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희망이 빠르게 꺾이자, 모인 이들은 다른 걸 걱정했다.
“‘그 일’에 대해 집사장이 실토라도 한다면…….”
글로리나 부인을 단념해 버리기 직전 걸리는 최후의 돌부리였다.
“그럴 일은 없소.”
가만 듣고 있던 카시스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표정에 경멸이 떠올랐지만, 이내 눈을 감아 그런 기색을 감춰 버렸다.
“차라리 자기 몸이 상할지언정 집사장이 전하를 배신할 일은 없소. 걱정이 좀 덜어졌으면 좋겠군.”
“그, 그렇소이까. 듀프레 후작.”
머쓱한 대답이 끝난 뒤. 이내 결단을 요구하는 눈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 끝에는 클레멘츠가 있었다.
이 순간 그는 누구보다도 글로리나 부인이 걱정될 것이다. 그녀를 구하고 싶을 것이다.
“이만 소등하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코리오트 별궁으로 가겠다.”
그러나 결국 로메오 글로리나는 기약 없이 적의 손에 남겨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쯤 글로리나 부인은 어쩌고 있을까? 병아리인 나도, 사람인 나도 받아들이고 살뜰하게 보살펴 준 사람이었다.
뒤척거리다가 겉옷을 두르고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찬 공기가 숨통을 틔워 주었어도 여전히 가슴은 답답했다.
“아직 안 자는 게냐.”
“……전하야말로요? 어서 주무셔야 내일 별궁에 도착한 뒤 일하실 힘이 생기죠.”
클레멘츠가 다가와 내 옆에 섰다. 그는 여전히 밤이면 낮보다 더 기이하게 빛났다. 조금씩 흩뿌려지는 별빛과 흔들리는 등불의 우연한 그림자마저도 그의 편이었다.
악마. 흑마법. 황후. 그런 단어들이 멋대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24년 전의 일은 뭐였어요? 당신은 어떻게 태어났나요.’
대답은 듣지 못할 것이다. 새삼 속 쓰리지만 지금 물어야 할 건 그게 아니었다.
“글로리나 부인이 정보를 담당했다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선 집사장 업무에 집중하는 걸로 보이니 몰랐겠구나. 로메오는 황태자궁에 필요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고 취합하는 일을 해 왔다.”
“진짜요?”
“그래. 글로리나 남작 저택이 그 본부 역할을 수행했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셀레네 황후의 시녀였다.”
셀레네 황후.
그는 자기 어머니를 꼭 남처럼 이야기했다.
“그럼…… 엔시가 글로리나 부인 밑에서 찾았다는 일은…….”
“정보원이 되겠구나.”
“하하! 그렇구나……!”
그 녀석이 그렇게 도시의 외로운 늑대인 척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저만 몰랐던 거네요, 그럼.”
“알려서 뭐 좋은 일이 있다고 떠들겠느냐. 그리고…….”
“그리고?”
“……어둠 속에서, 윗전이 알지 못하게 처리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니까. 로메오는.”
‘로메오’에 이르러 클레멘츠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잠깐의 침묵이 우리 사이를 메웠다. 아마 우린 그런 그녀를, 냉정하게 말해 버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떠올렸으리라.
“괜찮으세요?”
“괜찮냐니. 무엇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기뻐 보이지 않았다.
유렌과 카렌도, 클레멘츠도. 나를 안심시키려고 감정을 억눌러 가며 애쓰는 게 마음 아팠다.
그의 두 손을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클레멘츠, 제가 생각을 좀 해 봤어요.”
“벌써 무섭군. 넌 이럴 때 꼭 황당한 걸 생각해 내던데.”
“그리고 전하께서 들어주시게 만들죠.”
“부정할 수는 없겠어.”
배시시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글로리나 부인을 구하러 갈게요.”
“안 돼.”
즉답이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겁도 없이 어딜 가겠다는 거지? 날아가려고?”
“맞아요! 날아서 갈 거예요. 저는 그럴 수 있잖아요. 빠르게 도착할 수 있고……. 아, 전하! 어디 가세요?”
이마를 쥐고 한숨을 쉬던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난 그 뒤를 종종 따르며 계속 주장했다.
“새로 변하면 정찰 능력도 우수하니까, 궁 안 어디에 부인이 갇혔는지 살펴보기도 수월해요. 제가 이래 봬도 백작가 시절 경험이 있어서 사람 몰래 탈출시키는 건 자신 있거든요. 설령 힘들다 해도 적어도 연락책 정도는…… 악! 뭐 하시는 거예요?”
느닷없이 돌아선 클레멘츠가 날 번쩍 안아 들었다.
“안 돼.”
“그렇지만 제가…….”
“안 된다고 했다. 내 일에 관심을 갖는 건 좋지만,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네가 해결해야 할 책임은 없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인걸요?”
“황태자궁의 녹을 먹는 기사들도,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도 감히 손대지 못한 일이다. 정식 직위도 없는 너에게 의지한다면 단체로 염치없는 놈들이겠지.”
성큼성큼 걷는 그의 옷깃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글로리나 부인은 대체 어떡해요, 네?”
“네가 구하러 갈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할 거다.”
그에게 안겨서 옮겨지다 보니 어느새 내 천막 앞이었다.
