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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60)화 (160/218)

160화

황궁으로 곧장 날아갔다. 글로리나 부인은 거기 갇혀 있다고 했다.

아직 새벽이라 깨어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황궁 주변을 돌며 혹시 사람이 가둬져 있을 만한 공간이 없는지 살폈다. 외진 곳의 건물이나, 창문 없는 방, 높이 쌓아진 첨탑 등.

그러나 황궁은 넓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찾다간 끝이 없을지도 몰랐다.

괜히 정찰에 유리한 조건이라며 떠들고 나왔나?

으레 로판 황궁에는 지하 감옥 같은 공간도 있지 않던가. 혹여 그런 데 갇혀 있는 거라면 새의 모습에 아무런 장점이 없었다.

내려가서 다시 사람으로 변해야 하나? 옷을 갈아입고 어떻게든 변장을 하면…….

생각에 잠겨 활공하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찾았다.

서북쪽 구석에 위치한 탑이었다. 협소하지만 높아서, 날아서 살피지 않으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창살 너머로, 떠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앉은 여인이 보였다.

신수의 눈은 짧은 순간 그녀의 모습을 낱낱이 파악했다.

늘 동그랗게 말아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피가 말라 굳은 입술은 퍼렇게 질려 있었다. 필시 이 겨울날에 유리창조차 달지 않은 방에서 밤을 보냈기 때문이리라.

이 못돼 처먹은 것들.

하지만 이제 안심이다. 내가 왔으니까.

“……! 오, 오필리어 님……?”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던 글로리나 부인이 날 불렀다.

“꾸엑.”

“……!”

……아, 이런.

창살 사이를 멋지게 슥 통과해서 방 안에 착지하려고 했는데, 성체가 된 내 덩치가 생각보다 컸다.

“오, 오필리어 님…….”

글로리나 부인은 안쓰러운 듯 들썩거렸지만, 그녀도 의자에 묶인 신세였다. 철창 사이에 끼어 빠져나가려고 애쓰는 날 도울 순 없었다.

깃털과 금속이 격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침묵 속에 이어졌다.

“괜찮으십니까…?”

젠장. 누굴 구하러 오면서 나처럼 멋없는 경우도 없을 거다.

어쨌든 애쓴 끝에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금 전의 꼴사나움을 설욕하기 위해, 착지하면서 멋지게 인간으로 돌아왔다.

“글로리나 부인, 부인이야말로 괜찮으세요?”

곁으로 달려가 보니 하룻밤 만에 많이 상한 모습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면 정말로 부인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겠다.

“이렇게 직접 오시게 만들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에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필리어 님,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설마 혼자서……? 전하께선, 전하께선 이 일을 알고 계신지요.”

“…….”

역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말없이 의자 뒤로 달려갔다.

밧줄은 잘 풀리지 않았다.

“이걸 쓰십시오.”

글로리나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묶인 양발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해하며 뚫어져라 쳐다보니, 한쪽 신발 밑창에 작은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부인께서 이렇게 멋진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주인의 발목을 잡는 못난 종일 뿐이지요.”

“에이, 그러니까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하께서 엄청 걱정하셨어요.”

손과 발, 이어 몸통을 묶어 놨던 단단한 밧줄이 모두 떨어졌다. 온통 자국이 남은 팔다리를 주물렀다.

“추우시죠? 사람을 이런 데 가둬 놓다니. 이거 정말 미친놈들 아니야?”

부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갈색이 섞인 더티 블론드의 머리도 풀어 헤쳐져 있고, 집사장의 옷도 입고 있지 않아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잡힌 제 잘못이지요.”

으아아, 그게 뭐가 당신 잘못이에요?

내 머릴 쥐어뜯으며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글로리나 부인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방심했습니다. 수도를 벗어나기 전에 저를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야 하는 건데……. 달려든 놈들을 가까스로 쓰러뜨렸지만, 도망치는 길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놈들’이라니. 글로리나 부인은 비겁하게 떼거지로 달려든 놈들을 야무지게 해치워 버리신 거였다. 원작에는 이런 설정 안 나왔는데. 알고 보니 기사만큼이나 무력이 출중했다.

“만에 하나 제가 합류하지 못하게 되면, 전하께서는 예정대로 별궁으로 가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게 발목 잡혀 일을 지체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칼과 옷깃을 정리하고 두 손을 모았다. 최대한 단정한 모습으로 보이려는 움직임이었다.

“페리윙클과 교단 측은 황태자 전하와 오필리어 님을 거꾸러뜨리려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게 알려지면 큰일입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부인, 저는 부인을 구하러 온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다시 밖으로 나가서 문을 열고, 탈출로를 확보할게요.”

나는 새로 변해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있고, 품속엔 하빌 뿌리도 넉넉했다. 작은 탑에 많은 감시 인력을 배치하진 않았을 테니 조용히 움직이며 한 명씩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열쇠는 간수 역할을 하는 놈에게서 찾으면 되고.

“부인……?”

