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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8)화 (158/218)

158화

그녀가 키워 낸 정보원들은 수도를 돌아다니며 쓸 만한 이야기를 물어 왔다.

주인인 클레멘츠가 황태자로서 눈과 귀를 잃지 않고, 또 적대 세력에게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로메오는 제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방금 떠난 엔시 녀석은 마지막으로 키우고 있는 아이였다. 영리하고 천진하며 ‘오필리어 님’을 아주 좋아했다.

‘전하께서 떠나신 후 궁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어.’

고작 하루가 흘렀을 뿐이지만. 건방진 2황자파들이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선, 황태자 전하는 언제 오시냐 어찌나 성화던지.

빨리 주군을 보좌하러 가야 했다. 고작 하루의 시간밖에 없었지만, 그녀를 우두머리로 둔 아이들을 무사히 피신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하루는 그녀의 생각보다 많이 길었는지도 모른다.

“남작 부인.”

고개를 들자, 로메오의 갈색 눈에 그녀를 가로막은 세 사람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그녀는 중산층 계급 여인이 입는 옷을 입었다. 엔시가 구두닦이 복장을 하고, 다른 녀석이 구두닦이 손님인 척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럼에도 정확히 ‘남작 부인’이라 불렸단 건,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저들이 안다는 의미였다.

“잡아!”

그들은 로메오가 집으로 가기 위해 어둑한 굴다리 밑으로 들어왔을 때를 노렸다. 벽에 달린 어설픈 등만이 주변을 간신히 밝히고 있었다.

두 명이 달려들었을 때, 로메오는 재빨리 빠져나가며 손에 든 가방을 뒤졌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는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저년이 칼을……! 윽!”

“뒤져!”

한 명이 떨어진 가방을 뒤지는 동안, 나머지 두 명의 몸에 칼집이 났다. 슉, 쉭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떨리는 손이 가방을 뒤집어엎었으나 나오는 건 새 모이용으로 잘게 쪼갠 과자 부스러기뿐이었다.

“이런 씨……!”

로메오 글로리나는 제 가방을 뒤진 사내의 손을 콱 밟았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냈지?”

묻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긴 했다.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에 튄 핏방울을 쓱 훔쳐 냈다.

“손 좀 으스러지는 걸론 입을 안 여는 모양이구나.”

가차 없는 칼이 갈비뼈 사이로 들어갔다. 정확히 한쪽 허파를 찔린 악당은 쉭쉭대는 소리로 웃었다.

“그래 봤자 네년은……!”

로메오는 붙잡았던 남자의 머리채를 팽개치고 숨을 죽였다.

역시나 이따위 허접한 놈들만 보냈을 리가 없었다. 굴다리 아래로 싹수 노란 것들이 하나둘 밀려들어 왔다. 어림잡아 세도 열 명은 되었다.

“……그분 말이 맞군. 왕년에 아무리 대단해 봤자 이젠 나이 든 여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질린 듯한 목소리였다. 로메오의 눈이 그들 하나하나의 기색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벽에 걸린 등을 잡아채며 도약해, 한 놈의 머리에 강하게 휘갈겼다.

“으악!!”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암전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들 우왕좌왕하는 사이, 로메오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기척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미친!”

“윽! 아악……!”

쿵 쓰러지는 소리, 신음하며 뒹구는 소리와 욕설이 산발적으로 들렸다.

‘해치우고 주군께 합류해야 해.’

존경하는 전 주인이 모든 것을 바쳐 지켜 낸 자식이었다. 친자식보다 소중한 클레멘츠 전하. 그리고 사랑스러운 오필리어 아가씨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던 황금빛 눈동자.

누군가는 눈먼 주먹을 휘둘렀다. 서로를 파악하겠다고 목소리를 내 가며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로메오는 그들 사이를 바삐 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 * *

“이상하군.”

보통 저 소리가 들리면 뭔가 잘못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수프가 담긴 컵을 들고 어슬렁거리다가 말소리가 난 쪽을 좀 더 힐끗거렸다. 모닥불 근처로 모여든 귀족들 틈엔 클레멘츠도 앉아 있었다.

코리오트 별궁은 코앞이었다. 성 밖에서 합류한 유렌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몇 시간 거리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시간이 늦어져 야영을 하게 되었지만.

다 같이 움직이니 야영 준비도 빠르게 마쳤다. 물품은 넉넉했고 저녁도 맛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글로리나 남작 부인이 하루 내로 합류한다 하였는데. 올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집사장의 일 처리는 정확하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경우는 있어도, 예고 없이 늦는 경우는 없다.”

추후 합류한다던 글로리나 부인의 소식이 없었다. 내 생각에도 부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때맞춰 도착할 것 같았는데, 이상했다.

집사장으로서 그녀는 황태자궁의 사정 전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교회가 클레멘츠의 가정사를 문제 삼는 이런 상황엔, 태어날 때부터 곁에서 모셨던 글로리나 부인 같은 이가 곁에 있어야 했다.

