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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7)화 (157/218)

157화

황태자가 수도에 없는 이상, 당장은 모여 있어 봤자 소득이 없었다.

투덜대며 일어난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힐다가드 성녀는 비교적 한산해진 다음에 대예배실을 나서는 복도를 걸었다.

‘이 시점에 별궁행이라니. 그것도 늘 정무에 몰두해 잘 쉬지도 않는다던 황태자가.’

그녀는 천천히 걸었고, 되짚으며 의심했다.

“켕기는 구석이 있는 자의 태도야. 역시 황태자는…….”

교단의 추궁을 회피하려 든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지, 어떻게 합당한 대응을 할지는 차차 밝혀질 터였다.

또한 미심쩍은 건 이 자리에 모였던 사제들과 귀족들이었다.

속세엔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황태자를 고발하는 의도가 순수하게 종교적일 거라 믿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지나쳤다. 이미 조직적으로 짜인 하나의 덫처럼, 다 같이 한 사람을 물려고 들지 않나.

시미크의 충실한 종이라 보였던 황비는 이제 와서는 의심스러웠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을 어찌 처음 봤으랴.

교단의 일을 정치로 생각하는 교황과 달리, 힐다가드 성녀는 상대적으로 권력과 영합하는 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눈송이는 하늘과 땅의 빛과 진리와 사랑, 또한 순결한 성직자를 상징했다. 암만 황비가 곧 황후가 될 테고, 다음 황제 역시 그녀 소생의 2황자가 될 공산이 높다 쳐도.

성직자라면 그들의 이득을 위해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실제로 황태자에게 이단 죄를 물어 실각시킨다 쳐도.

면밀한 조사에 따라 합당한 처우를 결정하는 것과, 저들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신중히 파악하고 결정해야만 눈송이의 성녀라는 이칭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시미크시여, 제게 지혜를 주소서.”

겨울 햇살은 한차례 채색 유리를 통과해도 왠지 적적하게 느껴졌다. 푸른 머리칼을 가진 모자가 텅 빈 대예배실 안에서 서로 마주 보았다.

“성녀를 보았니?”

메디프는 조용히 읊조리며 통로를 빠져나가던 성녀를 기억했다.

“네.”

“어떻던?”

“물론 황태자 전하를 의심하고 계시죠. 사람이라면 이렇게 공교로운 시점에 떠나는 이를 의심하게 되는 법. 눈송이의 성녀라도, 땅에 발붙인 사람이니까요.”

그는 그럴싸하게 웃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아에겐, 메디프의 유들유들한 미소는 아무 소용없었다. 바로 그녀 자신이 가르친 연막이었으니.

“그뿐이면 다행이지. 저 로라시아 여자는 우리의 의도 역시 의심하고 있어.”

‘로라시아 여자’를 일컫는 말투에선 경멸감이 배어 나왔다.

“그대들이 황태자를 심문하려 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악마를 소환했기 때문이오?”

아무래도 고매하신 성녀께선, 파벌끼리 작당하여 누군가를 타도하는 꼴이 불편하신 모양이었다.

대상이 아무리 악마를 부른 황태자라 하여도.

‘저를 불러오기 위해, 호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황비는 여린 주먹을 피가 나도록 세게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성녀가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사건을 진행시켜야 했다.

“저 여자가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게 만들어야 한다. 무조건. 예외는 없어. 더는 우리를 의심할 겨를도 주지 말아야 해.”

“당신의 뜻대로 될 거예요, 어머니.”

“내 뜻대로 된다고? 하! 황태자가 도망쳤는데?”

메디프는 어머니를 달래려고 했지만, 황비는 달래지지 않았다. 얼마나 준비해 오던 일이던가. 계획에서 일점일획이 어긋날수록 초조함이 배로 몸집을 불렸다.

초조함은 쉽게 분노로 모습을 바꾸었다.

“너는 왜 그놈이 유유히 빠져나가도록 눈 뜨고 지켜보고 있었지?”

“……얼마 못 가서 돌아올 테니까요. 이 상황에서 별궁으로 피해 봤자, 잠깐의 시간 벌이밖엔 못 됩니다.”

“헛소리. 아들아, 황제가 될 생각이 있기는 한 거니?”

“…….”

메디프의 눈은 곧잘 웃음을 흉내 내어도, 열의는 지어낼 수 없었다.

애당초 될 생각 없었던 황제 따위, 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일 수 없었다.

“오, 얘야…….”

클라우디아는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누가 마다한다고 그래? 원래 네 것이란다. 사술로 태어난 마녀의 자식 따위가 가지면 안 돼.”

“여기서 굳이 그 이야긴 그만하죠. 황궁도 아니잖아요.”

“네 걸 되찾는 것뿐인데 왜 꺼려? 북쪽에 갇혀 평생 이름조차 잊힐 마법사 따위와 비교가 될 것 같니?”

황비의 희멀건 손이 메디프의 목 줄기를 스쳤다. 행동보다 앞선 말이, 말보다 앞선 눈빛이 친아들을 매섭게 추궁했다.

메디프는 대답할 의지를 잃고 돌아섰다.

“설마, 그 아이 때문이야?”

“……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가난하고 무지하며 예의도 모르는 계집애란다. 그렇다고 인물이 특별한 것도 아니지.”