“오필리어, 로메오는 괜찮을 거야.”
“…….”
그 말씀은 제게 하시는 건가요, 전하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입 밖에 내진 못한 질문이었다.
내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클레멘츠는 천막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난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 지, 지금 숙녀의 숙소에…….”
“언제는 안 들어갔던가?”
“어……?”
하긴 황태자궁에 마련된 내 방에 잘도 곧잘 들어왔었다.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나 역시 클레멘츠의 방에 여러 번 쳐들어갔다.
그러니까 이것도 괜찮은 건가……?
천막 안은 작지만 깔끔했다. 간이로 꾸려진 침대와 받침대에 올려진 화덕이 있었다. 침대 위 보송보송한 이불은 내가 나오기 전 그대로의 상태였다.
클레멘츠는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
이어서 두 발에 신겨진 부츠가 벗겨졌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열렬한 사이라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흡.”
그가 내 발끝부터 덮어 준 이불이 내 입을 절묘하게 틀어막았다. 이건 명백한 고의였다.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
“자, 오필리어.”
“……아, 아니 잠깐. 왜 올라오시는 건데요?”
“어느 레이디 말씀대로, 지금 자야 내일 별궁에서 일할 힘이 생겨서.”
“그런데 여기서요……?”
클레멘츠가 구렁이 담 넘듯 침대에 올라왔다. 다행히 간이침대는 생각보다 튼튼한 모양이었다. 삐걱대는 소리 하나 나지 않는 걸 보면.
“밤새 지키지 않으면 그 레이디께서 훨훨 날아가 버리실 것 같으니 별 도리가 있나.”
“안 갈게요. 이것 좀…….”
그는 여유롭게 날 내려다보다가, 한 팔을 이불로 덮은 내 몸 위에 둘렀다. 그러곤 아예 옆으로 길게 누워 버렸다.
나는 클레멘츠의 몸과 팔에 막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껏 쏘아봤지만 그는 이미 눈을 감아 버린 뒤였다. 화덕의 붉은 조명이 그의 은발을 투과해 가느다란 빛의 윤곽선을 그렸다.
어떻게든 움직임을 확보하고자 꿈지럭거리자, 나른한 목소리가 귀 가까이 울렸다.
“자야지, 오필리어.”
과년한 처자의 처소에 난입해 잠들지도 못하게 괴롭히는 이런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걸까.
그의 팔 안에서 힘겹게 돌아누워 얼굴을 마주 보았다. 제한된 광원을 두고도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낱낱이 아름다웠다. 가슴속이 조그맣지만 확실하게 콩닥거렸다.
정말 이러고 잘 생각인가 보다.
“저기, 클레멘츠.”
클레멘츠는 반응하지 않았다.
“춥지 않겠어요? 그냥 이불을 같이 덮는 게.”
보랏빛 눈이 반짝 뜨였다.
“책임도 못 질 소리 하지 마.”
무슨 책임?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도로 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길 반복했다.
“……가지 마.”
느닷없이 내뱉어진 말은 잠꼬대였을까.
“내 옆에 있어. 날 떠나지 말고.”
깊이 잠긴 목을 긁으며 나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에마저 설레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안 된다고 말해도 결국 가리란 걸 어떻게 알아챘을까?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해 주었기에. 날 재우러 들어왔기에. 지금처럼 잠결에도 곁에 있어 달라 해 주었기에.
오히려 더욱 확신이 들었다. 나는 떠나야 한다.
클레멘츠를 사랑한다. 그러니 그가 가족 같은 유모를 잃는 것도, 그녀를 포기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싫었다.
나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지금 돕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겠지.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자 몸에 둘러진 팔이 반사적으로 조여들었다.
놀랐지만 잠결에 나온 반응일 뿐이었다.
우리는 더 행복하게, 더 오래 함께 있기 위해 잠시 떨어지는 것뿐이다.
천막 밖으로 나오니 날은 아직 어둑했다. 난 손 안의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잠귀가 밝으신 로판 남주인지라, 중간에 깰까 봐 어쩔 수 없이 이 하빌 뿌리 가루를 또 이용했다.
혹시 어떻게 될지 몰라 망토 안에 챙겨 넣어 둔 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며 이 주머니를 꺼낼 때, 클레멘츠가 혹여 깨어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미간만 좁히며 고쳐 눕는 그에게 하빌 가루를 사용한 뒤 이불까지 잘 덮어 주었다.
약기운이 잘 돌았으니 그는 푹 자고 일어날 것이다.
미련 없이 발길을 옮겼다. 아직 사람들이 깨어나지 않은 지금이 기회였다.
‘황금색 송이버섯.’
그리고 나는 날아올랐다.
큰 새의 몸이 기다렸다는 듯 공기를 타고 떠올랐다. 충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높이 가서, 수도를 향해 선회했다.
아래쪽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었다. 말을 타고 한동안 지나야 했던 길들이 한순간에 뒤편으로 멀어졌다.
먼동이 터 오며 온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나는 광활히 펼쳐진 아침노을 속을 통과하는 황금빛 점이었다.
클레멘츠는 지금쯤 일어나서 날 찾고 있을까?
이윽고, 클랏샤의 성벽이 보였다. 안쪽으로 시가지와 도로, 교회와 아카데미의 모습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