지도 설마 이런 짓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글로리나 부인을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요. 어떻게 할까?”
그는 느리게 팔짱을 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저놈의 어깨에 알량하게 걸쳐져 있는 흰 코트를 바닥에 떨어뜨려 마구 짓밟고 싶어서.
“잘 치료하고, 먹이고 입혀서 좋은 곳에서 재울까 하는데.”
“……또 뭔가 허튼 수작을 부리는 거죠?”
“아니. 내가 늘 허튼 수작만 부리며 사는 건 아니에요. 내 목적은 분명하고, 그게 확실히 이루어만 진다면 굳이 다른 수작을 부릴 이유는 없지.”
“별, 진짜……. 원하는 게 뭔데요?”
“아까 말했어요. 형님이 돌아오는 것.”
그걸 내가 어떻게 들어주느냐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다 계획이 있는 듯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이 이곳 황궁에 머물러 주기만 하면 돼. 대접은 걱정 말아요. 내가 직접 따라다니며 챙길 거니까. 어쩌면 황태자궁 생활보다 더 편할 수도 있어요.”
“…….”
“형님 유모는 내가 당신에게 칼이라도 댈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어림도 없지. 귀한 인질에게 내가 어떻게 그래?”
싱긋 웃는 저 면상에 주먹질이라도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황태자 전하가 돌아오시면? 성녀와 성직자들로 둘러싸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이라도 하려고요?”
“정확하네요.”
“그렇게 그분의 옷을 더럽혀서 계승권을 빼앗고, 당신이 다음 황제를 하시겠다?”
“응. 뭐가 더 있겠어요?”
“아니, 의외라서요. 2황자님이 관심 갖는 건 사람들과 노닥거리는 거랑 마법밖에 없지 않았나요?”
“…….”
그린 듯한 미소가 메디프의 얼굴에서 반쯤 녹듯이 사라졌다.
그랬다. 그는 이런 짓까지 할 만큼 황제 자리에 열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배신감이 심한 거였는데, 또 이렇게 콕 찔러 물어보니 찝찝할 만큼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나를 함정으로 몰아넣어 놓고는, 마치 자기도 이러기는 싫단 것처럼 자조적인 태도라니.
“날 데리고 있는 동안은 뭐든 내 뜻대로 하게 해 줄 건가요?”
“네, 기꺼이.”
그리 자신만만하시다면 나도 응해 줘야 하겠지.
글로리나 부인을 구해 내지 못한 내게 주어진 길은 하나뿐이었다.
부디 클레멘츠가 내 소식을 듣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길. 그리고 내가 결국 떠난 것에 너무 화가 나지 않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메디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성큼 다가서서 그의 코트를 낚아챘다.
“……!”
어깨에 불성실하게 걸쳐져 있던 코트는 쉽게 내 손아귀에 딸려 내려왔다.
“마음에 안 들어요.”
도톰하게 짜인 고급 모직은 주름 하나 없이 빳빳했다. 마르고 꿰맨 솜씨는 예사 것이 아니었다. 분명 새 옷이었다.
난 그걸 창문 아래로 떨어뜨렸다.
과연, 생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건 잘만 창문을 빠져나갔다. 새하얀 옷이 너울너울 바람을 탔다.
이걸로 글로리나 부인을 하룻밤 동안 추운 곳에 놔둔 앙갚음이 되진 않겠지만.
“황자님은 지금 차림새가 더 잘 어울리네요. 사람들이 그 착하고 순진한 척에 더 이상 속지 못하게, 옷이라도 새까맣게 입고 다니세요.”
“……분부대로 할게요, 레이디.”
눈 뜨고 옷을 빼앗긴 메디프는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화내거나 무표정이 되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으로 애매한 표정을 지을 때에야말로 메디프의 진심을 조금쯤 읽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진짜 이런다고 클레멘츠가 올 거라고 보시나요? 절대로 안 와요.”
“……글쎄. 그건 봐야 알지 않을까요.”
클레멘츠를 닮은 청보라 색 눈이 비로소 사르르 접혔다.
“그 사람을 저 같은 바보로 아시나요? 뻔히 보이는 덫에 뛰어들게.”
최대한 야멸차게 내뱉곤, 메디프를 밀치고 먼저 방을 나섰다.
