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인공의 삐약이가 되어 버렸다 (156)화 (156/218)

156화

“회의장에 계셨던 은발 머리 여성은, 전하의 이모님이시죠?”

“맞아. 샹그리아 공작이다.”

이 나라의 공작이자 황태자의 이모. 거기다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3대 세력가였던 가문의 가주가 아닌가. 그런데 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몰골이 된 걸까?

왜 그들 가문은 중앙 정계에 참여하지도 않고 저택에 칩거하다시피 한 걸까?

‘원작’도 알려 주지 않은 이야기는 모두 셀레네 황후와 얽혀 있었다.

“그럼…… 그분이 말씀하신 ‘24년 전 일’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무척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떨리는 목소리였다.

쉽게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건 알았다.

회의장에서도 샹그리아 공작이 ‘24년 전’이라 운을 떼자마자 주위가 얼어붙었으니까.

왜 하필 24년 전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클레멘츠가 태어났을 때가 그 무렵일 거다.

내가 감히 물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도 몰랐다. 입에 올렸다간 경을 칠 일인지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클레멘츠의 일이라면 핵심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겁을 상실한 것 같기도 했고, 내가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역시나 클레멘츠는 입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찬 공기에 시달린 내가 훌쩍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야기다. 어머니가…….”

고요한 목소리였다.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어머니’라는 단어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내 그 호칭은 좀 더 공식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황후, 그 사람은 왕국 최고의 적마도사였어. 필요한 게 있었고, 무리한 방법으로 얻어서, 자멸했다.”

“…….”

수도 없이 축약되고 함축된 말이었다.

죽은 황후 셀레네에 대해서는 소문만이 무성했다. 거리에 떠도는 더러운 소문들이 떠올랐지만, 차마 내 입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뭐가 필요하셨던 거죠? 어떤 방법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내가 태어났을 때의 일이니.”

“아…….”

하기야, 클레멘츠 본인도 자신이 태어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소상히 모를 수도 있었다. 다들 쉬쉬했을 테니까.

어쨌든 이만큼이라도 알려 줬다는 게 고마웠다. 그 정도로 나를 믿는다는 뜻일 테니까.

이왕 믿는 거, 좀 더 믿음직스럽게 여겨 주면 좋을 텐데.

“클레멘츠.”

“그래, 오필리어.”

“당신을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어떤 위험에라도 뛰어들 거예요.”

“…….”

그러니 좀 더 털어놔도, 의지해도 된다는 거였는데. 말하자마자 그의 팔이 내 몸을 바짝 조여 들었다.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극히 낮은 목소리는 귀를 거쳐 심장에 바로 꽂히는 것 같았다.

“가끔 보면 넌, 스스로가 나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는 것 같더군.”

“……!”

귓바퀴를 간질이는 속삭임이 소름끼쳤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벗어나려고 쏘삭거렸지만, 꼼짝없이 붙들린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가 제정신으로 있게 도와주지 않겠느냐?”

“제, 제정신이잖아요.”

물론 고운 얼굴로 조금씩 미쳐 있긴 하지만, 그게 클레멘츠의 기본 상태니까.

“그야 지금은 네가 안전한 몸으로 내 품에 있지 않으냐.”

“…….”

그러니까 이건 또 그 나름의 경고인 셈이었다. 자신이 미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안전하게 있어 달라는.

설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도 거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겨울 벌판과 멀리로 숲이 이어지던 전방에 행렬이 보였다.

성 밖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클레멘츠의 지지 세력이었다.

* * *

“……이와 같은 의혹을 깨끗이 밝히고 대제국 클라티아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황태자 클레멘츠 뒤싱겐을 고발하는 바이다.”

두터운 문서를 읽어 나가는 대주교의 목소리가 예배당에 길게 울려 퍼졌다.

평소보다 화려한 육각 관에는 눈송이를 연상시키는 수정 장식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수도 한편에 위치한 교회는 육각형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몇 사람이 움직이고 연설하기 충분한 크기의 마룻바닥이 육각형으로 짜여 있고, 그 위에 연단이 놓여 있었다.

무대 뒷면의 대기실을 제외하면 다섯 면으로부터 이어진 경사면을 따라 긴 의자가 줄을 이어 설치되어 있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은 주로 가운데의 마룻바닥을 비추었고, 따라서 좌석 쪽은 조금 어두웠다.

드넓은 대예배실의 어두운 좌석을 채운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안 되는 그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대체 황태자는 어디 있는 거요?”

신성한 교리를 의무 삼아 황태자를 묶어야 했다.

더 확실한 권위로 굴복시키기 위해 먼 신성 왕국에서 성녀까지 데려다 앉혔는데. 정작 도마 위에 놓여야 할 황태자가 없었다.

어디로 가셨냐 물어보아도 ‘계시지 않는다,’란 대답뿐이었다. 황태자궁엔 집사장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 아예 수도를 벗어난 듯했다.