부인을 존경한다며 눈을 반짝이던 엔시가 떠올랐다.

정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 빙판길 때문에 오래 걸리는 것뿐이겠지. 바로 지금도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거야.

“전하!”

한 수행원이 클레멘츠를 불렀다. 다급한 기색이었다.

“클랏샤 방면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전하께서 들어 보셔야 할 듯합니다.”

돌아서던 클레멘츠는 힐끔대며 엿듣던 나를 발견했다. 그는 무릎에 덮고 있던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 주곤 수행원을 따라갔다.

“뭐지?”

주변의 귀족들도 궁금한 듯 수군거렸다.

“오필리어 님. 오필리어 님!”

“꼼짝도 않고 종일 오시느라 힘드셨죠?”

그가 멀어진 쪽을 힐끔대고 있으려니 유렌과 카렌이 다가왔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메이드들의 밝은 목소리가 통통 튀었다.

“가까운 곳에 경치 구경하기 상당히 좋은 명당이 있더라고요. 같이 가 보실래요?”

“그, 그럴까요?”

그들을 따라 걸으니 한적한 숲길이 나왔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뽀득뽀득 밟혔다. 두 명의 호위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를 따라왔다.

“어때요?”

“아름답네요…….”

작은 숲 너머가 탁 트여, 멀리에 폭포가 내려다보였다. 달빛을 반사하는 물이 신비로웠다.

“내일 아침 전하와 이곳으로 해돋이를 보러 오시는 건 어떠세요?”

카렌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를 실컷 꽁꽁 싸매어 놓고도 추위를 타면 안 된다며 아예 껴안고 있었다.

“새벽빛이 이곳을 가득 채우면 정말로 환상적일 거예요.”

“그렇겠네요.”

“자, 이것 보세요! 오필리어 님, 겨울딸기가 맺혔어요.”

유렌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빨간 열매를 똑똑 따다가 내밀었다. 하나를 조심스레 맛보자 설탕물 같은 달콤한 맛이 퍼졌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들은 글로리나 부인이 걱정되지 않는 걸까?

메이드들의 얼굴에 걱정이라든지 근심 같은 기색은 없었다. 마치 일부러 지워 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이들이 일부러 날 숲으로 이끌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그래요. 가서 잘 준비를 해야죠.”

묘한 호들갑까지. 나는 그냥 속 시원하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무 일 없었는데요! 일이라뇨.”

유렌은 시치미를 똑 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카렌이 한숨을 쉬며 울상을 지어 버렸다.

“…….”

“…….”

“하아.”

이내 한숨을 쉰 유렌의 표정도 카렌과 비슷한 정도로 우울해졌다.

그들이 실토한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야영지로 달려갔다.

글로리나 부인이 황비 측에 잡혔다.

분위기는 심각하다 못해 침통해져 있었다. 밤이 깊어 갔지만 잠드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의도가 너무 명확하지 않습니까!”

한 기사가 분통을 터뜨리며 맨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집사장이 우리 측에 중요한 인물인 걸 아니, 인질로 잡은 겁니다. 또한 황태자 전하의 유모이기도 하니, 구하려면 외유를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협박하는 겁니다!”

“구하려면? 황비가 집사장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럴…… 그럴 사람이던가?”

“그리 겪고도 클라우디아 황비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오? 다 제쳐 두고, 제 자식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한 나이 든 귀족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돌아갈 순 없소. 저들의 함정에 그대로 걸려드는 꼴이지.”

“……동의하오.”

옆 사람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가 눈치를 살피는 상대는 클레멘츠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형제는 남보다 못한 클레멘츠. 비록 피붙이는 아니나, 그에게 글로리나 부인은 유일한 가족이 아닐까.

이 상황에 수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그에겐 가족을 버리라는 얘기나 다름없어 보였다.

클레멘츠는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꼭 예전처럼, 자수정으로 장식한 석고상 같았다.

“에잇……!”

한 중년 귀족이 일어났다. 저번에 언뜻 카시스에게 듣기로는, 저 사람도 클레멘츠의 먼 친척이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수도로 돌아가서 집사장을 구해 오리다.”

어떤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심 누가 나서 주기만을 바랐으니.

그러나 나선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클레멘츠는 조용히 반문했다.

“카나리 백작, 그대의 용기와 헌신은 고맙다. 하지만 어떻게 글로리나 부인을 구할 거지?”

“그야 제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잡혔다곤 하는데, 어디 잡혀 있는 줄 알고? 정보를 담당하는 집사장 본인이 잡혔다. 장소를 알아냈다고 치면 어떻게 들어갈 거지? 분명 황비가 황족의 권위를 내세워 막을 터인데.”

“그건…….”

카나리 백작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침통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글로리나 부인을 구할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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