그런데 글로리나 부인은 갑작스럽게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바닥이 시리지 않으세요?”

일으키려고 해 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필리어 님, 저를 구하기 위해 먼 길 날아와 주신 것, 평생토록 잊지 못할 은혜입니다. 아가씨처럼 다정하신 분께서 전하의 옆에 계셔 주셔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막 비추기 시작한 아침햇살에, 글로리나 부인의 갈색 눈이 따뜻하고 단단하게 빛났다.

보통 이렇게 길게 속마음을 고백한 뒤에는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대사가 따라붙곤 한다.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홀로 여기까지 오시게 한 것만으로도 황태자 전하를 뵐 낯이 없습니다. 절 구출하시려다 위험한 일을 당하시기라도 한다면…… 저는!”

“왜 그렇게까지 걱정하시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했다. 하지만 사람을 구하러 나설 수 있는데 그러지 말라니. 거기서부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무모하다고 욕해도 좋았다.

“기다려 주세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글로리나 부인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다만티스로 변신했고,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다시 창살이 쳐진 창문을 통해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나갈 수가 없었다.

창문이 꼭, 무엇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목을 길게 뻗어 봐도 투명한 벽이 있는 것처럼 부딪혀 되돌아올 뿐이었다.

이내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다. 작은 탑 전체에 퍼지고도 남을 음량이었다.

뭐야……?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나쁜 상황인 건 확실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 밖으로 나갈 수가 없네요.”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와 상황을 설명했다. 글로리나 부인은 안 그래도 파랗던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셀레네 님…….”

꼭 최악의 상황에 신을 부르짖을 때의 말투였지만, 탄식처럼 흘러나온 이름은 익숙했다.

이내, 계단을 쾅쾅 뛰어오르는 소리와 험악한 투의 말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이 경보를 들은 모양이었다.

출구는 문과 창문뿐이고, 둘 다 막혔다.

변신해도 더는 손 쉽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병아리가 아니었으므로, 이대로는 나까지 잡히는 수밖에 없었다.

쿵쿵- 온몸이 심장이 된 듯 맥동했다. 머릿속은 희게 비워졌다.

“……가지 마. 내 옆에 있어.”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클레멘츠의 얼굴이 떠올랐다.

걱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고 웃으며 돌아가 말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내가 전부 마냥 쉽게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소란하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 사람의 걸음걸이가 유독 선명한 소리로 가까워졌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저 사람에게 검은 옷이 저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검은색 셔츠와 바지에, 어깨에는 흰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늘 편하게 내려 두었던 머리카락은 앞머리 절반을 깔끔하게 올렸다.

솜사탕처럼, 혹은 밝은 물빛처럼 보이던 머리 색이 갑자기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메디프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평소와 다른 차림을 해서가 아니라, 웃고 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글로리나 부인은 벌떡 일어나 나를 막아섰다. 결연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들렸다.

“2황자 전하, 이분께는 절대로, 털끝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셔야 할 겁니다. 당신의 형께서 친히 그 백배로 갚아 주실 것이니!”

……구하러 와서 지킴을 받다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안심하세요. 저도 오필리어 양을 아프게 하는 야만적인 행동은 원치 않으니까. 그런데, 로메오 글로리나. 당신.”

물 흐르는 듯한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그는 치가 떨릴 만큼 평온해 보였다.

“왜 일어나 있어요? 분명 저 친구들이 꼼꼼하게 묶어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메디프의 어깨 너머, 문밖에는 험상궂은 낯의 위병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과 목, 손 등 드러난 곳에는 언뜻 봐도 생채기가 한가득이었다. 글로리나 부인을 굴복시키고 포박하면서 난 상처로 보였다.

“그렇구나. 우리 병아리 아가씨가 한 일인가요?”

“병아리가 아닙니다, 황자님.”

“맞다. 전설의 국조이자 신수이신 아다만티스셨지. 집사장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멋진 모습은 잘 봤답니다.”

그는 작게 웃었고, 나는 화가 나서 할 말을 잃었다.

“당신과 이야기하려면 저 여자는 좀 방해가 될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옮겨 놔도 되겠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손짓하자 문밖의 위병들이 들이닥쳐 글로리나 부인을 끌어냈다.

“그만……! 안 돼요! 부인!”

“오필리어 님, 저는 괜찮을 겁니다. 꼭 무사하셔야 합니다!”

“아……!”

허겁지겁 쫓아갔으나 메디프의 손에 가로막혔다. 내 앞에서 문이 닫혔다.

홱 돌아 그를 노려보았다.

“글로리나 부인을 어디로 데려간 거죠?”

“글쎄요. 원래 목적에 충실한 곳?”

“말장난 그만해요! 그게 어딘데요?”

“이를 테면, 황궁 지하에 마련된 수감실. 거긴 일단 창문도 제대로 막지 않은 여기보단 지내기가 수월해요. 때 되면 밥도 나오고. 웬 당돌한 새가 구해 내겠다며 뛰어들지도 않죠.”

머릿속이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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