가운데에 앉은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대답했다.

“놀러 가던데요.”

“……예?”

그노시드 대주교는 기가 막혔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2황자 전하!”

“말 그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셔야지요. 이 늙은이가 놀라지 않습니까.”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황비의 아들인 2황자는 장차 교단에서 황제로 밀어 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너무 가볍지 않나.

지금 저와 장난치시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가 간신히 진정한 것은 순전히 이 자리에 있는 황비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형님께서는 궁 밖으로 외유를 나가셨습니다. 아끼시는 레오라 영애도 함께.”

“외유요? 허허……. 외유? 지금 외유라 하셨습니까?”

“새벽에 궁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안 돌아오실지는 몰랐지 뭡니까. 아마 레오라 영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모양이지요.”

그노시드 대주교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발렌틴 주교가 준수한 성량으로 끼어들었다.

“아이고, 그걸 왜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까!”

“안타깝지만 그걸 제가 무슨 수로 막습니까?”

메디프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간 휴일 없이 일해 오신 황태자께서 휴가를 떠날 수도 있는 일. 교단 측에서 미리 소환령을 내려 발을 묶어 둔 것도 아니고.”

“그때…… 두 분을 마주쳤을 때 뭔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아닌 새벽에 레이디와 함께 말을 끌고……. 그때 붙잡았어야 했습니다.”

비교적 수수한 사제복을 걸친 평사제 하나가 초조해하며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쪽이 어떻게 붙잡았어야 하지?’

메디프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속으로 비웃었다.

그동안 조용히 분노를 누적한 리베르틴 추기경이 소리쳤다.

“그래…… 그놈의 소환령! 성녀께서 오시자마자 소환령을 내려 두었어야 하는 것을, 이 게으른 놈들이!”

“추기경, 그건 당신이 할 일이었잖소!”

추기경은 실무 계급의 사제들을 향해 외친 말이었지만, 2황자파 귀족들이 보기엔 ‘교단이 일을 제때 하지 않아 난 사달’이었다.

“지금 뭐라고…….”

리베르틴 추기경의 눈이 음험하게 빛나고, 서로 책임을 미루는 눈길들이 오갈 무렵.

“크, 큰일 났습니다!”

대예배실 문을 열고 들이닥친 시동이 보고했다.

“황태자파 귀족들도 상당수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수도에 없습니다.”

“뭐야!”

발렌틴 주교가 날뛰며 외쳤다.

“대체 왜!”

“외, 외유를 나갔다고 합니다. 황태자 전하와 같이…….”

대예배실에 모인 이들은 공황에 빠졌다.

애써 황태자를 잡을 그물을 준비해 뒀는데, 던지기도 전에 냉큼 빠져나가 버린 듯했다.

고위 성직자들이 포진해 있는 수도에서나 교리에 의한 심문회가 가능했다. 황태자가 향했다는 별궁은 기껏해야 작은 기도실 정도밖에 없는 한적한 전원이었다.

이제 와 소환령을 발효한대도, 별궁에 도착한 황태자가 몸이 좋지 않다며 드러눕기라도 한다면? 강제로 데려올 방법도 없었다.

귀족들을 데려가긴 했으나 군을 움직이진 않았으니, 국법으로도 흠잡을 곳은 없었다.

살뜰히도 챙겨 간 측근들이 옆에서 돕는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금세 대책을 마련할 것이었다.

페리윙클가 출신의 늙은 귀족이 중얼거렸다.

“냄새 하나는 짐승처럼 맡는군. 누가 그 어미의 자식 아니랄까 봐…….”

“이제 어떡하면 좋소?”

그때 성녀가 일어섰다.

비둘기 색 베일에 감싸인 몸은 당당히 일어서며 공간 전체를 압도했다. 어수선하던 대예배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황태자는 언제쯤 돌아오는가?”

성녀의 질문을 받은 메디프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교도의 예를 바쳤다.

“외람되오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소? 그렇다면 누가 알고 있지?”

“현재 형님과 관련이 깊은 이들은 대부분 궁을 떠난 상태라, 알기 힘듭니다. 바로 오늘 밤 돌아올 수도 있고, 며칠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힐다가드 성녀는 연녹색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한숨과 불평이 예배당을 메웠다.

“누가 봐도 시간을 끌어 대책을 마련하려는 수작이잖소!”

“암. 분명하지.”

힐다가드가 한손을 치켜올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실내가 조용해졌다.

“그대들이 황태자를 심문하려 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악마를 소환했기 때문이오?”

좌중은 황태자에 대한 성녀의 비판과 질책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서로를 힐끗대고, 어깨를 으쓱이다가 대답했다.

“그야 물론입니다.”

“정녕, 단지 그 때문인가?”

“……?”

조금 전보다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적지 않은 이들이 저 물음의 저의를 알아차린 탓이었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0