이 앞으로는 크고 화려한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뛰어들었고, 눈속임이나 다름없는 얄팍한 권위가 나를 지키는.
어딘가에 갇혔던 앞선 모든 경우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결코 클레멘츠가 구하러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다.
그는 올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올 것이다.
오지 않는다.
…….
유리창 너머로 먼 산맥이 내다보였다. 어떻게든 황궁 밖으로 떠나려면 방법은 있으리라.
문이란 문을 다 틀어막을 순 있어도 하늘은 막을 수 없으니. 두 날개를 쳐 동쪽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글로리나 부인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지금 그녀는 약속대로 치료를 받고, 충분한 식사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불경하네요.”
“뭐가요?”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나서야 메디프와 식사 중이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수레국화. 황실의 꽃이란 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 가엾은 꼴을 봐요. 누가 불손한 의도로 해석하면 어쩌게요?”
테이블 위 화병에 담겨 있던 수레국화 꽃 한 줄기가 내 손에 아작 났다. 나는 꽃잎이 한 장만 남은 꽃줄기를 내려놓았다.
“꽃잎이 다 떨어져야 열매가 맺히는 법이죠.”
“언제나 입은 사셨다니까. 이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해요.”
팍 일그러진 눈매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메디프는 그날부터 전신에 새카만 옷만 걸치고 다녔다. 말은 잘 들었다. 누가 봐도 흑화한 사람이었다.
“조금은 먹어요.”
내 앞에 차려진 점심 식사는 거의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육즙이 살아 있는 스테이크와 풍미 좋은 소스. 적당히 익혀 곁들여진 채소와 포도주.
평소였다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겠지만 지금은 입맛이 전혀 없었다.
“지금 먹어 둬야 이따가 옷 고를 힘이 생기죠. 최근 인기가 많다는 재봉사를 섭외해 놨어요.”
보다 못한 메디프는 내 접시를 가져가 본인이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옷은 무슨. 필요 없어요, 전하.”
밥도 안 넘어가는 마당에 꼬까옷 맞출 정신이 어디 있어.
“별로예요? 그럼 마침 폐하께서 부르신 보석상이 오늘 온다니까 그쪽에 가 보죠.”
“제안은 감사하지만 안 내키네요.”
“그럼. 꽃구경 좋아해요? 정원 산책할래요? 체스를 둘까? 아, 도서관에 다시 가 보는 것도 괜찮겠네.”
대꾸할 의지조차 잃은 내 앞에, 적당한 크기로 일정하게 잘라진 스테이크 접시가 놓였다.
“원래 이렇게 새 모이만큼 먹는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죠?”
알고 있긴 하군.
“그래도 먹어요. 당신이 제 보호 아래 있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셔서 당신 수척해진 모습을 보면?”
“그분은 돌아오지 않으세요. 당신네들 같잖은 장난에 놀아나지 않으실 거라고요.”
메디프는 날카로운 내 대꾸에도 아랑곳 않은 채 할 말을 이어 갔다.
“그길로 저를 죽이려고 하실 텐데. 아무리 그래도 혈육 손에 죽기는 싫거든요. 자.”
그는 내 손에 깨끗한 포크를 억지로 쥐여 주었다.
예쁘고 포동포동하게 먹이고 입힌 죄수를 원한단 말이지.
“제가 먹여 주기를 원한다면 계속 그렇게 가만히 계시죠. 이쪽도 임자 있는 사람한테 끼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싫거든.”
어처구니없는 엄포였다. 그를 노려보다가 고기 조각 하나를 찔러 입에 넣었다. 구역감이 올라왔다.
싫어도 어쨌든 먹기는 해야 하루를 살아갈 힘이 난다. 음식을 배 속에 꾸역꾸역 쑤셔 넣은 뒤엔 메디프가 가자는 대로 끌려다녔다. 아무런 향기도 빛도 느껴지지 않는 꽃과 보석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 두면 당신이 져요.”
“그런가요?”
아랑곳 않고 내 비숍을 옮겨 메디프의 퀸을 먹었다. 그저 손이 닿는 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니 이길 수도 없고, 이길 생각도 없었다.
“……맞네요. 체크메이트네.”
메디프는 조용히 쓴웃음만 짓고 있었다. 뭘 해도 제대로 응할 마음도 없는 사람을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니 저쪽도 유쾌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