메디프는 한 박자 늦게, 어머니가 오필리어를 이야기한다는 걸 알았다.

“제발 정신 차리거라. 클레멘츠의 자리를 네가 갖게 되고 나면, 그깟 건방진 병아리는 잊고도 남을 만큼 좋은 신부를 맞이하게 해 주마.”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부정해야 하나.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그 여자로부터 완전히 떠났다. 하지만 어미의 말마따나 ‘아둔하게 구는’ 이유가 그녀 때문이냐 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오필리어 양에게 그런 감정은…….”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래, 카밀 드 베일리스는 어떠니?”

‘우아하고 아름다운’이란 말을 들었을 때 메디프가 떠올린 건 검은 머리카락과 신비한 새벽하늘 색 눈동자의 잔상이었다.

바로 다음 나온 ‘카밀 드 베일리스’란 이름은 그 하느작대는 환각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싫습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아일 데려오게,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란 말이다!”“황태자가 돌아오겠거니 기다리지 말고, 돌아오게 만들어!”

아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어미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인내하지 않는 어미는 바다 폭풍 같았다. 단지 몰아치고 몰아쳐 복종시킬 뿐이었다.

메디프는 작게 되물음으로써 겨우 맞섰다.

“……돌아오게 만들라고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래, 넌 모를 테지. 한 번은 이 어미가 보여 줄게. 그 뒤는 네가 좀 해내 보이거라.”

순간 메디프는 두려워졌다.

늘 그렇듯 어머니는 그의 주먹 쥔 손을 억지로 펴고, 손바닥에 소중히 감춰 놨던 것들을 가져가 버렸다.

이번엔 어쩔 셈인 걸까?

그리고 이렇게 또 어머니의 등에 떠밀리고 나면. 이제부터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뭘 해내야 하는가? 뭘 해낼 수 있는가?

“황태자의 사람들은 외유 핑계를 대며 성 밖을 빠져나갔지만, 아직 그 집사장은 클랏샤를 벗어나지 않았다지?”

클라우디아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 * *

“구두 닦아요. 수선도 합니다.”

클랏샤 변두리의 작은 공원. 담장에 기대어 앉아 중얼거리는 소년은 별로 눈길을 끌지 않았다.

“어디 내 구두도 닦아 보겠어?”

소년은 손에 묶어 놓은 구둣솔로 사내의 구두를 톡톡 털어 냈다.

“깨끗하구만 뭘요.”

“이놈아, 장사하기 싫어?”

사내가 머리를 쓰다듬자, 소년은 슥 피하며 모자를 한 번 더 눌러썼다. 모자가 벗겨질세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얼마 안 걸려요.”

소년은 작업 상자에서 색깔이 맞는 구두약을 꺼냈다. 솔질이 이어지는 동안 사내는 나지막한 의자에 앉아 휘파람을 불었다. 행인들이 거니는 공원 안은 평화로웠다.

“옜다.”

일을 마친 소년의 손에 동전이 쥐어졌다. 소년의 올리브색 눈이 의문을 표했다.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해야지. 맛있는 거 사 먹어. 사탕 좋아하던가?”

소년, 엔시는 대답 대신 못마땅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흠, 내가 떠나면 네가 마지막인가? 한동안 얼굴 못 보겠네.”

“가세요, 손님.”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반질반질해진 구두코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리고 행객들 사이에 섞여 적당한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엔시는 동전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쪽지를 펴 보았다. 다시 접어서, 뒤쪽 벤치에 앉은 중년 여인에게 내밀었다.

비둘기 떼에게 밥을 주던 여인은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았다.

“마지막 보고네요, 부인.”

“그리고 네가 마지막이구나. 가거라. 일러뒀던 곳으로 움직이렴.”

딱 서로에게만 들릴 성량의 대화였다. 시선은 여전히 비둘기들에게, 그리고 잠재적인 손님이 될 만한 저 멀리 지나가는 이들의 구두에 꽂힌 채였다.

“가서는 뭘 하면 돼요?”

“충분히 쉬어야지.”

“할 게 고작 쉬는 거라니.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은 난생처음이네요.”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곤 납작한 모자를 다시 썼다. 여인이 덧붙였다.

“가르쳐 준 건 꾸준히 연습하고.”

“염려 마세요. 훈련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니까. 부인처럼 되려면 하루도 쉬지 않아야 하는 거 맞죠?”

중년의 여인은 잠시 손을 멈췄다. 옅게 주름진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싸우는 것도 좋지만, 약을 이용해서 다 쓰러뜨리는 법도 배우면 안 돼요? 전에 오필리어 누나는 그렇게 하던데…….”

“얘야.”

“앗, 네네. 그분 이름 함부로 부르지 않을게요.”

“그만 가 보렴.”

자리를 정리한 소년은 태연한 걸음으로 공원을 벗어났다.

소년이 멀어졌을 즈음, 부인은 우연한 시선인 듯 흘깃 아이가 멀어진 곳을 응시했다.

엔시는 무사히 연락책과 만났다. 이제 아이는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게 될 것이다. 그녀가 다시 수도로 돌아올 때까지.

황태자의 유모이자 집사장이며 정보 수집책, 로메오 글로리나 남작 부인은 일어나서 걸었다. 비둘기들이 구구거리며 그녀를 가로막다가 이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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